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의 청소부
독도 등대.
나흘 되는 날 박철이 불러온 괴물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오죽했으면 신기가 신성력이 넉넉한 상황에도 미리 2층으로 피했다. 1층에 단 감시 카메라가 괴물로 바글바글한 상황을 화면으로 보여주었다. 밖에서 해골과 좀비들이 꿀을 본 개미처럼 등대에 달라붙어 팔을 허우적거렸다.
"참 다행이네요. 좀비와 해골 시체가 바로바로 사라져서. 그게 아니면 시체 더미에 묻혀버렸을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다니 참 신기하네요. 울릉도는 매일 괴물 시체를 처리하느라 애먹는다고 하던데. 소각장까지 시체를 나르는 것만 해도 일이라고 해요."
차현영과 김연희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눴다. 하현주는 아직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지 못해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무섭거나 징그럽거나 한 건 아닌데 괴물을 보면 처참하게 죽은 가족이 생각나 불편한 느낌이다.
"신 팀장님 덕분이죠. 하현주 사원 마법도 그래서 무척 기대돼요. 큰 카테고리의 스킬은 보통 위력이 강하대요. 김태풍의 바람 마법 스킬도 그렇고 영국 헌터의 화염 마법 스킬도 위력이 대단하다고 하니 하현주 사원과 공우진 사원이 무척 기대됩니다."
검술, 마법, 무투술 등, 구체적인 스킬이 아닌 큰 카테고리를 스킬로 받은 자들은 대부분 강한 위력을 보인다. 이들은 신기의 스킬 위력이 무척 강한 것도 검술 스킬의 위력이라 여기고 있기에 마법과 화염 마법을 스킬로 가지고 있는 둘에게 무척 큰 기대를 품었다.
"그나저나 시체 처리가 등대 프로젝트의 가장 큰 문제점이네요. 물론 강성철 씨가 스킬을 사용할 때에는 괴물이 적당히 몰려와서 괜찮은데 박철 씨가 사용하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몰려오니 신기 씨가 아니면 어떻게 시체를 처리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제 생각에 시체 처리하는 스킬이 따로 있을 거예요. 제발 있어야 해요."
차현영의 말에 김연희가 빵 터졌고 만이 넘는 괴물에 둘러싸인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꽃이 피었다. 매일 오전 오후 한 시간씩 위급 상황에 대비하는 훈련을 하고 있지만, 이젠 누구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나저나 김연교 씨 곧 E급으로 등급이 오를 텐데, 무슨 스킬이 나올지 궁금해요."
"제발 나와야 하는데."
제발 이라는 말을 들은 김연희가 또 빵 터졌다. 유머 감각이 조금은 이상한 여자가 분명하다. 둘이 깔깔거리자 하현주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어, 신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차현영이 갑자기 놀라서 소리 지르자 김연희도 덩달아 긴장했다.
"한꺼번에 천오백 마리나 처리했어요."
신기가 침착한 목소리로 전했다.
"스킬 범위를 크게 늘렸습니다. 이게 조절 가능한 거였더라고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 신기는 몇 분 전에 머릿속에 울린 소리를 되새겼다.
- 재주 성휘가 초급으로 오르며 범위가 지름 30미터로 확장되었습니다.
- 파티의 효과로 34미터까지 확장합니다.
- 재주 성휘의 효율이 상승했습니다. 신성력의 헛된 소모가 줄어듭니다.
예전에는 괴물이 없는 상황에서 정화를 펼쳐도 신성력의 소모가 괴물이 있을 때와 똑같았다. 그러나 초급에 오른 지금 괴물이 적거나 없으면 신성력의 소모가 줄어든다. 즉 괴물이 많으면 신성력이 좀 더 빠르게 소모되고 괴물이 적으면 느리게 소모된다.
"미리미리 말씀해 주세요. 팀장님 때문에 애 떨어질 뻔했어요."
차현영의 애 떨어진다는 말에 김연희가 또 배를 잡고 쓰러졌다. 조금 에둘러 표현하는 유머에 둔감하지만 이런 직접적인 유머에는 쉽게 배를 잡는다. 서른도 안 되어 벌써 박사 학위를 따냈다니 참 알고도 모를 여자다.
"오케이, 몬스터 클리어. 김연교 대리 대기자님, 등급 오르셨나요?"
폐쇄된 공간에서 단순한 일만 반복하게 될 독도 팀의 정신 건강을 염려해 인테리어를 다양하게 꾸며준 전문가들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독도 팀의 분위기는 지나치게 밝았다. 처음에는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차현영이 대놓고 활약하며 분위기를 좋게 이끌었다.
"주여, 그대의 은총에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아미타불."
불자지만 해병대에서는 교회를 다닌 김연교가 장난쳤다. 곧 다들 사다리를 타고 5층에 모였다. 김연교가 검증기에 손을 댄 후 시간이 조금 지나자 김연교의 정보가 모니터에 떴다.
이름 : 김연교
등급 : E급
개인 등급 : 0
재주 : 강화
"축하해요, 김 대리님."
솔직히 위험한 곳에 지원한 것 빼고는 한 일이 전혀 없다. 괴물이 몰려올 때 신기를 잠깐 엄호해 주다가 먼저 후퇴하고 신기가 2층에 올라오면 문현과 함께 사다리를 걷고 문을 잠근 걸 제외하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E급이 되고 스킬이 생기니 뭔가 뿌듯함이 느껴졌다. 신기에게 업혀 온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성취감이 없지 않았다.
- 김연교의 재주 강화는 육체가 아닌 무기를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재주입니다. 수동형의 재주로 체력을 소모합니다.
정보 단말 덕분에 김연교에 앞서 스킬의 효과를 알게 되었다. 물론 D급이 되면 스킬이 발동형으로 바뀔 수도 있다. 아직 E급이라 특수 스텟이 생성되지 않아 패시브에 체력을 소모하는 형태다. 역시 E급인 차현영의 예측 스킬은 현재 정신력을 소모한다.
"자, 오늘 저녁 파티를 합시다. 비빔밥 어때요?"
세 가지 맛의 전투식량을 한데 비벼서 먹는 걸 비빔밥이라고 한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뭔가 오묘한 맛이 있어서 지난번에 시도한 후 많은 호평을 받았었다.
"제가 통발 확인하러 가보겠습니다. 혹시 큰 고기라도 걸리면 회도 추가하죠."
신기의 말에 전부 큰 소리로 환호했다. 검을 등에 멘 신기는 성휘 스킬을 펼친 채 통발을 설치한 곳으로 향했다. 지름이 예전보다 배로 커져서 이젠 좀비도 걱정되지 않는다.
### DUAL SYSTEM ###
울릉도 주둔군 지휘실.
"보고 드립니다. 기상 악화로 지원 물품이 사흘 정도 늦을 거라고 합니다."
"제길, 해골과 좀비 시체가 쌓이고 있다고. 저것들이 썩으면서 전염병이라도 유발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렇다고 기름으로 태울 수도 없고."
"그에 관해서도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탐구 스킬 각성자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시체 더미에 갑자기 벌레가 끼기 시작했는데 청소부라고 하더군요."
"벌레가 꼈다고?"
"정확히 말씀드리면 갑자기 많은 벌레가 생겼습니다."
책임감이 투철한 지휘관은 부하를 닦달해 직접 사체 더미를 모아놓은 소각장을 찾았다. 과연 새까만 벌레들이 바글거렸다.
"저거 바퀴벌레 아니야?"
"맞는 것 같습니다."
무수히 많은 바퀴벌레가 사체 더미에 나타났다. 지휘관은 각성자를 불러오게 하고 식량을 저장한 창고에 바퀴벌레가 없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충성. 헌터 협회에서 파견 나온 D급 각성자 임현입니다."
"수고가 많다. 저 바퀴벌레들이 청소부라고 했다고?"
"정확히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스킬로 알아본 결과 무쇠턱 풍뎅이라고 합니다."
지휘관이 자세히 살피니 대가리 부분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벌레 몸통이 거기에서 거기니 구별이 쉽지 않았다.
"정확히 하는 일이 뭔가? 그리고 해를 끼치지 않는가?"
"괴물의 시체를 먹고 똥을 쌉니다. 그 똥이 부식성이 강해 괴물 시체를 부식시킵니다. 먹고 싸면서 괴물 시체를 사라지게 합니다."
말 그대로 청소부다. 먹어서 없애고 싸서 없앤다.
"인간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가?"
같은 질문을 두 번 하는 지휘관은 약간 짜증이 섞인 말투로 질문했다. 어깨에 별을 단 사람이 살짝 화를 내자 위축된 각성자는 급히 탐구 스킬을 사용했다.
"제 수준에서 알아낸 정보로는 인간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을 시체가 사라지면 먹을 게 많은 곳으로 알아서 이동할 겁니다. 영하 30도에도 생존할 수 있고 물에서 수영도 가능합니다."
그때 식량과 의복 창고에서 벌레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등대 프로젝트 이후로 괴물의 상륙 숫자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독도 팀이 쉰 날에도 예전보다는 적은 수가 기어 올라왔다. 무쇠턱 풍뎅이라는 벌레가 사체를 처리해준다고 하니 배로 석탄과 장작 따위를 실어오지 않아도 된다.
잔뜩 자원이 결핍한 상황에 하나라도 아끼면 좋다는 생각에 무쇠턱 풍뎅이에 관한 보고를 최대한 상세하게 올렸다. 각성자도 준비해 주고 벌레도 보내주는 걸 보니 하느님이 아직 세상을 망하게 하려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 DUAL SYSTEM ###
영국 노팅엄.
에릭은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었다. 유럽에 상륙한 괴물은 임프와 악마 원숭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괴물의 사체에 관한 연구와 처리 역시 아주 큰 문제로 대두했다. 그러다 괴물 사체를 전문 먹는 이상한 벌레가 출현했다.
"Geotrupidae, 정말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군."
검은 구슬과 마찬가지로 예상외의 물건이 나타났다. 모든 특이한 현상은 시스템의 작용이어야 하는데 벌써 두 번째로 시스템과 무관한 변수가 발생했다. 검은 구슬은 결국 탐구 스킬로 그 용도를 알아낼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그때 벌써 적잖게 당황했는데 며칠 안 지나서 새로운 골칫거리가 나타났다.
"제길, D는 뭐라고 그래?"
"예상 범위 안의 변수라고 하던데."
"젠장, D와 직접 대화 하고 싶어. 대면이 아니라면 통화라도 괜찮아. 나 요새 미칠 것 같단 말이야."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너도 알지 않아? 이유는 모르지만 D가 우리와 자주 교류할 수 있었다면 우린 훨씬 쉽게 몬스터를 물리쳤을 거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A급 각성자 맥의 대답에 에릭은 입만 벙긋거렸다. A급에 도달해야만 D와 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A급 각성자만 있을 때 D는 입을 연다. 그래서 지금까지 맥의 말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고 있다. 에릭은 빨리 등급을 A로 올리고 싶으나 알아내야 할 게 너무 많아 연구실을 떠나기 힘들고, 그게 아니라도 B급이라 레벨 하나 올리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에릭, 넌 너무 완벽을 추구해. 뭔가 조금씩 계획과 예상을 벗어나야 삶에 정취가 있는 거야. 넌 너무 인생을 즐기질 못해."
운 좋게 A급으로 각성하고 마법 스킬 네 개나 가지고 있는 맥의 능글거리는 말투에 에릭은 화가 났다. D에게 질문할 리스트를 항상 작성해 주지만 맥은 에릭이 원하는 답 대신 엉뚱한 것들만 알아왔다.
"뭔지 모르지만 D는 모종의 제약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걸 바로바로 알려주지 못해. 그러니 우리는 D를 믿는 마음으로 열심히 몬스터를 퇴치하고 레벨을 올리자고. 그럼 난 이만."
에릭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즐겁게 감상한 맥은 떠나기 전에 기를 살짝 채워주는 걸 잊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에릭은 자신을 무리의 리더라고 생각하고 항상 이래러저래라 간섭하기 좋아한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예민한 성격의 에릭이기에 특이한 보고가 올라오면 히스테리적으로 변한다. 맥은 최강의 헌터라 여러 방어선을 전전해야 하기에 잠도 부족하지만 커다란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특별히 바쁜 시간을 내서 에릭이 화내는 걸 구경하러 왔다.
"제길, 각성시킬 때 제발 좀 명예 감과 의무감도 함께 심어줘. 저런 멍청이들을 데리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에릭의 히스테리는 한참이나 더 지속했다. 알아야 하지만 알지 못 하는 일이 생기면 며칠씩 잠이 오지 않는다. 성질을 부리다 보니 어느새 기력이 다시 차올랐다. 손을 구슬에 가져다 대고 탐구 스킬을 사용했다. 확신은 아니지만 구슬에 탐구 스킬을 사용하면 경험치가 쑥쑥 느는 느낌이다.
'제길, 이걸 누구한테 먹여볼까? 성분 분석도 안 되는 물건이라 전혀 감이 안 잡히네.'
길거리 부랑자나 사형수들에게 먹여보고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알아보고 싶다. 에릭은 원래 인체 실험 따위를 무척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궁금증을 결코 이겨내기 힘들었다.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 먼저 시도하고 싶지만, 지금까지 구한 구슬이 많지 않아 헛되이 낭비할 수 없다.
'이건 누구도 모르게 해야 한다. 다른 자들이 알면 나를 우습게 볼 테니 나와 전혀 연관 없는 자들을 통해 처리하자.'
에릭은 미리 해킹해 놓은 다른 컴퓨터에 원격으로 접속하여 용병 회사로 가장한 범죄 조직에 의뢰를 넣었다. 젊은 남자와 여자를 각각 한 명 납치해 달라 하고 의뢰 금을 일시금으로 넣어주었다.
- 작가의말
대화에는 시체, 서술은 사체로 적었습니다. 정확히는 사체가 맞지만 인간을 닮았기에 대화에서는 시체라고 칭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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