영지 귀족의 탄생
독도.
외로운 섬 독도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수천을 헤아리는 각성자가 독도에 우글거렸다. 태운 정밀 미래기획부는 부서가 회사로 독립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태운 등대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회사가 되었고 강유성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김연희가 부사장이 되었고 신기는 전무가 되었다. 김태풍이 부장이 되어 지원팀을 구성하고 이끌었다. 유인한 괴물을 다 처리하기 힘들 때 지원팀이 출동한다. 신기는 특별팀을 구성해서 각 지역 등대를 순회하며 괴물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독도에 거주하는 각성자 중 삼백에 가까운 각성자는 짧은 머리가 인상적이다. 박영광이 군에서 불러온 충직한 수하들이다. 구슬의 수가 부족해서 우선 삼백 명이 조금 안 되게 각성시켰다. 스킬을 얻지 못한 자가 대부분이지만 전투 기술을 이미 갖추었고 각성하면서 신체 능력이 향상돼 전투력이 높다.
"내일은 여기를 떠나야겠군요. 신 전무님은 섭섭하지 않으신가요?"
박영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해박한 역사 지식으로 일을 결정할 때 늘 예전에 있었던 사례들을 가져다 자신의 의견을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불상 하나 모시고 매일 백팔배를 올리면서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
"괜찮습니다. 다른 지역의 등대도 안정시켜야죠. 이사님 덕분에 괴물을 더 빨리 몰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영광의 적절한 배치 덕분에 효율적으로 괴물을 유인할 수 있게 되었다. 독도를 제외하고도 신기와 특별팀의 노력으로 안정화를 이룬 등대가 적지 않다.
미끼 스킬을 사용하다 보면 갑자기 괴물 숫자가 급증하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넘은 후 매일 유인할 수 있는 괴물 숫자가 기복이 없으면 미끼 스킬을 갖춘 각성자와 괴물을 처리할 각성자를 정확히 배치할 수 있다. 매일 처리해야 할 괴물의 숫자를 알아내면 안정화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신기의 특별팀이 헬기로 분주하게 오가며 동해안에 세운 적지 않은 등대를 안정화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래서 동해안에 안정화를 이룬 등대가 충분해졌다. 그래서 이쪽은 지원팀에 넘기고 특별팀은 서해안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독도에 설치했던 지휘부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는 신기와 달리 박영광은 허리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신기에게도 처음에는 깍듯하게 대했지만 전무나 이사나 같은 급이라며 신기가 거듭 사양해서 이제는 좀 편하게 대한다.
"내일이면 이곳도 안녕이군요. 마지막 노을 보러 올라왔어요."
해가 바뀌었지만 만으로는 29세의 나이에 여자의 몸으로 직원 육천 명에 육박하는 회사의 부사장이 되었다. 강유성이 사장 자리를 차지했지만 실무는 모두 김연희의 손을 거쳐야 하기에 실질적인 사장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박사님은 이젠 멋진 사무실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비서들에게 지시만 내리면 되겠군요. 역시 여자로 태어나는 게 답이었습니다."
신기의 농담에 김연희는 깔깔 웃었다. 유머 코드가 특이해서 웃기지도 않는 말에 무척 잘 웃는 김연희다.
"저는 한 일도 별로 없는데 벌써 부귀영화를 누리게 돼서 참 미안하네요."
말을 마친 김연희는 또 깔깔 웃어댔다. 부귀영화라는 자신의 말에 빵 터진 것이다.
"두 분도 조금 더 고생하면 될 것 같습니다. 동해안과 서해안을 안정화하고 남해안을 공략하고 다시 수비선을 보강하는 데까지 일 년이 안 걸릴 것 같습니다. 물론 두 분은 주말에도 쉬지 말아야겠죠. 잔업비는 제가 꼬박꼬박 적어둘 테니 떼일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명절 수당이랑 야외 작업 비용도 잊지 마십시오."
박영광의 농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사람이 예상치 못하게 농을 던져서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다. 심지어 농을 한 박영광 본인도 어색해했다.
"육군 창설은 어떻게 되었나요? 삼백도 안 되어서 작전 수행이 가능할까요?"
등대에서 미끼로 괴물을 유인해서 처리하는 각성자들을 해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구슬을 통해 각성한 박영광의 수하들로 육군을 창설할 생각이다. 스킬을 얻지 못한 각성자들 대부분 박영광의 소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들은 육로를 통해 괴물을 처리하며 버렸던 땅들을 수복할 계획이다.
"지난달부터 더 많은 구슬을 배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육지의 괴물 숫자는 줄어들 테니 전혀 걱정 없습니다. 건물에 갇혀 미끼 스킬에도 끌려가지 못한 괴물만 처리하면 되니 전혀 어려울 게 없습니다."
"신 팀장님은 특별팀에 충원이 필요하지 않은가요?"
"지금으로 충분합니다."
현재 특별팀은 신기와 박철 그리고 효주와 최영웅으로 이루어졌다. 박철이 유인하고 신기가 처리하고 효주의 강아지가 구슬을 찾아온다. 최영웅은 효주의 보디가드다.
노을을 조금 더 감상하다 김연희가 먼저 내려갔다. 김연희가 사라지자 박영광이 우려에 찬 말투로 신기에게 질문했다.
"김태풍을 보십시오. 쓸만한 각성자는 다 자기 팀으로 데려가려고 눈에 불을 켰습니다. 이제 안정을 찾으면 세력 싸움이 되고 명분 싸움이 될 텐데 신 전무께서 김태풍에게 밀릴 가능성이 큽니다."
"별 걱정 다 하십니다. 저는 괴물만 다 몰아내면 됩니다. 그 뒤의 일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신기는 괴물을 다 몰아내고 소원만 이루면 된다. 그 말을 한 것인데 박영광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과연 신 전무님은 숭고한 분이십니다. 저 같은 죄인에게 회개의 기회도 주시고. 신 전무님을 도와 하루빨리 괴물을 몰아내고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 DUAL SYSTEM ###
서울.
형편이 나아지면서 전기를 주는 시간을 하루 여섯 시간으로 늘렸다. 그리고 뉴스는 점점 희망적인 메시지들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등대 프로젝트로 매일 괴물 수십만 마리씩 처리한다는 뉴스에 시민들은 열광했다.
강경운을 청와대로 보내자는 의견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저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각 지역 등대에서 괴물을 유인해 처리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여주었고 가끔 생방송으로 보여주기도 해서 뉴스를 의심하는 사람이 드물다. 물론 얼굴마담은 신기가 아닌 김태풍이었다.
그리고 등대 프로젝트가 서해안으로 확장했다는 뉴스가 사흘 전 터졌다. 동해안에는 괴물이 거의 상륙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서해안도 몇 달이면 안전하게 변할 것이라고 뉴스가 전했다.
그리고 오늘 중대한 발표가 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이 TV 앞에 앉아서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대했다. 아무 채널이나 틀어도 똑같이 정부의 기자발표회를 주제로 하기에 굳이 어디를 볼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발표를 하겠습니다."
미사여구와 정치적 수식어들을 빼면 핵심이 남는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통일이었다. 남북 정부가 마음을 열고 진실한 교류를 통해 국가의 통일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통일된 국가 명칭은 여전히 대한민국으로 유지한다.
무작정 기뻐하는 사람도 있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구분을 못 해 떨떠름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북한의 식량 사정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밥을 축내는 입이 늘었다고 푸념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모두가 바라던 좋은 뉴스는 아니었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헌법 개정에 찬성한 결과, 대한민국은 토지의 사유화 및 자치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통일보다 더 충격적인 발표가 따라왔다. 통일은 미리 강심제를 놓은 것이라는 듯 파격적인 발표가 이어졌다.
"법에 규정된 규모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경우, 자치를 허용합니다. 다만 대한민국 헌법에 어긋나는 법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정부가 제재를 가합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면 자치를 신청할 수 있다. 헌법만 지키면 되고 남은 법은 대한민국의 법을 따라도 되고 직접 법을 만들어도 된다. 군대를 양성할 수 있고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도 직접 채용할 수 있다. 물론 돈을 내고 정부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정해진 액수를 정부에 바치면 정부가 군대와 경찰을 파견해 줄 수도 있다.
개인 소유지에 호적을 올린 사람은 땅의 주인에게 세금을 낸다. 땅의 주인은 대한민국 정부에 세금을 낸다. 그리고 이주의 자유를 보장한다. 세금이나 여러 정책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
"이거 완전 옛날 지주 아니야."
"아니지, 지주보다는 유럽 귀족에 가까운데."
영지를 차지하고 영지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으며 왕에게 세금을 바친다. 군대를 보유할 수 있고 영지 안의 법은 직접 제정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서로 간의 전쟁이 금지되어 있다.
"잠깐, 그럼 말이 통일이지 북한 땅은 결국 김씨 일가 꺼니까 자치네?"
"에이, 통일은 개뿔. 결국 눈 가리고 아옹이네."
"문제는 그게 아냐. 통일은 허울뿐이지. 결국 북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다는 뜻 아니야."
나름 유식한 어른들이 토론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경청했다.
"북한에서 굶는 사람들이 다 이쪽으로 오면 그쪽도 좋을 게 없을 텐데. 왜 이런 통일에 동의했을까?"
"그쪽에 식량이 부족하잖아. 그러니까 쓸모없는 놈들은 남쪽으로 가라는 뜻이겠지."
"뭐 정부에서 그쪽 땅 수복하는 거 도와준다고 했거나. 태운 그룹이 돈 받고 북에도 등대 세워줄지도 모르지."
"먼저 한국부터 다 해야지. 북한에 등대를 세워준다니, 태운 그룹 그렇게 안 봤는데 참 실망이야."
"제길, 망할 놈의 정부가 그렇지 뭐. 열 받으니 술 생각이 나는구나. 막창에 소주 한잔 빨았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그럼 나가 죽어요. 내가 소주랑 막창 구해서 구워줄 테니. 정부에서 주는 일거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맨날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입만 살아서는."
"이 썩을 여편네가. 눈탱이 밤탱이 돼야 정신 차릴 거야?"
"응, 차라리 죽여라 죽여. 안 그래도 죽지 못해 사네요. 여편네는 새끼 입에 고기 한 점 넣어주겠다고 미친년처럼 돌아다니며 일을 찾아서 하는데 맨날 방구석에 퍼져있고, 한다는 개소리가 막창에 소주 한잔? 주댕이나 나불대지 않았으면 밉지나 않지. 예전에 회사 다니며 월급 받아올 때는 나한테 그렇게 유세 부렸으면서."
다행히 옆에서 뜯어말려서 손찌검까지 가지 않았다. 아이 하나가 울기 시작하자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함께 울어댔다. 성질을 부리던 여자가 막 울고 말리던 여편네들이 함께 울었고 결국 남자들도 눈물을 떨궜다.
### DUAL SYSTEM ###
서울 태운 등대 지휘팀.
"박 이사님, 구울의 출현 시간이 또 늦춰졌습니다."
"최 차장. 확실히 미뤄졌어?"
박영광을 따라 지휘팀에서 차장 자리를 맡은 최송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자기 상냥해진 박영광에게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말로만 위협했고 손찌검도 초반에 잠깐만 했었다. 대기업의 차장이 되고 나니 예전에 서운했던 기억들이 서서히 미화되기 시작했다.
"네, 확실합니다. 스킬이 거짓말하지는 않겠죠."
"괴물 모양은 알아냈고?"
"여기 사진 보십시오."
키가 3미터가 넘어 보이는 괴물이었다. 좀비랑 해골이랑 함께 있어서 훨씬 더 커 보이지만 박영광은 사진의 각도에 미혹되지 않고 정확히 3미터 좌우임을 알아봤다.
"어디서 구한 거야?"
"위성으로 찍은 거고 일본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냈습니다. 전문가에게 조작된 사진이 아니라는 걸 확인받았습니다."
"역시 최 차장이 일은 잘해."
보고할 때마다 칭찬을 받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일관되게 상냥함을 보이는 박영광에게 믿음이 생겨서 자신의 추측을 과감하게 말했다.
"스킬이 아닌 제 생각입니다. 구울이라는 이름을 붙인 저 괴물 말입니다. 혹시 해골과 좀비를 재료로 만든 게 아닐까요?"
최송철의 말에 박영광은 귀가 번쩍 뜨였다. 뼈만 있는 해골과 뼈가 거의 없는 근육투성이 좀비. 이 둘을 합쳐서 저 거대한 괴물을 만들었다는 말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부사장님에게 보고하러 가자. 내가 끼면 말이 왜곡될 수 있으니 네가 직접 얘기해."
"제가요?"
높은 분을 만난다는 소리에 최송철은 심하게 떨었다.
"당연하지. 부사장님이 박사님이셔. 당연히 어려운 질문을 할 거고 나는 대답할 수 없으니 네가 해야지."
최송철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박영광을 따라 기운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 작가의말
지금 글 진행에 설명이 충분한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이 읽는 분들이 이해되도록 썼는지 알고 싶습니다. 완급조절이 참 힘드네요.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