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구슬
거제도 동쪽의 등대.
"형, 나 진짜 5초만 했는데 엄청 몰려와요."
"침착해. 엄청이 얼마야?"
"백 마리는 넘을 것 같아요."
괴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괴물의 숫자에서 오는 두려움은 시스템도 통제할 수 없는가 보다. 만약 신기도 등대 꼭대기에서 바다 밑으로 좀비와 해골들이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박철과 비슷한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삼촌, 효천이 악당 찾아냈어요."
"박철아, 효주에게 미끼 스킬 설명해줘."
그러고 보니 미끼 스킬을 사용하면 괴물을 불러온다는 말을 효주에게 하지 않았다. 박철은 미끼 스킬을 설명해 준 다음 괴물이 다 사라지면 다시 말해달라고 했다. 효주는 자기도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는 성휘만 펼치고 기다렸다. 성휘만 펼쳤을 때 소모되는 양이 회복되는 양보다 적어 신성력이 소모되지 않는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괴물들이 어느 정도 거리에 오자 다시 느려졌다. 그리고 성휘의 범위 안에 들어오자 더욱 느려졌다.
모든 괴물이 성휘 범위 안에 들어오자 신기는 정화 특성을 활성화했다. 쥐나 뱀을 보면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 혹은 거부감과 비슷한 고통이 해골과 좀비에게서 느껴졌다. 몇 없는 좀비는 벽을 향해 돌진했다. 등대의 문을 열어놓았는데도 그걸 무시하고 두꺼운 등대 벽에 몸을 서슴없이 내던졌다.
"얘네 너무 멍청한데요?"
참다못해 박철이 좀비를 대변해 불만을 토로했다. 상대가 불쌍하게 여길 정도로 좀비는 처절하게 등대를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졌다. 그러다 2분 가까운 시간이 되자 좀비와 해골이 거의 동시에 우수수 쓰러졌다.
"악당 사라졌어요."
효주의 확인을 끝으로 신기는 등대 문을 닫고 위로 올라갔다. 토론과 합의를 걸쳐 미끼 스킬의 사용을 7초로 늘리기로 했다. 신기는 10초를 원했지만 박철은 안전하게 7초로 가자고 고집을 피웠다. 신기도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을 인정하고 양보했다.
"형, 아까보다 배는 더 많아요."
신기는 등에 멘 검을 끌러서 계단 위에 놓았다. 좋은 철과 과학적인 가공으로 무척 튼튼하게 만든 검이라고 하지만 신기는 항상 여벌의 검을 가지고 다녔다. 겁이 점점 사라지는 분위기에서 방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박철을 구할 때 두 가지 검을 사용해본 결과 무거운 양손 검이 훨씬 효과적이어서 가벼운 검은 집에 두고 무거운 검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그런데 등에 멘 검이 왠지 거슬려서 계단에 놓았다.
확실히 괴물이 더 많이 왔는지 좀비들이 벽에 충돌하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가쁘게 들려왔다. 그리고 좀비 한 마리가 문으로 돌진했다. 문에 설치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 좀비의 목덜미를 신기는 검으로 뭉갰다. 단 한 번의 돌진에 우그러든 쇠파이프를 보며 신기는 자신이 좀비의 근육을 너무 무시한 것을 반성했다.
다행히 안으로 들어온 좀비는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좀비들은 벽만 두드리다 정화에 당해 바닥에 몸을 뉘었다. 괴물이 전부 사라지자 신기는 특성을 거두고 성휘만 펼쳤다. 성휘를 계속 펼치고 있으면 시체가 더 빨리 사라진다.
그때 강아지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먹고 자고 뒹굴뒹굴하기만 하던 강아지가 이렇게 활기차게 뛰는 모습을 신기는 처음 보았다. 밖으로 뛰쳐나갈까 걱정해 문을 가로막았는데 예상외로 강아지는 얌전하게 앉아서 하품만 해댔다.
효주와 박철도 강아지를 따라 내려왔다. 멍든 것 같은 색깔을 한 좀비를 보고도 둘은 전혀 징그러워하지 않았다. 그때 좀비의 시체가 사라지며 검은색 구슬 하나 남겼다. 아주 동그랗지 않지만 구슬이라고 한 건 딱히 떠오르는 다른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아지는 구슬을 덥석 물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세 사람 모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효주는 강아지를 덥석 안아 들고 혼냈다.
"언니가 주는 것만 먹으라고 했어요 안했어요? 언니 말 안 들을 거예요?"
강아지는 짧은 네 다리를 버둥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강아지를 호되게 혼내던 효주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삼촌, 효천이 힘이 더 세졌어요. 우유 말고 고기 먹어도 된대요."
효주가 바닥에 내려놓자 강아지는 문을 막은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어서 밖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온 강아지 입에는 구슬 두 개가 물려있었다. 강아지는 누가 빼앗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지 닭이 알을 품듯 두 구슬을 몸으로 꽁꽁 가렸다.
"이거 효천이 거니까 누구도 안 빼앗아요. 언니랑 함께 위에서 풍경 구경해요."
효주는 강아지를 안아 들고 위로 올라갔다. 신기는 박철에게 한 번만 더 미끼 스킬을 사용하고 돌아가자고 말했다. 박철은 똑같이 7초를 사용했는데 아까보다 괴물이 좀 더 몰려왔다. 큰 위험이 없이 다 처리하고 확인해보니 신기는 레벨이 46이 되었다.
효주는 레벨에 변화가 없었고 박철은 레벨이 하나 올랐다. 셋이 나누고 경험치 손실이 있었기에 이 정도지 만약 파티를 안 맺고 신기가 독식했다면 레벨이 훨씬 더 올랐을 것이다.
"내일은 좀 더 많이 불러보자. 10초 정도로 해보고 상황에 따라 조절하도록 하자."
강아지가 물어온 구슬은 총 8개였다. 이미 하나 먹었으니 9개의 구슬을 물어온 것이다. 구슬에 대해 정보 단말에게 질문했지만 정보 단말도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올 때 보았던 해골들이 종적을 감췄다. 미끼 스킬에 불려와서 장렬히 산화한 것이 분명하다.
### DUAL SYSTEM ###
영국 노팅엄.
에릭은 메추리 알 정도 크기의 검은 구슬에 손을 대고 탐구 스킬을 사용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눈을 다시 뜬 에릭은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에게 실패를 알렸다.
"스킬 등급이 부족해. 아무 정보도 얻어내지 못했어."
"파티 결성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내지 못했어?"
"그래. 탐구 스킬이 고급 6레벨이 되어야 알아낼 수 있다고 해. 그리고 이 구슬에 관한 건 아직 구체적인 등급을 알 수 없어. 계속 스킬을 사용하면 언젠가 알려주겠지."
파티에 대한 정보를 이미 얻어냈다. 전투 계열의 헌터에게는 안 좋을지 몰라도 연구 계열의 에릭과 같은 헌터에게는 정말 좋은 기능이다. 비전투 계열들이 모여서 파티를 맺으면 좋은 점만 있고 나쁜 점은 없다. 그리고 가끔 전투 계열들이 비전투 계열과 파티를 맺고 레벨업을 도울 수도 있다.
"파티 결성 방법을 빨리 알아내는 게 초반에 차이를 벌리는 관건인 것 같은데. 다른 나라들도 이제는 헌터의 중요성과 이용 방법을 대충 감 잡았을 거 아냐."
"그래도 2년 전부터 준비한 우리보다는 부족해. 급해 하지 말자고. 핵폭탄이 나온 지 백 년에 가까워져 오지만 사용된 예는 아주 드물어.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국가보다 앞서가려는 거지 홀로 전 세계를 감당하려는 게 아니거든. 때가 되면 되레 상대를 적당히 키워줘야 돼."
"핵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러시아에서 화산에 핵 하나 터뜨릴 생각이더라고. 우리에게 별 영향이 없겠지?"
"핵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야. 바다 밑도 그렇고 핵을 사용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화산이 너무 많아. 물론 해결 수단이 하나 더 있다고 해서 나쁘지 않지만, 나는 실패할 것으로 생각해."
에릭은 다시 검은 구슬에 대고 탐구 스킬을 사용했다. 역시 스킬 실패였지만 낙심하지 않고 조금 휴식을 취하고 또 사용했다. 이미 지금 레벨에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알아냈다. 당분간 잠을 줄이고 검은 구슬을 이용해 경험치를 쌓아 탐구 스킬의 레벨을 빠르게 올릴 계획이다.
### DUAL SYSTEM ###
거제도 신기의 별장.
"삼촌, 큰일 났어요. 효천이 신 됐어요."
신기는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매우 가까운 과거에 새벽에 누군가가 자신을 강제로 흔들어 깨운 기억이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아마 그때는 누가 목욕하겠다고 했던 것 같다.
효주의 목소리가 꽤 커서 박철도 깨어났다. 자기 할 말만 하는 효주 덕분에 사태를 이해하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결론만 말하자면 강아지가 각성견이 되었다.
이름 : 효천
등급 : 신급
개인 등급 : 1
재주 : 탐지(후각) 입문 1
"형, 구슬 여섯 개만 남았어요."
구슬을 더 먹고 각성한 것으로 판단한 신기는 효주에게 신급이 사실 8급이라는 것을 이해시켰다. 효주는 3등급, 박철은 4등급, 신기는 6등급 그리고 강아지는 8등급이라는 것을 꽤 공을 들여 겨우 설득했다.
'혹시 구슬 먹고 각성한 거야?'
- 각성자를 파티에 가입시키면 정보를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신기는 효주에게 강아지를 잘 구슬려 파티에 가입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한참 공을 들여서 겨우 강아지를 파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정보 단말은 강아지의 각성과 구슬의 연관 관계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삼촌, 그럼 효천이도 이젠 악당을 물리칠 수 있는 건가요?"
"효천이는 아직 강아지예요. 좀 더 자라야 해요."
신기는 다시 잠을 보충하러 침실로 향했다.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아침이 되었다. 전투식량과 통조림으로 아침을 때우던 신기가 밥투정을 했다.
"고기 생각나네. 그전에는 고기가 그렇게 싫더니."
"등대 갈 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틀면 냉동 창고 하나 있어요. 예전에 거기에서 온도 체크하는 알바를 한 적이 있어요."
"전기 끊어지고 안에 고기가 다 썩지 않았을까?"
"전기 끊어져도 다 방법이 있다고 사장님한테 들었어요. 무슨 방법인지 모르지만요."
생각해보니 어차피 상관이 없다. 만약 고기가 썩었다면 강아지에게 주면 된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개는 장이 무척 길어 상한 음식을 먹어도 탈이 잘 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강아지가 각성했으니 신기의 스킬로 치료하면 된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식사를 끝낸 후 신기와 박철이 골프카를 몰고 출발했다. 효주를 데려가기엔 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둘만 움직였다. 그리고 훌륭한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냉동 창고 근처에 풍력 발전소가 있었다. 해골들이 바다에서 상륙한 이튿날 대부분 지역의 전기가 끊어졌다. 그러나 냉동 창고는 풍력 발전소의 전기도 가져다 쓰기에 얼린 고기들이 녹지 않았다.
"침착해. 어차피 집에 냉장고는 두 개밖에 없어. 그러니 최대한 뼈가 적고 맛있는 부위로 가져가자."
"형, 당분간 우리 고기만 먹어요."
고기에 대해 잘 모르는 둘은 뼈가 없는 등심 위주로 챙겼다. 그리고 갈비도 적당히 챙겼다. 전투식량과 통조림의 조합은 나쁘지 않다. 다만, 맛없는 것이 아니라 항상 똑같은 맛이어서 감흥이 없다.
냉장고 용량을 계산해서 적당히 골프카에 고기를 실은 후 박철은 냉동 창고 문을 닫았다. 비밀번호가 사장님 생일이라서 손쉽게 들어갔다. 박철이 곁에 풍력 발전소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여기 전기를 집까지 끌어다 쓸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박철은 고기가 상할세라 시속 60에 가깝게 골프카를 몰고 집으로 달렸다. 도착하고 보니 욕심이 과했는지 고기를 많이 챙겨서 냉장고가 꽉 찼는데도 남아돌았다. 그때 박철이 기지를 발휘했다.
"형, 효주네 집 냉장고를 옮겨오면 어때요?"
둘은 곧바로 효주네 집에 가서 냉장고를 옮겨왔다. 그리고 냉장실에 넣었던 고기들을 새 냉장고의 냉동실에 넣었다. 그런데 냉동실 온도가 이상하게 영하 4도밖에 되지 않았다.
"형, 가서 설명서 찾아보죠."
다행히 설명서들이 한곳에 잘 모여져 있었다. 이것저것 챙긴 게 많아서 아예 설명서들을 모두 챙겼다. 그리고 새로운 성과 하나를 또 이루어냈다. 위성 전화 설명서를 통해 위성 전화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괴물만 없으면 살만한데."
고기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슈퍼에 가서 원하는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올 수 있다.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성적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거기에 이젠 인터넷까지 된다. 괴물만 없다면 꿈같은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위성 전화와 컴퓨터를 연결한 다음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런데 유명한 포털 사이트를 비롯해 많은 사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 해도 인터넷은 예전과 같은 지식의 바다가 아니라 죽은 바다였다.
별 소득이 없이 인터넷 접속을 끊고 레벨업하러 출발했다. 목숨만 위험하지 않다면 어떤 게임보다도 재밌는 현실이 되었다.
- 작가의말
이 글을 완결 내면 무협 세계관처럼 현대물 세계관이 어느 정도 명확해질 것 같습니다. 무협이야 지난 세기부터 상상을 하며 키워온 세계관이라 확고한데 현대물은 유행이 몇 년 되지 않아 세계관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판타지도 손을 대봐야 하는데 참 고민입니다. 저작권을 피하고자 최대한 많은 설정을 해야 하니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투력 비교하고 소드 마스터가 깽판 치는 판타지보다 모험 판타지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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