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와의 대화
파리.
미국에서 각성을 원하는 많은 사람에게 진화 스킬을 사용한 후, 신기는 미국과 여러 나라의 엄중한 보호를 받으며 모스크바로 향했다. 모스크바에서 보름 정도 머물며 각성자를 만들어낸 후 바로 유럽으로 향했다.
유럽에서는 신기를 대천사로 호칭했다. 각성을 원하는 자들과 신기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구경하려는 자들이 파리로 몰려들었다. 이미 각성한 자들도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소문이 퍼지며, 파리는 인산인해가 되었다.
'이 부분은 똑같군.'
검은 구슬과 성휘로 각성시켜줄 때와 마찬가지로, 각성자가 된 자들은 신기를 맹신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신기만 보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진화 스킬을 사용하는 건 전혀 힘들지 않지만, 자신을 신의 사자로 굳게 믿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피로하다. 거짓말이 이렇게 힘든 거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배가 부른 거야. 예전에는 오히려 좋아했는데.'
가족을 되살리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을 때는 구슬 각성자들의 맹신을 반겼다. 그러나 지금은 절실함이 사라져서인지 부담으로만 다가왔다.
저녁은 된장을 넣고 끓인 라면에 신 김치로 때웠다. 유난히 한국 음식이 그리웠고 가족이 그리웠다.
"미스터 신.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늦은 밤 맥과 에릭이 호텔로 찾아왔다. 상대의 목적은 모르지만, 등에 멘 가방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신기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선수를 쳤다.
"맥, 에릭. 혹시 D의 심장 조각을 가지고 왔나요?"
"역시.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군요. 우리에게 진실의 조각을 나눠줄 수 있나요?"
'에릭 이놈은 대화하기 참 피곤한 놈이야. 또 이놈이랑 수수께끼 놀이를 해야 하나?'
강 회장 이상으로 신기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바로 에릭이다. 신기가 생각 없이 뱉은 한 마디로 수많은 걸 유추해내고, 제멋대로 신기를 오해하기 좋아한다. 길고 상세하게 말하는 건 상대에 대한 모독이라는 듯, 늘 핵심만 짚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지구의 누군가가 다른 세상과 구멍을 뚫어 괴물을 불러왔습니다. 그는 인류가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죠. 그리고 현재 각성자 시스템은 그 누군가가 만든 겁니다."
"슈퍼맨 시스템을 D가 만들었다니, 참 놀랍군요. D는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걸까요?"
"인류를 멸망에 가깝게 몰아간 후 인류를 구원하려는 게 그의 목적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누군가와 내가 말하는 D가 같은 존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함부로 부를 수 없네요. 나에게 그는 다른 이름으로 느껴집니다."
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지만,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겠죠. 그럼 우리 방문 목적도 알고 계시겠군요."
"한 번 만나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도 바라던 바입니다."
### DUAL SYSTEM ###
이공간.
신기와 맥이 D의 앞에 섰다. 에릭은 아직 B급이어서 함께하지 못했다. D의 모습은 누가 봐도 서양 신화에 나오는 드래곤의 모습을 닮았다.
"뭐라고 부를까? 이름이 많이 짧아졌네?"
"내 운명의 대적자여, 이번엔 네 승리다. 그러나 너는 언젠가 생명이 다할 것이고, 나는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다. 결국에는 내 승리다."
"현신할 계획은 없는 건가?"
"DPP가 부족해 현신할 수 없다. 현신할 수 있다면 너를 바로 찾아서 죽였을 것이다."
신기는 감각을 넓혔지만, 다른 심장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다. 설마 모든 심장을 하나로 통합한 건가?
"나는 여전히 네 대적자인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 무엇으로도 말이다."
시간이 되어 신기와 맥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에릭이 눈빛으로 둘을 재촉했다. 신기가 생각에 잠긴 사이, 맥이 에릭에게 말했다.
"D가 나쁜 놈이었어."
맥이 확신에 찬 말투로 에릭을 설득하는 사이, 신기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현신하면 나를 바로 죽일 수 있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나한테 직접 해코지하지 못한다고 했었는데. 그리고 심장은 왜 하나뿐이지?'
초월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예전에 D는 신기에게 몇 번이나 거짓말을 했다.
'나는 돌아온 다음 갑자기 각성했다. 각성한 채로 돌아온 게 아니고. 초월자라서 다른가? 시간을 되돌려도 초월자여서 심장 하나만 가지고 돌아온 건가? 신이 초월자 따위한테도 어쩌지 못하는 건가? 설마 내 DPP가 부족해서 D는 심장이 하나인 채로 돌아온 건가?'
질문만 떠오르고 답은 없다. 신기는 고민을 멈추기로 했다. 어차피 정보 단말의 도움이 없이 신기 혼자서 이 사태를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에릭, 맥.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전력으로 인류의 수호를 위해 힘 써주시기 바랍니다."
"이 조각품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누군가에게 악용될 수도 있으니, 엄중히 보호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를 믿을 수 있다면, 우리 둘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잘 보관하겠습니다. 이 장식품의 용도를 아는 사람이 현재 우리 셋뿐입니다. 우리 셋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괜히 미국에 맡겼다가는 몰래 연구하다 사달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맥과 에릭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둘이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신기는 심장 조각을 계속 둘에게 맡기기로 했다.
"염치없지만, 우리 둘에게도 신의 은총을 내릴 수 있습니까?"
신기가 진화 스킬을 사용하니 에릭과 맥의 레벨이 조금 오르고 스킬 레벨이 조금 올랐다. 둘은 신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고 호텔을 떠났다. 둘이 떠난 후 신기는 도청을 방해하는 기계를 꺼버렸다. 박영광이 준비해 준 물건으로, 효과는 장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처음 사용하는 거라서 감시자가 미처 대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 DUAL SYSTEM ###
킬리만자로산.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신기가 수많은 각성자를 만들어내며 전 세계가 괴물과의 전투에서 여유를 갖게 되었다. 동남아에 점점 많은 소각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유럽과 중동도 소각장을 점진적으로 늘렸다.
소각장을 새로 운영할 때마다 괴물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기에, UN의 감시하에 신중하게 늘려갔다. 농지와 식량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그래도 인류는 희망을 품고 승리의 그 날을 기다렸다.
각성자와 일반인의 차이로 사회적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일부 작은 국가에서 각성자들이 정부를 장악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많은 나라가 생각보다 잘 돌아갔다. 각성자가 된 자들 대부분이 사명감으로 괴물과의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기가 성숙하였다는 생각에 신기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일정 정도 이상의 화산을 봉인하면 초월자가 나올 것이고, 그 초월자를 죽이면 해당 지역은 인류의 영지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신기는 첫 타깃을 아프리카로 정했다. 북부의 몇 개 국가를 제외하면 대륙 전체가 같은 괴물이 나오기에 작업하기 편리하다는 이유를 댔다.
아직 각성자들의 실력이 조금 부족하다. 그러나 봉인 각성자의 실력도 부족하여 아프리카의 화산을 절반 정도 봉인하는 데 일 년의 시간을 예상한다. 일 년의 시간이면 대부분의 핵심 각성자가 A급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봉인 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이 바로 화산의 출력 측정이다. 모든 화산의 출력을 측정한 후 계산을 통해 봉인 순서를 엄밀히 정해야 한다.
박철처럼 화산 속의 괴물을 끌어낼 수 있는 미끼 각성자가 3명 동원되었다. 맥과 사대천왕을 비롯한 마법사들의 위력이 너무 강해 박철 혼자서 불러낸 괴물로는 부족하다.
괴물을 종류에 따라 부를 수 있는 건 박철뿐이다. 박철이 우선 1등급 괴물인 식인 꽃을 불러냈다. 키가 3미터에서 5미터 사이의 꽃이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다. 해골이나 좀비는 걷는 게 느려도 화산에서 기어 나올 때는 무척 빠른데, 이 꽃을 닮은 괴물은 기어 나오는 것마저 느리다.
"칼바람.","파이어 드래곤."
김태풍과 맥의 합체기가 발동했다. 불붙은 바람집에서 작은 불타는 용들이 밖으로 나왔다. 입으로 불을 토하기도 하고 깨물기도 하고 몸통 박치기를 하기도 하며 식인 꽃을 공격했다. 김태풍과 맥 둘이서 육만에 가까운 괴물을 해치웠다.
"불바다.","쥐불놀이."
공우진은 불바다와 쥐불놀이를 결합했다. 수많은 쥐불놀이가 가까운 괴물을 공격했다. 모든 범위에 불을 피우지 않고 불덩이들이 알아서 움직이며 괴물을 공격하기에, 위력과 공격 범위는 그대로지만, 마법의 효율이 몇 배로 높아졌다.
한쪽에서 제이크가 소환한 흙 거인이 바닥을 굴렀다. 장난감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와 같았지만, 보여준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거인에게 깔린 괴물들은 압착기가 지나간 것처럼 납작하게 변했다.
하현주의 천둥은 식인 꽃과 상성이 별로 좋지 않다. 그래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대기했다. 2등급인 엘프가 나올 때 크게 활약할 수 있다.
카메라들이 송출한 화면을 통해 이미지 분석 프로그램이 알아서 괴물 숫자를 헤아렸고, 예측 각성자 셋도 괴물 숫자를 계속 종이에 기록했다. 넷이 얻은 수치의 평균치가 킬리만자로 화산의 공식 최대 출력이 된다.
기력이 바닥 난 박철이 휴식을 취하고 남은 두 기력 각성자가 스킬을 사용했다. 박철과 달리 여러 괴물이 섞여 나오기에 난도가 훌쩍 올라간다. 마법 각성자들이야 마법이 알아서 하기에 괜찮지만, 2등급 엘프와 3등급 엘프 전사가 비슷하게 생겨서 근접 각성자들은 힘 조절에 애를 먹었다.
다리가 서른 개가 넘는 거대 거미들이 앞장섰다. 엘프와 엘프 전사들은 거대 거미의 뒤에 숨어서 전진했다. 마치 탱크를 앞에 두고 전진하는 보병을 방불케 한다. 식인 꽃은 속도가 느리기도 하고, 박철이 많이 끌어냈기에 일단 보이지 않았다.
김태풍과 하현주가 천둥바람으로 괴물 한 뭉텅이 해치웠다. 괴물끼리 뭉쳐있는 초반에 마법사들은 마력을 최대한 소모했다. 잠시 후 난전이 벌어지면 근접 전투 각성자 때문에 대부분 마법은 사용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 접근하자 뒤에 숨어있던 엘프들이 뛰쳐나왔다. 엘프들이 앞에서 싸우고, 탱크 역할을 하던 거대 거미가 뒤에서 부식성이 무척 강한 침을 뱉었다. 근접 각성자들이 부식에 잘 견디는 재료로 만든 갑옷과 투구를 입었지만, 가끔 틈으로 액체가 흘러들어 치유를 받아야 하는 각성자가 속출했다.
신기는 검에 태풍을 둘렀다. 한 번 사용하면 검이 망가지는 부자 스킬이다. 검에 가둔 태풍을 앞으로 방출하자, 나팔꽃 모양으로 괴물이 사라졌다. 망가진 검을 바닥에 버린 신기는, 새로운 검을 뽑아 다시 태풍을 둘렀다.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기력이 검을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며 쌕쌕 소리를 냈다.
신기의 스킬 태풍은 무척 위력이 강하지만, 공격 범위가 넓지 않다. 그래서 절대적인 위력에도 불구하고 전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먼 곳에서 박영광이 소환한 이순신 장군님이 홀로 분전하고 있다. 박영광의 스킬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파티를 맺었음에도 피아의 구분을 제대로 못 한다. 아예 못하는 건 아닌데 가끔 적을 공격하려고 아군도 공격한다. 예전에는 고등급 괴물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주로 이용해서 이런 결함이 있는지도 잘 몰랐다.
2미터밖에 안 되는 칼인데, 한 번 휘두르면 반경 5미터의 괴물이 모조리 쓰러진다. 그리고 소환 시간이 몇 분밖에 안 되던 예전과 달리 무척 오래 소환해 놓을 수 있다. 검을 자주 망가뜨리는 신기와 달리, 소환체의 칼은 한 번도 망가지지 않았다.
신기의 바람대로 박영광의 소환체는 그 위력이 무척 강하다. 기회가 없어서 위력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금속 로봇을 두부 자르듯 하던 걸 보면 웬만한 괴물은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불멸의 안개를 두른 최영웅이 괴물 무더기에 빠져나왔다. 대부분 철강 각성자는 마법사나 박영광과 같은 소환사의 호위를 맡았지만, 최영웅만은 전투를 허락받았다. 불멸의 안개 스킬을 수련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영웅은 기력이 떨어질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전장을 벗어났다.
모든 게 계획대로 순조로운 진행을 보임에도, 신기는 가슴 한구석에 남은 찝찝함을 털어버리지 못했다. D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던 모습이 신기에게 거짓으로 비쳤다. 분명히 뭔가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D와 재회한 후 1년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작가의말
2일 날에 비축분 4편 썼습니다. 그래서 연참 합니다. 두 편 올리고 나도 4편 남습니다. 비축분 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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