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는 신기
아프리카.
머리에 뿔이 여섯 개 달리고 등에 날개가 여러 장 있는 악마가 허공을 향해 소리 질렀다. 여섯 개의 뿔에서 빛이 나더니, 불로 된 고리가 생겨나서 사방으로 확장했다. 여섯 개의 고리는 원형 혹은 타원형 모양이고, 사방으로 퍼지면서 두께도 두꺼워지고 크기도 커졌다.
연달아 몰려오는 여섯 개의 불 고리에 신기는 겁을 먹었다. 엄마를 막 부르려는 순간, 제이크가 신기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섯 개의 불 고리가 지나가자 신기의 앞에는 재가 한 무더기 수북하게 쌓였다. 제이크가 신기 대신 데빌의 공격을 막다가 재로 화한 것이다.
화가 나고 부끄럽고 불안하고 무섭고, 신기는 오만가지 감정이 솟아올라 입을 열어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신기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을 한 제이크가 다시 나타났고, 그 옆에는 몸이 몇 토막 난 하현주와 김태풍이 차가운 눈으로 신기를 쏘아보았다.
"내 탓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변명만 하다 신기는 꿈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전용기 안이었다. 샤워실에 가서 푹 젖은 옷을 벗고 땀을 씻어버린 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기내에서 사용하는 유선 전화를 들고 어디까지 도착했냐고 질문했다.
"30분 뒤에 가장 가까운 공항에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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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동남아의 이름이 꽤 긴 화산에서 다크 드래곤과 탐식괴를 끄집어내 소멸시켰다. 다크 드래곤은 그림자로 이루어져 대부분 공격에 면역이고, 특기가 정신 공격이다. 신기와 박철만 그 공격을 버텨냈고, 다른 사람들은 전투력을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다행인 점은, 다크 드래곤에게 요해가 있다는 것이다. 세 번 실패하고 네 번째 시도에서 요해를 때렸다. 비록 죽음에 이르게 하지 못했지만, 다크 드래곤이 그림자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육신을 드러냈다. 육신을 드러낸 다크 드래곤은 도망치려 했지만, 박철이 멈추라고 '명령'하자 미동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나온 탐식괴는 머리가 몸통보다 큰 물컹거리는 액체 괴물이었다. 트랜스포머라 불린 괴물의 금속구 형태처럼, 공격을 전신으로 분산하는 능력을 갖췄다. 딱히 요해는 없어 매우 강력한 힘으로 공격하여 괴물의 몸을 전부 소멸해야 한다. 어느 정도 크기 이상의 덩어리만 남아도 빠르게 재생했다.
다크 드래곤의 정신 공격에서 갓 회복한 맥이 애써 정신을 집중해 엘리멘탈 드래곤을 괴물의 몸속에 꽂은 후 폭발시켰다. 그리고 신기가 벼락둥지를 소환해 천둥새들이 흩어지는 어느 정도 크기 이상의 덩어리를 모조리 공격하게 했다. 덩어리가 너무 많아 신기의 천둥새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했지만, 신기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탐식괴가 덩어리 하나를 선택하여 증식을 시작할 때, 노리고 있던 최영웅이 모든 기력을 쏟아 망치로 증식하는 덩어리를 내리쳤다. 덩어리가 너무 많으면 증식하는 덩어리를 찾아내기 힘들지만, 신기가 대부분 덩어리를 제거했고, 마침 운 좋게 최영웅이 여겨보고 있던 가까운 곳의 덩어리가 증식했다.
동남아도 해방한 후 바로 러시아에 가서, 이름을 부르다가 혀를 세 번쯤 씹을 것 같은 화산에서 베히모스와 드레이크를 불러냈다. 베히모스는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했고 드레이크는 최강의 수비력을 자랑했다. 다행히 따로따로 불러냈기에 처리할 수 있었지, 그게 아니라면 신기 일행이 몰살당했을 것이다.
베히모스도 그렇고 드레이크 역시 마찬가지로, 지배형 마수에 속했다. 그래서 수만 명의 각성자를 동원해 베히모스나 드레이크가 소환한 부하들을 처리하게 했다. 지휘형인 타이탄은 부하들을 지휘하여 강한 힘을 내게 한다면, 베히모스나 드레이크는 부하가 많을수록 본인이 더 강한 힘을 낸다. 마치 각성자들의 파티 스킬과 비슷한 형태다.
드레이크는 수백 명의 인명 피해를 내고 어렵게 처리했다. 여섯 요해를 동시에 가격해야 하는데, 그 위치가 서로 너무 멀어서 신기 혼자서 해낼 수 없다. 최영웅이 하나, 박영광이 하나, 맥이 하나, 신기가 세 개를 맡았는데, 타이밍이 자꾸 어긋나서 실패만 거듭했다. 실패할 때마다 각성자들이 목숨으로 시간을 벌었다.
그래서 16시간이나 악전고투를 해야 했고, 수백 명만 죽은 것도 사대천왕의 분투와 A급에 이른 각성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베히모스를 상대하는 과정에 3천 명의 각성자가 사망했고, 하현주와 김태풍이 죽었다. 베히모스에게 죽은 게 아니라 베히모스가 소환한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수비력이 강해 애먹었던 드레이크와는 달리, 베히모스는 스쳐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시무시한 공격력 때문에 고전했다. 거의 22시간 싸워서 베히모스를 겨우 쓰러뜨렸다.
교훈을 섭취해 유럽은 충분한 준비를 마치고 도전했다. 광역 공격이 특기인 데빌과 스킬은 하나도 없이 육체의 힘만으로 초월자가 된 어비스 드래곤. 둘을 처리하는 과정에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제이크가 목숨을 잃었다. 흙 거인이 역소환 당하며 타격을 받았고, 그 탓에 제대로 된 회피를 하지 못해 데빌의 광역 공격에 적중당해 치유할 시간도 없이 재로 변했다.
"이제 둘만 남았구나. 이름을 알려달라."
홀로 화산구로 가서 엘프 여왕을 만난 신기는, 처음부터 본론에 들어갔다. 계약의 힘으로 엘프 여왕은 현재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원래 세계수를 심고 자기 종족을 데려와야 하지만, 세계수를 심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미루고,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계약의 힘으로 누르고 있다.
"왜 이렇게 급한 것이냐. 지금 너희 힘으로는 남은 둘 중 하나도 처리하기 힘들다."
"내가 계약의 선결 조건을 이행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나도 모르지. 다만 가혹한 벌이 네게 내려질 건 뻔한 사실이다."
"네가 이행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
"격이 높아 계약 조건이 후한 대신, 너보다 더 심한 벌을 받겠지."
"됐어. 그럼 이름이나 알려줘. 남은 건 내가 알아서 하지."
"천사와 강신사제. 허신을 섬기는 어리석은 놈들이야."
허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신을 만들어내 실상을 부여한 것을 말한다. 허신의 좋은 점은, 받드는 자들이 원할 때 힘을 아낌없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허신은 사실 종족의 힘을 하나로 모은 후, 격에 따라 힘을 가져다 쓸 수 있게 만든 창고와 같은 존재야. 우리 엘프는 세계수가 있기에 허신을 섬기지 않아도 되거든."
"고맙다."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해준 거야. 안 고마워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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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아프리카를 제외하면 마지막 남은 괴물의 땅. 중동이라고 뭉뚱그려서 대충 표현하지만, 중동의 정의에 대해서도 제각각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신기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소각장을 최대로 운용하여 괴물을 소멸해야 합니다."
많이 소멸할수록 저 종족의 힘 자체가 약해진다. 엘프 여왕이 갑자기 호의를 베풀어 유용한 정보를 전해준 게 찝찝했지만, 신기는 일단 중동까지 해결한 다음 고민하기로 했다. 늦게 나오는 초월자일수록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니 이번에 상대할 천사와 강신사제는 아마 데빌과 어비스 드래곤보다 훨씬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내 감은 빨리 해치워야 한다고 재촉하는데. 확실한 정보에 따라야 하는지 불확실한 감을 따라야 하는지 고민이구나.'
하현주와 김태풍의 죽음은 그렇게 큰 타격이 아니다. 마음이 아프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의 고통은 아니다. 그러나 제이크의 죽음은 아직도 마음이 찢어지는 느낌이다. 잔뜩 정서가 불안한데 엘프 여왕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되어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그리고 마음도 머리도 혼잡한 신기에게 더 큰 카오스를 선물하는 소식을 박영광이 전했다.
"일본에서 국토를 너에게 귀속시킨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뭔 개소리야?"
"일본 땅을 다 너에게 준다는 뜻이지. 자신들은 네 땅을 경작하고 관리하는 사람이라는데. 그리고 한국도 바로 같은 발표를 할 거라고 하더라. 물론 너에게 먼저 동의를 구하겠지. 아프리카랑 동남아도 조짐이 보이고, 남미도 일부 국가들이 같은 액션을 취할 모양이더라."
"왜?"
"넌 욕심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적당히 챙겨야 한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네가 아무것도 안 챙기니까 만만하게 보고 수작 부리는 거잖아."
아니, 박 선생. 자기 나라 땅을 통째로 넘기는 게 왜 수작입니까? 일본은 콜라 마시고 트림해도 수작입니까?
"적당히 챙겼는데?"
"나라면 마누라 서른 정도 들이고, 세계에서 가장 큰 왕궁을 지을 거야. 고용인은 만 명 정도로 하고, 집 주변에 놀이동산이랑 동물원을 지을 거야. 전용기는 다섯 대 정도로 하고, 항공모함 하나를 요트로 개조해야지. 자동차는 왕궁 안에서만 타는 거로 하고, 밖에서는 전용기나 헬기로만 이동해."
어련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소설 쓰지 그러셨어요.
"핵심은 이게 아냐. 이런 왕궁을 세계 각지에 짓는다는 것이지. 각 대륙에 하나? 그건 너무 소박해. 살기 좋다고 소문난 곳마다 왕궁 하나씩 짓는 거야. 마누라들이 자기 기호에 맞춰 왕궁을 선택해 살게 하고, 너는 마누라 찾아 돌아다니는 거지.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지 않아?"
낭만이 다 죽었나? 왜 그렇게 피곤하게 돌아다니길 좋아해? 일 다 끝나면 난 집에 박혀 게임이나 하고 잠이나 자렵니다.
"이거 내 생각 아냐. 요즘 나오는 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중에서 가장 인기 높은 소설의 내용이야."
"헐, 진짜 소설이었어?"
박영광의 헛소리를 듣고 나니 기분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머리도 시원해졌다.
'바로 천사랑 강신사제 불러내면 당장 힘들고, 천천히 나오기를 기다리면 이후 엘프 여왕의 수작에 당할 가능성이 크다. 어느 걸 선택해야 할지 사흘 안에 결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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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러분."
드물게 전투 전에 신기가 연설을 시작했다.
"사태의 해결책을 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해결책이 달라집니다. 큰 희생을 각오하고 승리의 확률을 키울 방법과 승리의 확률은 낮아지지만 희생을 줄일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더욱 확실한 승리를 선택했습니다."
신기는 울컥하는 마음을 억눌렀다. 사흘 고민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 신기는, 각성자들을 모아서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B급 이상의 50만 명 각성자를 상대로 투표한 결과, 93%가 희생을 감수하고 바로 천사와 강신사제를 불러내자고 했다. 기권 2%까지 포함하면, 반대가 겨우 5%에도 미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저는 반드시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엘프 여왕을 돌려보내고 지구의 초월자도 소멸해야 합니다. 물론 나도 최후의 승리를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다시 평화를 찾고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여러분에게 맹세합니다."
하늘에 뜬 태양이 땅이 발하는 열기를 피해 구름 뒤에 숨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전사들의 외침이 구름마저 흩어지게 했다. 다시 열기에 노출된 태양은 얼굴을 찡그리고 빨리 서산으로 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박철."
천사가 아닌 강신사제를 먼저 소환했다. 다른 때는 격이 더 낮은 초월자부터 불러다 소멸했는데, 이번에는 순서를 바꿨다.
땅이 거세게 흔들렸다. 온몸을 꽁꽁 감싸서 손발과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은 인간형으로 보이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물이 나타나자마자 각성자들은 자신의 기력과 마력을 모조리 짜내어 공격을 시도했다.
공격을 마친 각성자들은 바로 엎드려서 뒤로 기었다. 뒤로 기는 각성자들을 밟으며 뒤에 있던 각성자들이 앞으로 달렸다. 미리 사거리에 따라 짠 대로 대형을 유지하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강신사제에게 수만 개의 스킬을 쏟아냈다.
두 번째로 스킬을 쏟아낸 각성자들이 엎드려서 뒤로 기고, 세 번째 대열이 선두로 향할 때, 강신사제는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강신사제의 등 뒤에 허신이 나타났다.
"전투 2단계."
대기하고 있던 광역 공격 마법사들이 허신을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강신사제의 소매에서 천이 나오며 허신을 감쌌다. 정보대로 허신을 공격하자 강신사제는 수비에만 집중했다.
마법사들은 계속 허신을 공격했고, 원거리 기력 각성자들은 강신사제를 공격했다. 허신을 공격하는 마법사들의 스킬을 한동안 막아내던 강신사제는 반격을 시작했다. 얼굴로 추정되는 곳에서 벌인지 나비인지 구분하기 힘든 것들이 나와서 각성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치유 결계."
신기는 자신의 기력을 넓게 펼쳤다. 50만에 달하는 각성자들을 모두 기력의 범위에 포함했다. 신기의 주변에는 치유술 중급 이상인 치유 각성자 수천 명이 조를 나눠 치유 스킬을 사용했다. 치유 각성자의 스킬과 신기의 기력이 공명하며 모든 각성자에게 치유 스킬이 끊임없이 사용되었다. 한 조의 기력이 다할 즈음이면 다른 조가 치유술을 펼쳤다.
신기가 직접 치유를 펼쳐도 되지만, 치유를 직접 펼치면 다른 스킬을 사용할 때 반응이 조금 느려진다. 스킬의 조합도 모든 스킬을 동시에 사용하는 게 아니다. 하나를 사용하고 유지하며 새로운 스킬을 사용해 합치는 것이다. 치유술은 치유 각성자들에게 맡기고, 신기는 기력만 공명시킨 채 강신사제의 다음 선택을 기다렸다.
커다란 곤충들에게 목숨을 잃은 자는 수백 명이다. 미처 치유를 받을 겨를도 없이 즉사한 각성자들이다. 그러나 강신사제의 예상과는 너무 차이가 났던 것인지, 강신사제는 연이어 강수를 썼다.
강신사제처럼 온몸을 천으로 꽁꽁 감싼 괴물들이 나타났다. 대부분은 저등급 괴물이라고 불리던 익숙한 괴물이고, 기사 차림이나 제사장 차림을 한 괴물은 처음 접했다.
무기를 들지 않은 맨주먹인 1등급 괴물, 창이나 짧은 검 따위를 든 2등급 괴물, 전투 능력은 없고 아군에게 버프를 주는 3등급 괴물, 1등급과 2등급 괴물이 3등급 괴물과 합체하면 확률적으로 나타나는 4등급 전사 괴물.
모두 각성자들이 근래에 익숙하게 상대했던 괴물들이다. 그러나 짧은 부딪침으로 각성자들은 곧바로 상황이 녹녹지 않음을 알아챘다.
"위력이 몇 배나 된다. 전력을 다해 싸워라."
입으로 커피를 후후 불면서 처리할 수 있던 1등급 괴물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죽으면 그저 연기로 사라지는 괴물과 다르게, 각성자들은 피로 땅을 물들였다. 전장에 붉은빛이 점점 진해졌다.
- 작가의말
생각 없이 쓰다 보니 이번 편이 유독 길어졌네요. 그런데 생각 없이 쓴 글이 더 마음에 드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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