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락
이계.
엘프 여왕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초월자로서는 무척 드문 표정이다.
"대단하군. 어떻게 격에 어울리지 않는 지혜를 갖출 수 있지?"
"너희랑 다르게 우리는 개개인이 멍청하지 않아. 너희 종족처럼 별 욕심 없이 묵묵히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자유의지를 존중한다고. 너희처럼 틀에 넣고 안 맞으면 제거해버리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경쟁하고 승리하고 도태되게 해. 이 정도 꾀는 머리 굴린다는 말을 쓰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상식이라고."
엘프 여왕이 D를 불러내지 않으면, 계약을 어긴 게 된다. 신기가 부탁하면 D를 불러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가 부탁했음에도 D를 불러내지 않으면 계약을 어긴 게 된다. 그러면 다른 D를 불러내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한다. 그런데 엘프 여왕은 D와 계약을 수정해서 방금 말해준 방법만 알려주기로 했다. 그러니 신기가 시키는 대로 D를 불러내야 한다.
"잘 생각해. 내가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넌 계약을 어긴 게 되거든. 그럼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른다고."
"네가 기한을 정한 건 아니잖아."
"그렇군. 그럼 나는 당장 돌아가서 네가 계약을 어기게 만들겠다."
신기는 고민했다. 번뜩이는 생각으로 엘프 여왕에게 D를 불러내라고 '부탁'했지만, 기한을 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계속 있자니 D가 저쪽에서 딴 수작을 부릴 것 같다. 그러나 엘프 여왕은 계약이 안 끝났기에 해코지할 수 없다.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누르고 있던 신기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군."
신기는 소멸의 빛으로 뱀파이어 드래곤을 죽여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엘프 여왕은 반응도 못 했다. 소멸은 죽음보다 부활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길고 어렵다. 엘프 여왕은 갑자기 무력을 사용하는 신기에게 겁먹고 생명의 막을 두껍게 둘렀다.
"문득 생각난 건데, 내가 건너간 다음 네가 종족을 저 제비한테 넘기고 계약의 반동을 감수할 가능성이 무척 크더라고. 아무래도 얻어갈 게 없는 나와의 계약보다는 D가 줄 게 많겠지. 지금이라도 D를 불러낼 생각이 없어?"
엘프 여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기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엘프 여왕과 여기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D를 처리할 방법은 돌아가서 따로 알아볼 생각이다.
여름의 무더위를 태워 죽일 뜨거운 불이 신기를 덮쳐왔다. 그걸 견뎌내니 엄동설한이 추위에 떨 차가움이 덮쳤다. 추위를 겨우 버텨내니 진성 아재인 부장님의 개그보다 더 숨 막히는 막막함이 밀려왔다. 히드라의 구슬로부터 얻은 재생 능력과 여러 스킬로 버텨냈던 앞선 공격보다 훨씬 오래 신기를 괴롭혔다.
번개에 통구이가 될 정도로 구워졌고 포이즌 드래곤의 독이 할아버지라 불러야 할 정도로 독한 액체에 담가지기도 했다. 구멍을 뚫은 쪽에서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건 법칙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그래도 지구에서 이계로 넘어갈 때의 경험이 있어 좀 더 쉽게 버틸 수 있다. 물론 괴롭히는 방법이 달라졌지만, 신기의 힘이 줄어서인지 강도도 훨씬 약해졌다.
"아시발."
육체와 정신의 견디기 힘든 고통도 신기의 화를 누르지 못했다. 지구로 돌아가는 신기를 D가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나름대로 굴렸지만, 엘프 여왕에게 당했다.
신기가 출발하자마자 D가 이쪽 세상으로 넘어온 것이다. 엘프 여왕은 D를 불러낸다는 계약을 완수했다. 그리고 D는 신기의 마수를 피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갔다. 둘의 계약 내용은 모르지만, 신기와의 계약 조건은 전부 충족했다.
"엘프 여왕, 무슨 수작을 부렸지?"
아직 D가 저쪽 세상에 도착하지 못했는지 계약이 완료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기는 엘프 여왕과 이상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편법으로 계약을 완수했기에 반동을 줄이려고 말해주는 거다. 이후 격을 열심히 올리고 계약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신기가 이계로 넘어간 후, 엘프 여왕은 D와 계약을 수정했다. 엘프 여왕은 D의 안전을 보장했고 D는 지구의 '유일' 초월자로서, 그 어떤 '누구도' 엘프 여왕의 세계로 다시는 구멍을 뚫지 않을 것을 계약했다. 둘의 계약 당시 신기가 이계에 있었기에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러니까 함부로 구멍을 뚫으려고 시도하지 말아. 두 세계 사이의 막이 계약으로 더 강해졌지만, 네가 힘을 키우거나 기술을 터득해서 구멍을 뚫는 건 당연히 가능하다. 다만 그 반동은 네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강할 것이다."
"D가 너를 가만히 둘 것 같아?"
"D는 격이 너무 떨어졌다.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고, 계약 수정의 반동을 모두 감당하기로 했고, 억지로 현신하느라 격이 떨어졌지. 내 세상에서 종족의 보호를 받는 나를 어찌할 능력이 전혀 없다. 그리고 난 D와 계약을 맺어 뱀파이어 드래곤의 자리를 대체하게 할 생각이다. 둘이 손잡으면 우리 종족은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고, 곧 격이 한 단계 높아지겠지. 그러면 격의 차이가 너무 벌어져서 우리 두 세계의 연결은 완전히 사라진다."
"내가 억지로 구멍을 뚫고 반동을 받고, 남은 사람들이 너희를 다 죽이면 되겠네. 너희 세상은 우리 세상에 합쳐진다고 했었나? 그럼 너희 종족은 물론 너까지 부활의 여지도 없이 소멸하겠네?"
신기의 말에 엘프 여왕은 고개를 저었다.
"격이 꽤 높아졌는데도 감정의 지배를 받다니, 이해할 수 없군. 냉정하게 생각해. 넌 D를 세상에서 쫓아내고 유일한 초월자가 되었어. D는 불가능하지만 넌 인류를 자신의 종족으로 만들 수 있어. 초월자가 종족 지도자가 되자마자 수십억의 권속을 거느린 건 내가 살아온 세월 동안 발생한 적이 없는 일이야. 신성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넌 네 세상에서 신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건 다 이루어진다고.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고 말이야. 네가 원하면 네 모든 종족이 영생을 누릴 수 있어. 그게 우리 엘프처럼 다시 젊게 태어나는 방식이든, 불사족처럼 생명과 죽음을 함께 버리는 방식이든. 넌 나보다도 신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라고. 그런데 왜 작은 복수심을 이기지 못해 이 모든 걸 망치려는 거지?"
그때 신기와 엘프 여왕이 있던 공간이 흔들렸다. D가 마침내 이계에 도착한 것이다.
"모든 감정을 버리고 이성만 남겨. 그게 초월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이야. 감정을 버리지 못하면 D처럼 멍청한 짓을 하다 자멸할 거야."
그 뒤로도 신기의 육체와 정신은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신기는 모든 고통을 꾹 참아냈다.
### DUAL SYSTEM ###
후지산.
신기는 나오자마자 후지산임을 알아챘다. 수많은 화산을 돌아다녔지만, 백두산이나 후지산처럼 깊은 인상이 남은 화산은 몇 되지 않는다. 지구로 돌아오자 순식간에 머리가 맑아졌다.
엘프 여왕의 표정 연기에 속았다. 신기가 아직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아는 엘프 여왕은, D를 불러내라는 말에 낭패한 표정을 지었었다. 신기는 통쾌한 마음에 취해 사고의 폭이 좁아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엘프 여왕은 격에 걸맞지 않은 지혜라고 추어줬다. 신기는 그것도 모르고 우쭐해서 인류의 우수성을 자랑했다. 이쪽 세상으로 온 초월자들이 얼마나 멍청해졌는지 확인했으면서도 자신은 다를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멍청해져서 자신이 멍청한지도 모를 정도가 된 거겠지.'
뱀파이어 드래곤이 계약으로 연결된 존재는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거랑 일부러 D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신기의 오판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신기가 조금만 변덕을 부리면 엘프 여왕은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기는 멍청하게도 엘프 여왕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
'이건 나 혼자만의 비밀로 해야지.'
훌쩍 날아서 제주도로 향했다. 하늘을 빠르게 날면서 밑을 내려다보니, 일본인들이 일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움직였다. 도로 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아 자전거가 차라리 훨씬 편하긴 하다.
### DUAL SYSTEM ###
제주도.
신기가 별장에 나타나자 부모님이 눈물을 보이셨다. 신기는 그제야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미소가 모두 자신을 위해 연기한 것임을 알았다. 자식이 괴물과 싸우며 돌아다니는데 걱정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형, 나 헬기 한 대 뽑아줘. 하늘에서는 귀찮게 구는 사람 없을 거 아냐?"
부모님만 연기했던 거다. 동생은 늘 진실한 사람이었다.
"배고파. 밥 좀 줘요."
요리사가 출근할 시간이 아니라서 어머니가 라면을 끓여줬다. 어머니도 뭔가 하고 싶지만, 다루기 어려운 식자재와 사용하기 버거운 요리 도구들만 가득해서 라면에 김치만 차려줬다.
"형, 뉴스 봤어? 일본에서 우리 가족이 살 왕궁을 새로 짓는대. 그리고 왕궁을 짓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야. 확실한 것만 여섯 국가가 있어."
"형이 왕이면 나는 왕자가 되는 건가?"
"이 멍청아. 왕의 아들이 왕자야. 넌 왕제가 되는 거야. 우리 식으로는 대군이라고 불러."
"신구 대군. 뭔가 심심한데. 나 개명할까?"
라면을 배불리 먹은 신기는 TV를 틀었다. 드라마는 작위적이어서 보기 힘들고 예능은 유치해서 보기 힘들었다. 채널을 돌리다 뉴스 채널로 고정했다. 24시간 뉴스만 하는 채널로, 영어로 말하고 한국어 자막을 달았다. 전 세계에서 시청률이 최고인 채널로 한국의 방송국이라고 한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등급이 낮은 각성자부터 스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멈추지 않으면 세상에서 각성자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러나 등급이 낮음에도 스킬이 사라지지 않은 각성자가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생김새로는 동남아 어느 국가로 예상되었다. 현지어로 대화했기에 신기는 자막을 주시했다.
[D급이고 강화 스킬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C급까지 스킬이 모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몰랐습니다.]
[본인은 왜 스킬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구슬을 먹고 각성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스킬이 남아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기는 TV 화면에서 눈을 뗐다. D가 사라지고 두 세상의 연결이 끊겼다. 동력원이 사라졌기에 각성자들의 스킬이 천천히 사라졌다. 지구의 마나가 풍부했다면 이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었을 수도 있는데, 희박한 마나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지 못했다.
박영광에게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다. 박철도 마찬가지였고 맥도 전화가 되지 않았다. 신기는 어쩔 수 없이 김 비서에게 전화했다.
"제가 바로 별장으로 가겠습니다."
신기가 몰래 날아서 별장에 들어갔기에 별장 주변에서 경호하던 경호원들도 신기가 제주도에 온 것을 몰랐다. 김 비서는 신기의 전화를 받자마자 별장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혹시 무슨 영문인지 알고 계십니까? 전 세계 A급 각성자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D급까지 대부분 각성자가 스킬이 사라졌고 C급도 스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설마?'
D가 구멍을 뚫었을 때 저쪽 세상에서 괴물이 건너왔다. 반대로 신기가 저쪽에서 구멍을 뚫는 바람에 이쪽 A급 각성자들이 저쪽 세상으로 빨려갔을 수 있다.
'외통수에 걸렸구나.'
현재 구멍을 뚫을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설사 신기가 다시 구멍을 뚫었다 해도 계약 위반으로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른다. 그저 고통을 주는 거라면 어떻게든 참아보겠지만, 힘이 사라지거나 세상과 격리되는 등 벌을 받으면 건너온 D에게 인류가 몰살당할 수 있다.
'D가 저쪽 세상에서 목표를 이루면 어떻게 되지? 만약 엘프 여왕과 함께 격을 높이면 내가 패배하는 것이 되는가?'
신기는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격이 F급이라고 했을 때, 엘프 여왕은 강제로 끌어올렸다는 말을 했다. 신기의 지혜가 결국 F급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멍청해 보였던 D도 사실 신기보다 똑똑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엘프 여왕은 왜 나보고 인류를 종족으로 편입하라고 했을까? 이것도 뭔가 함정일까?'
신기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실 난 힘의 절대량이 부족하다. 지혜도 부족하고. 그러나 종족을 거느리면 무조건 A급이 된다고 했다. 힘도 지혜도 부족한 내가 A급이 되면 자칫 망해버릴 수도 있다. 엘프 여왕은 이걸 노린 것이겠지. 아니면 이 세상의 격이 높아져서 저쪽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질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영원히 D를 어쩌지 못하겠지.'
'나는 초월자다. 이건 나도 명확히 인지하는 사실이다. 나는 불멸은 아니지만 불사다. 이대로 힘을 키우며 엘프 여왕과 D가 수작을 부리는 것에 대비해야 하는가?'
신기는 타살이 아닌 이상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단련하는 만큼 강해질 수 있는 한계가 없는 몸이다. 이대로 수련하면서 언젠가 닥쳐올 위험에 대비해야 하는 게 현재 생각나는 가장 최선이다.
'그런데 좀비 드래곤의 말이 또 의심스럽단 말이야. 초월자 사이의 대화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면서 D와 엘프 여왕의 대화는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왜 꼭 자신은 부활할 수 있다는 듯이 나한테 잘 부탁한다고 했지?'
그때는 좀비 드래곤이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다. 둘의 이중 계약을 알아냈으면서 자신들의 대화는 누구도 모른다는 식으로 호언장담했다. 그 모순 때문에 신기는 좀비 드래곤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비록 강신사제 등을 상대하며 좀비 드래곤의 정보가 진실이라는 믿음이 강해졌지만, D와 엘프 여왕의 이중 계약을 알아챈 모순만큼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 작가의말
신기는 엘프 여왕에게 농락당했습니다. 처음부터 신기를 갖고 놀았습니다. 피의 복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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