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회장
태운 빌딩 앞.
"누굽니까?"
"김 비서님, 강 회장님의 유일한 손자를 데리고 있습니다. 지금 태운 빌딩 앞에 있는데, 5분 안에 안 오시면 그대로 떠납니다."
"곧 가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하고 고개를 돌리니, 박영광과 강효성이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제 할아버지가. 음. 설마. 아니죠?"
"회장님 손자 둘이나 있는데? 얘 혹시 김 비서 손자야?"
"김 비서 손자가 왜 강 씨겠습니까."
"형, 장난치지 마요. 저 심장 안 좋단 말이에요."
'진실은 죽어도 안 믿어주는 더러운 세상.'
경호원을 대동하고 달려오던 김 비서가 박영광의 모습을 보고 속도를 조금 줄였다. 박영광은 태운 그룹에서 관리하고 밀어주는 인재 중 하나이다. 물론 급이 낮아서 김 비서가 박영광의 전화번호까지 알지는 못한다.
"전화한 사람이 누굽니까?"
"얘 머리카락 뽑아가면 됩니다. 셋째 도련님이랑 비교해 보세요."
경호원이 공손한 태도로 강효성의 머리카락을 뽑아서 플라스틱병에 넣었다. 멀지 않은 곳에 태운 그룹의 병원이 있어, 차도 필요 없이 사람이 직접 달려갔다.
"회장님 뵙고 싶습니다."
"누구신지요?"
"미술관 지하에서 단둘이 만났으면 합니다. 잣 세 알을 놓은 솔잎차를 마시면서 탈곡기에 서린 추억을 상기하고 싶군요."
김 비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신기는 미안함을 느꼈다.
"걱정되시면 김 비서님도 참석하십시오. 물론 김 비서님은 대추차를 마시겠죠?"
미안한 건 미안한 것이고, 쐐기를 박을 타이밍은 놓치지 않았다.
"회장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푸른 고무신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김 비서가 조금 물러나서 낮은 소리로 통화하는 사이, 신기는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한 강효성에게 다가갔다.
"이젠 상황파악이 끝났지? 너는 황금알 낳는 거위야. 왜 네 배를 가르겠어. 저기 니코틴 중독으로 손 떠는 아저씨랑 함께 기다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경호원들한테 말해. 태운 그룹에서 과자랑 음료도 만드는 거 알지? 거기서도 제일 맛있는 것들을 가져다줄 거야."
신기가 박영광을 쳐다보자, 박영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뭘 알았다는 뜻인지는 몰라도, 박영광이 딱히 해야 할 역할도 없기에 신기도 그저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박 중위인가 대위인가? 나이 먹어서 기억력이 부족하니 양해하게. 우리 경호원들과 함께 귀빈실에서 기다려주게. 급한 일을 끝내고 깊은 대화를 나눔세."
신기는 어느새 주차해 있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자연스럽게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신기를 보며, 김 비서는 무슨 도깨비 장난인지 벙벙했다. 탈곡기 이야기는 아는 사람이 꽤 많지만, 잣 세 알을 띄운 솔잎차를 큰 마님이 좋아했다는 사실은 김 비서를 비롯해 아는 사람이 얼마 없다.
푸른 고무신이 마음에 드는데 회장님이 자꾸 흰 고무신을 선물해서 속상해했던 일은, 김 비서밖에 모르는 일이다. 그때 김 비서는 회장님이 산 선물 꾸러미에 몰래 푸른 고무신을 집어넣었고, 선물을 받은 마님이 무척 기쁘게 웃으셨다.
"김 비서님, 칼에 찔린 거 괜찮으시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그 후유증을 많이 걱정하시던데요."
김 비서는 쿨럭거리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최근 옛 상처가 도져서 걱정이다. 그때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지만, 의료 기술이 점점 발전하며 크게 고통받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는 못 속이는지, 근래에 진통제를 몰래 먹기 시작했다.
"진통제를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 이후 큰일을 하셔야 하는데, 건강하지 않으면 회장님 곁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짬을 내서 치료 좀 제대로 받으시죠."
"말을 아끼시지요."
"운전석이랑 격리된 게 아닌가요? 그리고 심장은 튼튼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아끼시는 게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신기는 창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볼 때마다 신기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삼 년 뒤에도 비슷한 건물들이 늘어섰는데,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철없는 애들만 신나게 뛰어놀았고, 도시 전체의 분위기는 무척 침체하였었다.
'나와 독도팀이 희망의 불씨를 지폈고, 덕분에 다들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했지. 이번에는 더 확실하게 지키고 더 확실하게 끝낸다. 기다려라, D. 이번엔 네 모든 심장을 박살 내주마.'
소위 말하는 나비 효과를 걱정하여, 성휘 스킬을 얻은 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자가 오지 않아, 생각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게 되었다.
'박영광, 강 회장, 김 비서, 그리고 김 회장과 몇몇 정치인과 장군. 이들은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어 다행이다.'
검은 구슬을 삼키고 각성하는 과정에 한 말들을 기억했다. 특히 고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접한 강 회장이나 박영광의 세계는 신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딱히 약점 혹은 비밀로 뭔가를 얻어내려는 생각이 없었기에, 인상 깊었던 초반의 기억을 제외하면 모두 흐릿하다.
"음, 혹시 박수무당입니까?"
"그런 잡스러운 사람들이랑 같은 취급 하면 섭섭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따 회장님이랑 같이 듣도록 하겠습니다."
"김 비서님. 권총을 쓸 일은 없습니다. 독일제 권총은 감상용으로 그냥 두시는 게 좋아요. 그걸 써야 할 상황은 절대 오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태운 그룹에 무척 좋은 일이니까요. 대한민국 모든 대기업을 강 회장님 발밑에 꿀리도록 돕겠습니다."
태연함을 가장하려 노력했지만, 김 비서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젊은 경호원들은 믿음이 가지 않아, 몇 달 전에 몰래 독일제 권총을 어둠의 경로로 샀다. 탄알은 딱 여섯 발밖에 없는데, 더 쓸모없어지기 전에 회장님을 위해 방아쇠 몇 번 당기려는 마음으로 마련했다.
신호등 때문에 조금 지체되었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미술관이라, 신호등이 아니었으면 더 일찍 도착했을 것이다. 차에서 내린 신기가 알아서 숨겨둔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자, 김 비서의 옷이 점점 땀에 젖어 들었다.
"회장님 참 일편단심이시네요."
신기가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를 누르자, 김 비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허벅지는 이미 몇 번 꼬집어 보았고, 몰래 귓속에 감춘 이어폰으로 신기의 모든 정보를 받았다. 최근 며칠 박영광과 가깝게 지낸 걸 제외하면, 태운 그룹과 아무런 접점도 없는 청년이 확실하다.
'익숙하다.'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신기의 행동을 관찰한 김 비서는, 신기가 마치 이곳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처럼 익숙하게 움직인다는 걸 발견했다. 이 부분은 신기가 고의로 연출한 건 아니고, 예전에 많이 와봤던 기억을 토대로 움직이면서 김 비서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회장님, 손자 얻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반갑네. 아직 DNA 검증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네."
"뭐. 갓난아기 결과도 안 나왔겠네요. 제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보고 받으셨을 테니, 자기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뭘 마실 텐가?"
"김 비서님이 주시는 걸 마셔야죠."
차가 나오는 걸 기다리는 시간에 강 회장은 신기와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지식은 별로 많지 않은데, 이상하게 시야가 넓고 견해가 날카로웠다. 어머니 쪽은 친척도 없고, 아버지 쪽으로 친척이 되는 사람은 미국에 이민 갔다. 중학교 때도 그렇고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집과 도서실과 학교에 규칙적인 삼각형을 그리던 모범 학생이었다.
'천재인 건가?'
김 비서를 통해 신기가 쉽게 알아낼 수 없는 비밀들을 알고 있다고 보고 받았지만, 강 회장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음을 먹으면 강 회장의 신상을 탈탈 털어낼 수 있는 실력자가 대한민국에 열은 넘는다. 그중 하나가 신기라는 배우를 보내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딱히 놀랍지는 않다.
잣 세 알을 띄운 솔잎차의 김이 희미해지자, 신기는 떠 있는 잣알을 훌훌 불며 차부터 마셨다. 차가 한 모금 정도만 남았을 때, 찻잔을 확 꺾으며 잣알을 삼켜버렸다.
"흠. 듣던 것과 다르네요.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다고 했는데, 솔잎차가 저랑 안 맞나 봅니다."
김 비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강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신기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함께 수십 년을 살아온 가족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소 소원한 아들딸들보다도 오히려 말이 더 잘 통하는 느낌이다.
"회장님, 무척 존경합니다. 회장님 지위에 계시는 분이 단 한 번도 바람을 안 피우셨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힘듭니다. 저기 김 비서님만 해도 밖에 몰래 데리고 사는 젊은 여자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만하면 됐네. 본인 정보력은 그만큼 자랑하면 됐고, 목적을 말해보게."
"김 비서님. 독일제 권총 좀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 총알은 빼고요."
김 비서는 품에서 손바닥 크기의 작은 권총을 꺼낸 후, 탄알을 하나하나 뽑아냈다. 탄창이 탈부착식이 아니어서, 김 비서가 떨리는 손으로 여섯 알을 전부 뽑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회장님, 이 권총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을까요?"
"이쪽으로는 흥미가 없네. 합금이려나?"
"뭐, 플라스틱은 아니겠죠?"
강 회장은 저 권총이 엿으로 만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엿처럼 쭉 늘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기가 늘린 권총을 배배 꼬는 걸 보고, 타래 떡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회장님. 지금 전 세계에서 이상한 환자들이 생겨납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이상한 문자가 보인다고 주장하죠. 뇌파를 검사하면, 해석하기 힘든 파장을 보입니다. 얼마 전에 저도 그런 증상을 앓았고요."
원래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맞추지 못할 정도로 변한 독일제 권총이었던 물체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역시 독일제는 독일제군요. 쉽게 끊어지지 않아 손맛이 참 좋네요."
"물론, 그 사람들이 전부 저와 같은 능력을 갖췄다는 건 아닙니다. 전 매우 특별하거든요. 대략 3년 하고도 몇 달 더 있으면, 괴수가 침입합니다. 늦은 여름인데, 정확한 날짜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더 빨리 올 수도 있고, 더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다만, 언제든 꼭 올 것이라는 게 중요하죠."
김 비서가 슬며시 다가와서 독일제 권총이었던 금속 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자네 사업 제안하러 온 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의 유일한 손자를 찾아서 데려왔습니다. 만남 선물은 좀 거창하고, 소소한 뇌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어차피 회장님이 마음먹으면 못 찾을 아이도 아니었습니다."
"뭘 주고 뭘 받을 텐가?"
"태운 그룹을 받겠습니다. 한반도의 왕 자리를 드리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각성자라 부르겠습니다. 각성자를 모아주십시오. 제가 이들을 훈련하고 성장시켜서, 태운 그룹의 힘으로 만들겠습니다. 굳이 제가 본인 세력을 만들려 한다는 의심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마를 모으든 제가 더 강합니다."
"모아서 뭘 할 건가?"
"괴물을 물리치고, 한국을 지켜야죠. 그러다 북한이 무너지면 그쪽을 수습하고, 통일 한국이 된 후 회장님을 왕으로 만들어드리죠."
"왕은 자네가 하는 게 아니었나?"
"저는 이미 왕입니다. 제가 앞장서면 모두가 따를 수밖에 없죠. 굳이 땅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려야만 왕인 게 아닙니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자네를 믿어보겠네."
"조만간 제운그룹의 김 회장과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회장님 밑으로 들이면 쓸모가 많을 겁니다."
"그럼 김 회장을 계약금으로 받도록 하지. 지키지 못하면 자네는 물론, 자네 가족들도 좋은 꼴 보기 힘들 걸세."
"좋습니다. 몸은 아직 버틸 만 하시죠?"
"노환이라 의사도 방법이 없네."
"이제 치유 각성자가 나타날 겁니다. 각성하지 않은 사람에게 치료 효과가 없습니다만, 어디에든 편법이라는 게 있죠. 두 분은 제가 말끔히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각성자는 어떻게 모아야 하는가?"
신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회장님 몫입니다. 모아만 주면 태운 그룹에 만 배 이익을 가져올 인재로 키워드리죠. 회사원으로 채용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만, 제가 고용법 이런 거 잘 몰라서요. 미성년자라도 각성만 하면 꼭 끌어들여야 합니다."
강 회장의 설득은 순조롭게 끝났다. 신기가 시종 검술 스킬로 압박을 가한 게 유효했다. 강 회장은 자신의 감을 무척 믿는 타입인데, 상대의 제안을 들을 때 가슴이 뛰면 좋은 징조로 여긴다. 신기의 압박 때문에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자, 강 회장은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으로 착각했다. 물론 이유는 틀렸지만, 결론은 맞는 착각이다.
- 작가의말
강 회장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아닙니다. 대기업들이 하는 나쁜 짓은 다 한 사람입니다. 신기에게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을 뿐이지, 훌륭한 사람이어서 손잡은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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