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제주도.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의 키가 훤칠하고 점잖게 생긴 외국인이 배가 불뚝하고 머리가 살짝 벗어진 공무원에게 잘 포장된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 외국인의 투자 이민을 담당한 공무원은 자료를 통해 이 잘생긴 남자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고 속으로 불만이 가득 찼다.
"이건 약소한 선물입니다. 늘 친절하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주도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한국문화에 적응했다. 그러나 오가는 선물 속에서 정이 싹트는 건 옛날얘기다. 뭐 굳이 따지면 일 년도 안 된 옛날이지만 말이다. 공무원은 점잖은 말투로 거절했다.
"마음은 고맙습니다만 받을 수 없습니다."
태운 그룹의 영지에서 공무원의 대우는 평범하다. 그러나 공무원이 되면 태운 그룹에서 거주 공간을 제공한다. 모든 걸 떠나서 안전이 절대적으로 보장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뇌물이 아니라 장생불로하는 약을 준다고 해도 거절해야 한다.
"혹시 저의 이런 행동 때문에 불편하신 건 아니죠?"
"물론 괜찮습니다. 얼마 전까지 한국은 경제만 발달한 후진국 이미지가 있었죠. 그러나 이젠 아닙니다. 모든 한국인은 국가의 국제적 위상에 알맞은 품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서류 봉투에서 서류 몇 장을 외국인에게 건넸다. 기술 투자 이민을 신청한 외국인은 심사에서 통과하여 임시 거주증을 발급받았다. 합금을 연구하는 연구원인데 몇 년간 훌륭한 논문을 몇 편 발표한 적이 있어 순조롭게 통과했다.
"지정한 지역에서 회사 혹은 연구소를 설립해야 합니다. 훌륭한 성과를 내면 심사를 통해 영주권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영주권을 얻으면 영지 내에서 이동의 자유를 얻습니다."
국적은 최소 5년 이상 거주해야만 허락한다. 혼인해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5년 이상 거주한 기록이 있어야만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미혼 남녀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태운 그룹의 계열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무원은 친절한 태도를 일관하며 능숙한 영어로 외국인에게 규정과 절차를 설명했다. 한국은 블랙홀처럼 전 세계의 인재들을 빨아들였다. 물론 영국 역시 한국 못지않은 성과를 보였지만, 최근 하현주의 퍼포먼스가 너무 대단했다.
### DUAL SYSTEM ###
대마도.
"전무님, 저 괜찮겠죠?"
공우진은 걱정이 태산같이 쌓여서 안절부절못했다. 일본 해안선에 등대를 건설하고 대마도를 지휘부로 삼았다. 신기의 특별팀이 활약하여 빠르게 안정화를 이루었다. 고급에 도달한 박철의 미끼 스킬과 신기의 마르지 않는 신성력은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데이터를 통해 수비라인을 확정한 후 대마도에 수많은 창고를 지어 보급 물품을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공우진이 대마도를 총괄하는 대외 지원팀 팀장이 되었다.
한국의 등대 지원팀 팀장은 박영광이 겸임했다. 어차피 한국 해안선의 수비 압박이 줄어서 지원팀이 하는 일이 거의 없다. 거기에 박영광은 육지에서 발생하는 모든 괴물과 관련된 각성자 지원도 맡고 있기에 아예 하나로 통합해 버렸다.
공우진은 신기의 특별팀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했다. 예전이라면 반가웠겠지만 지금 신성력이 마르지 않는다. 그리고 빠른 레벨업을 원하는 신기에게 공우진은 경험치를 가져가는 짐 덩이밖에 되지 않는다. 그때 대외 지원팀이 만들어지며 공우진에게 팀장을 맡겼다.
일본 해안선에 세운 등대를 지원하는 건 업무의 일부이다. 이후 외국 각성자들과의 교류 및 상호 협조는 모두 공우진이 감당해야 한다. 그룹에서 비서 두 명을 보냈고 박영광도 수하 몇 명을 지원했지만 공우진은 여전히 자신감을 찾지 못했다.
"저는 백두산으로 가야 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각성자인 공 팀장이 많이 수고해 주세요."
한국을 대표하는 각성자는 신기, 김태풍, 공우진, 하현주, 박철과 강효주다. 최근 박철처럼 화산 안의 괴물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미끼 스킬 보유자가 속출하면서 박철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지만 남은 사람들은 굳건하다. 효주는 공식적으로 가장 어린 자연 각성자이며 등급도 B급이어서 수많은 어린이의 우상이 되었다.
김태풍은 한국에서 레벨이 가장 높은 각성자이고 공우진의 불바다 마법은 괴물을 상대하는 데 효율이 가장 높은 마법으로 평가받는다. 해골과 좀비에 국한해서 공우진은 김태풍보다 더 강한 위력을 보였다.
"전무님, 어차피 실무를 보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저도 백두산으로 데려가면 안 됩니까?"
"공 팀장 스킬은 물이 많은 곳이 어울립니다."
불의 온도가 높지 않아 화재의 위험이 크지 않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실제로 화염 마법 각성자가 마른 나무를 태운 적이 있다. 물론 정신을 너무 집중하여 불을 붙이고 나서 탈진했지만, 화염 마법은 훈육과 소환 스킬과 함께 위험 스킬 취급을 받게 되었다.
"전무님 A급 되면 저도 좀 레벨업 시켜주세요."
공우진의 애원에 신기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공우진은 언젠가부터 김태풍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었다. 현재 C급인 공우진은 레벨이 낮더라도 김태풍과 같은 B급이 되는 게 소원이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전용기에는 특별팀의 세 사람과 개 한 마리가 탑승했다. 효천을 제외한 다른 개와 곰들은 우리에 가뒀다. 빨리 A급에 도달하기 위해 팀원을 최소화했다.
### DUAL SYSTEM ###
백두산.
신기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울릉도 봉인에 따른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으로 백두산을 찾았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레벨업을 위해서다. 중급 9레벨에 이른 검술과 성휘의 수련도 뒷전으로 미루고 레벨업에 집중하려 했다. 전력에 꽤 도움이 되는 공우진마저 짐이라고 생각했는데 백두산에 도착하니 이삿짐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오, 팰러딘. 실제로 뵙게 되어 참 영광입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괜찮을까요?"
미국의 무슨 가문의 상속자 3순위라고 한다. 자연 각성자인데 스킬이 없다. 미국은 각성자보다 군의 힘으로 괴물을 상대했다. 비록 로봇들이 그렇게 위협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는 전장에 귀한 자식을 보내려는 부모는 없다.
레벨업에 목말랐던 제이크는 울릉도 봉인 뉴스에서 신기가 백두산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앞에서 바닥을 뒹굴었다. 스물이 넘은 아들의 추태에 분노한 세계적인 대부호는 아들과 계약서를 작성했다.
D급이 되어서도 스킬을 얻지 못하면 평생 반항하지 않는다는 계약서에 지장을 찍고 제이크는 한국에 도착했다. 태운 그룹이 요즘 잘나간다고 하지만 제이크네 가문의 요청을 가볍게 거절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부득불 파티에 짐 하나 얹게 되었다.
"팰러딘, 우리 계약 하나 합시다. 만약 D급이 되어서도 스킬이 생기지 않는다면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스킬이 생긴다면 저를 더 키워주세요. 내 권한으로 풍성한 보답을 하겠습니다."
미국인 통역의 어휘 선택은 무척 풍성했다. 신기는 최대한 비위를 맞춰주라던 강 회장의 당부가 생각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공짜로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미국에서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라고 하니 약간의 경험치 손실은 감수하기로 했다.
"오, 파티. 우리는 패밀리가 되었군요. 난 처음 파티에 초대받았어요."
통역이 필요 없이 효주마저 알아들었다. 물론 효주의 영어 실력이 박철보다 낫다는 건 박철에게만 슬픈 팩트다. 제이크는 점점 곰을 닮아가는 효천에게 큰 흥미를 느꼈다. 미국인들은 뭐든 큰 걸 좋아한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다.
"오, 등대. 이게 바로 팰러딘이 신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한 21세기 방주군요. 기회가 된다면 외로운 섬의 첫 등대도 방문해보고 싶습니다."
제이크의 지나치게 밝은 태도에 신기는 조금 가라앉힐 필요를 느꼈다. 언제 들었던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거나 너무 들뜨면 늘 사고가 난다고 했다.
"제이크, 이건 조크가 아니야. 괴물을 상대하는 엄숙하고 진지한 일이라고. 위험하지 않은 일이라고 이런 태도로 대하는 건 매우 실망이야."
제이크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기쁜 나머지 심하게 들떴지만 신기의 말에 바로 자신의 태도를 사과했다.
"팰러딘, 정말 미안합니다. 괴물을 처리하는 건 숭고한 일임을 무척 자각하고 있고 그에 대해 무례를 저지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기쁜 마음을 너무 과도하게 표출했군요. 모두에게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제이크의 사과로 분위기가 적당히 가라앉았다. 분위기를 잡은 신기는 등대를 점검했다. 각 층을 오르내리면서 꼼꼼히 살피는 건 독도 등대에 있을 때부터 매일 반복하여 습관으로 굳어진 행동이자 전투를 준비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점검 완료. 박철 시작하자."
등대의 문들을 손수 꼼꼼히 닫아건 신기가 학살의 시작을 알렸다. 박철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미끼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다 느낌이 오자 스킬을 바로 멈췄다. 박철의 스킬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괴물 한 마리도 빠짐없이 등대로 몰려들었다.
"오오, 이것이 바로 팰러딘의 절대영역!"
제이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휘의 범위 안에 괴물이 들어오기만 하면 신성력이 괴물을 처리했다. 정화 특성이 2단계가 되면서 정보 단말의 도움으로 알게 되었는데 1단계는 공격이고 2단계는 배척이다. 구체적인 의미는 본인이 직접 이해하라고 했다.
2단계가 된 후 괴물이 쓰러지는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 예전에는 의식적으로 신성력을 집중해야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집중할 필요가 없이 스킬이 알아서 최대한 빠르게 괴물을 쓰러뜨렸다.
어느 정도 괴물을 쓰러뜨린 신기가 스킬을 거뒀다. 좀비와 해골들이 다가와서 등대를 두드렸지만 느긋하게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신기는 제이크에게 스킬이 생겼는지 질문했다.
전투가 지속하면 경험치 정산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등급 업을 할 때 남은 경험치는 전부 버려진다. 제이크를 빨리 쫓아내기 위해 신기는 일부러 스킬을 멈춰서 전투를 중단했다.
"스킬이 안 생겼어요. 그런데 순식간에 E등급이 되었네요. 레벨업이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신기는 다시 스킬을 발동했다. 정화가 양 떼에 들어간 호랑이처럼 날뛰었다. 신기는 정화 특성의 2단계가 왜 배척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자세히 관찰했다. 정화 특성이 2단계가 된 이후에 해골보다 좀비가 더 빠르게 쓰러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하도 쓰러지는 속도가 빨라서 확신할 수 없다.
"씰, 아이 저스트 겟 더 씰."
세계적인 대부호 가문의 3순위 상속자께서 봉인 스킬을 얻었다. 그것도 시작 등급이 초급 3레벨이다. 뒤늦게 알아차린 박철은 신의 불공평함을 원망했다. 키 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난 놈이 운 좋게도 봉인 스킬을 각성했다. 그것도 박철이 불러온 괴물이 준 경험치로 레벨을 올려서.
"회장님, 저 신기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 사람이 봉인 스킬을 각성했습니다. 비록 하현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저희가 불리해집니다. 규모가 다르니까요."
미국은 각성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각성자들도 쉽게 포용한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피부가 다른 사람은 논외로 치고 비슷한 문화권의 중국인이나 일본인에게도 거부감을 보인다.
"그렇습니다. 하현주가 계속 우위를 차지하려면 많은 각성자가 필요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요청했던 안건을 다시 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스킬이 없는 각성자라도 저희에게는 충분히 쓸모가 있습니다. 힘도 세고 다쳐도 치료를 받으면 바로 회복되니까요. 각성자로 된 군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지에 머무는 사람들이 훨씬 안정감을 느낄 겁니다."
박영광이 도움을 청했고 신기도 필요하다 생각해서 구슬을 통한 각성자를 늘릴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 회장은 더 많은 각성자를 수용하기에 태운 그룹의 역량이 달린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면에서 각성자를 더 만들어서 데리고 있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온 제이크가 봉인 스킬을 각성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이 마음을 먹으면 제이크의 스킬 레벨을 한국보다 더 빨리 올릴 수 있다. 하현주가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 작가의말
글에 제가 생각하는 모든 걸 표현할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저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많은 변화가 생기겠죠. 그러나 그걸 일일이 다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젠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데 필요한 것과 분위기 조성에 필요한 장면만 언급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일부 사건에 대한 언급을 줄이거나 없앴습니다. 간단히 몇 문장 혹은 몇 단락으로 언급하기만 할 작정입니다. 사실 아직도 본론에 제대로 들어간 건 아니기에 너무 끌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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