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변경
혼슈.
검은 구슬을 잔뜩 담은 묵직한 가방이 스무 개나 쌓였다. 이제 겨우 두 개 봉인했는데 벌써 지친다. 신기는 요새 맛 들인 당도가 무척 높은 음료를 쭉쭉 빨았다. 다 마시고 나서 음료 캔을 우그러뜨리는 신기의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갔다.
"백두산 괜히 봉인했어."
시체 조종사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향했다가 의문스럽게 사라지고 최소 백만의 괴물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일이 일주일 혹은 보름 간격으로 벌어지고 있다. 등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수비선도 탄탄하게 구축한 한국은 잘 견뎌냈지만, 중국은 보름에 한두 번씩 생기는 웨이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식량 생산의 중요 기지인 하북과 산동을 지켜야 하고, 수도인 북경도 보호해야 하기에 중국은 소각장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했다. 괴물 처리 능력이 급락한 소각장들이 제구실을 못 하자 괴물의 밀도가 차츰 높아졌다.
원래 혼슈에서 기어 나온 괴물들은 대부분 한국과 중국을 향해 이동했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괴물 밀도가 높아지면서 중국으로 향하는 괴물은 줄어들고, 한국으로 이동하는 괴물과 혼슈에 그대로 남는 괴물이 많아졌다. 홋카이도보다 더 화산이 많은 혼슈인데 추가 지원도 기대하기 힘드니 전진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
"팰러딘, 계획의 진행이 어려울 때는 변화가 필요해. 목적만 흔들리지 않으면 어떤 길로 가도 로마에 이르게 되어 있어."
"혹시 좋은 생각 있어?"
"일거양득의 계책이 하나 있지."
"괴물 다 몰아내면 네게서 한국어나 배워야겠다."
제이크는 신기의 수준 낮은 유머에 비웃음으로 대응했다.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에 등대를 운영하고 규슈와 혼슈 사이에도 등대를 운영해."
신기는 제이크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신기의 떨떠름한 표정에 제이크가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안정화를 먼저 이루는 거야. 중국의 변수를 최소화하는 걸 첫 목표로 삼자."
"어려워. 우리에겐 그렇게 많은 각성자가 없어."
"구슬 각성자를 많이 만들어서 수비선에 투입하고, 자연 각성자들은 등대에 투입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 특별팀도 당분간 등대에 집중해야지."
"그다음엔?"
제이크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 특별팀만 헬기를 타고 화산을 조금씩 봉인하는 거지. 99%까지."
"그러면 한꺼번에 봉인했을 때 문제가 되지 않을까?"
"중국은 몰래 해서 문제가 생겼던 거야. 전부 봉인하기 전에 홋카이도의 각성자들을 전부 규슈 쪽으로 보내고 중국의 소각장을 최대로 가동하는 거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야. 중국이 화산을 봉인했을 때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거리가 멀수록 영향을 적게 받았어. 그러니 중국 때와는 달리 피해가 크지 않을 거야."
"우리 동맹들에 알리고 구체적인 계획을 짜보도록 하자."
### DUAL SYSTEM ###
영국 노팅엄.
"에릭, 아이슬란드의 화산을 전부 봉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도 될 것 같아."
흰 구슬을 먹은 맥은 자신감이 넘쳤다. 시체 조종사가 남긴 구슬을 먹고 얻은 스킬은 패시브로, 맥보다 등급이 낮은 괴물들은 맥에게 공포를 느낀다. B급 이하의 각성자들이 시체 조종사가 출현하면 겁먹었던 것과 같다.
"시체 조종사는 기껏해야 B급이란 뜻이야. 나는 A급이니까 지금까지 출현한 모든 괴물이 나에게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어. 아마 팰러딘도 나와 비슷한 스킬을 얻었겠지."
팰러딘 근처에 다가간 괴물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데 관한 의문이 조금 풀렸다. 맥에게 일정 거리까지 접근한 괴물은 공포에 질려 허둥대며 공격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죽은 괴물의 시체가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팰러딘이 얻은 스킬이 다른 종류이거나 하나가 아닌 복수의 스킬을 얻었을 수 있다.
"하긴, 괴물에게서 나온 에그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때부터 알아봤어."
검증기에 구슬을 통해 얻은 스킬이 표시되지 않는다. 맥과 에릭은 자신들의 추론이 99% 정확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팰러딘은 어디에서 그런 에그를 얻었을까?"
맥의 의문에 에릭이 대답했다.
"첫 번째는 이 사태가 처음이 아니라는 거지.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고 인류 혹은 다른 생명체가 승리 혹은 실패했겠지. 그리고 그때 괴물이 남긴 에그를 팰러딘이 얻은 거야. 아마 괴물에 관련한 기록이 남아있을 수 있어. 두 번째 가능성은, 팰러딘이 우연히 고등급 괴물을 처단하고 구슬을 얻었다는 거지. 마치 고스트처럼 처리하기 쉬운 괴물을 말이야."
"두 번째는 가능하지 않아."
"예측 스킬을 가진 자들이 어떤 곳에 수많은 괴물이 모여 있는 걸 확인했잖아. 어쩌면 팰러딘이 우연히 그곳에 가서 운 좋게 고등급 괴물을 죽였을 수 있어."
"화산 구멍으로 로봇을 넣어도 아무 소용 없었잖아."
"우리가 D를 만났던 방식을 잊지 마. 어쩌면 팰러딘에게 저것과 같은 열쇠가 있을지도 몰라."
예전과 달리 이제는 시야만 D의 앞으로 이동하게 해주는 장식품이 에릭의 사무실에 걸려 있었다. 에릭은 첫 번째보다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맥이 우연히 저 장식품을 통해 D를 만났던 것처럼, 팰러딘도 저런 물건을 통해 괴물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고등급 괴물을 잡은 다음 구슬을 잔뜩 먹고 검증기에 표시되지 않는 스킬을 무수히 익혔을 것이다.
'내겐 왜 그런 행운이 나타나지 않은 걸까? 거긴 대기실 같은 곳이어서 괴물이 전혀 반항하지 않을 수도 있어.'
망상에 빠진 에릭을 끄집어낸 건 맥이다. 에릭이 탐구 스킬로 알아낸 바로는 팰러딘의 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무척 크다. 아이슬란드의 화산을 전부 봉인한 후 일정 거리에 있는 고등급 괴물들이 전부 아이슬란드로 몰려들 것이다.
"에릭, 아이슬란드 계획을 빨리 실행하자."
"데이터가 부족해. 화산을 대량으로 봉인한 후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알아야 해."
"에릭. 너는 데이터를 너무 맹신해. 내가 팰러딘이라면 규슈인가 하는 작은 섬의 화산들만 봉인하고 그곳으로 몰려오는 고등급 괴물들을 처리하며 실력을 키웠을 거야. 팰러딘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 일본 전체를 봉인하려 했어. 화산의 위치도 다르고 분포 밀도도 다르기에 일본의 데이터는 아이슬란드를 봉인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
신기가 단순히 힘을 키우는 목적이라면 당연히 맥의 말대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기의 진정한 목적은 지구에서 괴물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목적이 다르니 선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맥, 난 내 계산이 빗나가는 걸 무척 싫어해."
"어차피 우리 영국은 각성자가 충분해. 만약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피해를 보지 않거나 최소화하면 돼. 피해는 다른 국가 몫이지."
에릭은 맥의 설득에 넘어갔다. 영국을 세계의 지배자로 만들자던 처음의 목표를 잊고 괴물을 처리하는 것만 생각하다 보니 너무 신중하게 접근했다. 잘 되면 영국의 국제 지위와 위신이 올라가는 것이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지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능력이 있다.
"맥, 너는 정치인을 하지 않은 게 인생 최대의 실수야. 네 설득에 넘어가 버렸어."
맥과 에릭은 잔을 부딪치고 독한 위스키를 시원하게 비웠다. 내일 영국에서 새로 나타난 봉인 각성자가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며칠 안에 유럽 연맹 의회에서 아이슬란드를 봉인하는 제안을 통과할 것이다.
'D의 반응이 좀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화산의 대량 봉인이 D에게 안 좋은 건 확실하다. 그리고 D에게 안 좋은 게 에릭에게는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괜찮아. 기껏해야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지.'
### DUAL SYSTEM ###
혼슈.
며칠의 회의와 토론을 거쳐 제이크의 제안은 받아들여 졌다. 다만 기존의 등대와 다른 점은, 이번 등대는 무척 공격적으로 지어졌다. 바다가 아닌 혼슈의 해안가에 지어진 등대들에 문현의 공병대가 들러붙어 스킬을 펼쳤다.
"벽에 온몸을 밀착해. 그래야 스킬 전도율이 더 높단 말이야."
근거가 전혀 없는 말이다. 그러나 문현은 자신과 같은 스킬을 얻은 각성자들의 수치심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사지를 최대한 펼치고 벽에 찰싹 들러붙은 각성자들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그저 기력이 빨리 다 소모되기만 빌었다.
기력을 다 사용한 각성자가 벽에서 떨어지자 열렬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스킬의 위력을 높이려고 스킬이 없는 각성자들이 공병대를 따라다녔다. 공병대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목하에 대부분이 여자다.
이미 유부남인 문현이 단순히 자기 부하들이 여자 각성자들과 시시덕거리는 게 보기 싫어서 심술을 부리는 건 아니다. 스킬 전도율은 만들어낸 거짓말이지만, 이렇게 몰아세우면 수치심 때문에라도 스킬을 전력으로 사용한다. 단기간에 더 많은 기력을 소모할수록 스킬 효과가 좋다는 건 100%는 아니지만 90% 정도 스킬에 적용되는 이론이다.
모든 각성자가 벽에서 떨어지자 바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다. 이동하는 시간에 기력이 회복되고 다음 등대에 도착하면 바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둘이서 함께 타도록 만든 이인용 자전거에는 공병대원과 여자 각성자 한 명씩 탔다. 물론 공처가인 문현은 남자 각성자와 함께 타고 대열의 가장 뒤에서 고함쳤다.
"다음 등대까지 나보다 늦게 도착하면 각오해라."
문현은 물론 문현과 함께 자전거를 타게 된 남자 각성자도 이를 악물고 페달을 밟았다. 문현보다 먼저 도착한 자들은 등대 안에서 스킬을 사용하고, 늦은 자들은 밖에서 사용해야 한다. 물론 방금 첫 등대는 모두가 밖에서 스킬을 사용했다.
공병대가 수치심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는 이때 신기와 제이크는 헬기를 타고 화산을 하나씩 찾았다. 등대가 완성되기 전에 괴물을 최대한 소멸하여 밀도를 낮춤과 동시에, 화산을 어느 정도 봉인하려는 목적이다. 특별팀만 헬기 다섯 대로 이동했는데 곰 두 마리와 개 한 마리를 싣는 데 헬기가 세 대 필요했다. 그것도 안에 싣지 못하고 줄로 대롱대롱 매달아 이동했다.
두 대의 헬기가 착륙한 후 밖에 나온 가가와와 최영웅이 곰들의 몸에 묶인 줄을 풀었다. 곰과 개들은 그저 효주와 마음이 통하는 것이지 명령을 내리고 받는 상하 관계가 아니다. 효주가 진심으로 곰들과 효천을 좋아하고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서 말에 잘 따르는 것이지, 효주가 싫은 일을 억지로 시켜도 무조건 따르는 건 아니다.
그래서 김태풍이나 공우진은 곰에게 마음대로 접근하지 못했다. 철벽과 강화 스킬이 있는 최영웅과 가가와는 곰에게 한 대 맞아도 죽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장담하기 어렵다. 박철처럼 오랜 시간 함께 해서 안면이라도 텄다면 모를까, 낯선 사람을 싫어하고 향수 냄새도 싫어하는 두 곰에게 새롭게 합류한 사람들은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화산 가까이 간 박철이 눈을 감고 화산을 느꼈다.
"고등급 괴물이 없어요. 바로 시작하죠."
박철이 미끼로 화산 안의 괴물을 뽑아냈다. 최영웅과 가가와가 앞으로 달려나가 괴물속에 묻혔다. 아직도 이름을 알아내지 못해 듀라한이라고 이름 지은 괴물을 처리한 후 둘의 기력이 무척 많이 늘었다. 그래서 예전과 달리 전투가 끝날 때까지 잘 돌아오지 않는다.
아즈미는 오른손에 최영웅의 검을 들고 왼손에 커다란 방패를 들었다. 방패로 괴물의 공격을 막으며 검으로 해골과 구울의 머리를 때렸다. 정확도가 부족해서 돌진해오는 좀비의 목을 정확히 맞출 수 없기에 차라리 방패로 최영웅과 가가와 쪽으로 날려 보냈다.
듀라한이 남긴 회색 구슬을 먹고 아즈미는 힘이 무척 강해졌다. 제이크가 흰 구슬을 먹고 몸이 단단해져서 방어력이 올라갔지만 힘은 그대로인 것과 달리 아즈미는 힘도 강해지고 몸도 든든해졌다. 그리고 레벨은 그대로인 강화 스킬을 통해 얻는 힘과 몸의 단단함도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신기도 눈사람 병정을 소환하며 검을 들고 괴물과 싸우기 시작했다. 특성을 얻은 후 그저 기력을 날리고 기력으로 수비하는 것으로 검술을 사용해 왔다. 초심으로 돌아가 검을 들고 괴물들과 근거리에서 싸우니 온몸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희열이 느껴졌다.
불불이와 반달이가 효주와 제이크를 지키며 다가오는 괴물을 처리했다. 그리고 김태풍과 공우진은 풍화륜 합체기를 펼쳐 구울 위주로 처리했다. 신기의 정화 스킬을 제외하면 가장 효율이 높고 가장 많은 괴물을 처리하는 두 사람이다.
"후지산에서 시체 조종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헬기 조종사의 전언에 제이크는 봉인 스킬을 한 번만 펼치고 이동하기로 했다. 가가와가 최영웅이 익숙한 솜씨로 곰과 개를 밧줄로 헬기에 매달았다. 처음에는 이런 이동방식을 싫어하던 곰들도 이제는 하늘을 나는 기분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번 구슬은 누구 몫이야?"
- 작가의말
이 글은 예약연재입니다. 동시 연재하고 있는 두 글이 나란히 올라가는 걸 보고 싶군요.
사실 에릭의 망상처럼 초반 전개가 이루어졌다면 이 글이 지금보다 더 인기가 있었겠죠. 그리고 저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사이다를 퍼붓다가 50화 즈음에 글을 완결 냈을 겁니다. 초반부터 달리는 글은 아직 자신 없습니다. 이후 자신감이 좀 붙으면 초반부터 달리는 글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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