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
제주도.
"회장님, 긴급 보고입니다. 신 전무 계정이 메시지를 전해왔습니다."
벌떡 일어선 강 회장의 바지를 쓰러진 술병에서 흘러나온 와인이 적셨지만, 보고하는 사람도 강 회장도 개의치 않았다.
"살아 있었군. 뭐라고 했는가?"
"암호화되어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마누라 생일이라고 합니다."
"가져와."
태블릿을 받아 든 강 회장은 고민했다. 신기는 결혼한 적이 없으니 아마 강 회장의 마누라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생일이 기억나는 마누라는 둘 뿐이고 공교롭게도 둘의 생일은 같은 날이다.
숫자 네 개를 입력하자 내용이 나타났다. 서버의 DB에도 암호화된 데이터와 암호화된 암호만 저장되기에 비밀번호를 모르고 풀려면 사흘은 걸린다. 강 회장은 메시지 내용을 몇 번이나 훑어본 후 김 비서를 불렀다.
"이 일을 당장 처리해."
김 비서가 태블릿 화면을 들여다보니 글 몇 줄이 적혀 있었다.
'회장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지금 시코쿠에서 4천 미만의 각성자를 데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실을 배를 보내주십시오. 시체 조종사를 잡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위치는 지도에 점 찍었습니다.
거제도의 소유권은 여전히 유효하겠죠? 제가 사업 하나 할까 하는데 회장님 용임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김 비서는 다급하게 배를 수배하고 물과 음식 등을 넉넉히 실어서 출발하라고 지시했다. 안개로 꽁꽁 가린 해골이 봉인된 화산을 찾아 깨뜨린다는 정보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수많은 각성자와 직업 군인을 보유한 중국도 어쩌지 못하는 상대라 어디로 피신해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뜻밖의 동아줄이 드리워졌다.
"네가 직접 가서 원하는 걸 다 들어줘라. 태운 그룹을 달라고 해도 준다고 해라."
3년 전에 박영광이 찾아왔을 때 20년 정도 시간만 있으면 그룹이 아닌 나라를 경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영지가 생기고 관리하면서 자기 생각이 무척이나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이젠 나라를 경영하는 게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왕은 늘 장사꾼을 멀리했고, 장사꾼이 왕이 된 적이 없지.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없는 일을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건 오만이었어.'
### DUAL SYSTEM ###
시코쿠.
박철이 미끼 스킬을 사용하자 괴물이 새까맣게 몰려왔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혼슈와 규슈를 바라보는 곳이어서 괴물이 유독 잘 몰려왔다. 당연하게도 바다 쪽으로 움직이면서 생존자를 얼마 발견하지 못했다.
"낭아질풍권!"
신기가 확인했는데 가가와의 스킬은 철벽과 강화 그리고 권법이다. 그리고 권법 밑에는 강타와 연타 두 개의 특성이 있다. 낭아질풍권이라는 스킬은 가가와가 꾸며낸 허구의 권법이었다. 물론 신기는 가가와의 동심이 깨지지 않도록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주었다.
"용아광풍추!"
놀랍게도 가가와는 최영웅보다 두 살 형이었다. 덩치도 작고 동안이라 오해했는데 겉늙어 보이는 최영웅이 오히려 동생이다. 가가와의 도움으로 최영웅도 무공 이름을 하나 지었다. 흰 안개로 뒤덮인 최영웅은 구울 한 마리를 잡아두고 수비는 도외시한 채 발목만 힘껏 때렸다.
"합!"
자신의 키보다 더 큰 검을 든 소녀가 발목을 잃고 멈춘 구울의 머리를 검으로 때렸다. 구울의 키가 3미터 정도이고 검의 길이가 160센티, 소녀는 150센티가 조금 넘는다. 거기에 팔 길이까지 합쳐서 겨우 검 끝이 구울의 머리를 때릴 수 있었다. 검에 힘을 싣느라 다리를 앞뒤로 벌려서 키가 조금 낮아졌기 때문이다.
구울이 두 손으로 정면에서 머리를 때리는 검을 막아냈다. 그때 가가와가 훌쩍 뛰어 몸을 허공 2미터 정도 높이로 띄우고 구울의 뒤통수를 빠른 연환권으로 두드렸다. 기력이 실린 가가와의 주먹은 구울의 머리를 잘 익은 수박을 쪼개듯이 쉽게 터뜨렸다.
"오링."
한참 날뛰다 최영웅이 기력이 떨어졌음을 알리고 가가와의 엄호를 받으며 후퇴했다. 아즈미는 2분 전에 기력이 다 소모되어 미리 후퇴했다. 끝까지 버티던 가가와도 기력이 다 떨어지자 뒤로 도망쳤다.
"오오. 마스터의 절대영역."
괴물들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느려지자 가가와가 감탄을 뱉어냈다. 입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괴물들이라 마치 공포 영화를 음 소거하고 느린 배속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괴물이 느려지자 스킬이 없는 각성자들 중 일부가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신기는 생존자들에게 뭔가를 요구한 적이 없다. 그저 파티 기능으로 누군가가 레벨 100을 이루면 구슬을 건네주고 등급을 올려줄 뿐이다. 이러한 행동은 생존자들을 오해하게 했다. 신기가 모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착각하고 눈에 들려고 더 열심히 전투에 임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스킬을 얻은 자들이라고 그저 놀지 않았다. 마법 각성자들과 원거리 스킬을 얻은 기력 각성자들도 여유 있게 스킬을 사방으로 뿌렸다.
신기는 끊임없이 눈사람 병정을 소환했고 검환을 날렸다. 시체 조종사를 만난 후 지금까지 주력이었던 신성력이 먹히지 않아서 그 후부터 최대한 골고루 성장시키려 노력했다. 기력이나 마력이 소진된 자들이 '오링'을 외치고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모든 각성자의 마력과 기력이 다 소모된 후에도 신기는 한참이나 더 스킬을 난사하다가 정화로 괴물을 삭제했다.
"30분 휴식 후 전투 재개."
하루에도 여섯 번에 여덟 번씩 괴물을 불러다 처리했다. 한국에 가기 전에 최대한 많은 구슬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고, 구슬 각성자 중에서 등급이 오르며 스킬이 생기는 자가 나타나길 바라는 것도 있다. 한국까지 무너지면 이쪽 지역에서 활동하는 게 너무 어려워진다. 어쩔 수 없이 힘이 부족한 상황에 다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기로 했고, 최대한 쓸모 있는 각성자를 하나라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히어로, 왕은 어떻게 저렇게 강해졌어?"
"처음부터 강했어. 내가 처음 봤을 때 벌써 십만이 넘는 괴물을 처리했지. 그때 괴물이 나타나고 보름이나 되었을까 싶을 때였을 거야."
물론 그때 최영웅은 믿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부러 이미지를 만들려고 헛소문을 퍼뜨린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독도에 자원해 간 후 실제 괴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과장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왕은 정말 검술 스킬밖에 없어? 물론 내 권법 스킬도 무척 강하기는 하지만, 팰러딘과 비교하면 정말 하찮아 보이는데."
"확실해. 검증기에 검술 스킬밖에 안 나왔어. 물론 밑에 특성이 있지만, 스킬은 검술 하나뿐이야."
가가와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각성자의 정보를 알아내는 기기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낭아질풍권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잠깐 슬퍼졌다가, 어차피 최영웅도 스킬이 없지만 용아광풍추를 외치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희망을 찾았다.
"위저드는 정말 대부호야?"
"그럼, 미국에 있을 때 하루 휴가를 얻어 제이크의 집에 간 적이 있어. 부모님 집 말고 제이크의 집. 섬에 지은 별장인데 안에 메이드만 30명이 넘었어."
메이드라는 말에 가가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남자의 로망인 메이드가 하나도 둘도 아닌 30명이란다. 물론 최영웅도 이쪽 길에 살짝 발을 담갔지만, 아직 발목까지만 담근 정도라서 가가와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테이머의 할아버지가 한국 최대 그룹의 회장이고?"
"그래. 그리고 미국에서 애들한테 인기가 가장 많은 각성자야."
"샤먼은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최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가와는 최영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너는?"
너는 어떻게 이 무리에 끼었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한국어와 일본어에 영어까지 섞어서 대화하느라 의미가 전달되지 않았다. 너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묻는 말로 오해한 최영웅은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세계 최초의 구슬 각성자이자 최초의 C급 구슬 각성자. 구슬 각성자 중에서 유일한 트리플 스킬 보유자. 그리고 세계 최초로 괴물의 스킬을 빼앗은 자."
최영웅의 말을 듣고 보니 꽤 대단한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가가와는 주저하다가 하고 싶은 말을 끝내 뱉어냈다.
"전투복 남는 거 있으면 하나 줄 수 없을까?"
"우리는 미사일 공격을 받고 급히 탈출하느라 전투복 여벌을 챙기지 못했어."
스케일이 미사일로까지 커지자 가가와는 어떻게든 이 무리에 껴야겠다고 다짐했다. 신기 일행을 만나고 여행을 시작하면서 2D 여자친구들이 점점 잊혀갔다. 왜 옛날에 친구들이 맨날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만화 속의 인물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이 늘어나는 스킬은 없는 건가?'
어릴 때부터 활동을 싫어해서 수영할 줄 모르는 가가와는 팔이 늘어나는 스킬이 몹시 간절했다. 그런 스킬을 얻는다면 눈 밑에 칼로 상처를 낼 각오도 되어있다. 그때 우렁찬 외침이 가가와의 망상을 멈춰 세웠다.
"배다. 큰 배다."
"하루 일찍 도착했군. 하여튼 한국 사람들 성격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한국 국기와 태운 그룹의 로고를 찍은 깃발을 게양한 커다란 배 십여 척이 부두로 천천히 들어섰다. 제이크는 생존자들에게 짐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내일이 약속한 날짜라 아직 짐을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배에서 김 비서가 내렸다. 환갑이 지났지만 각성한 덕분에 건강을 되찾아 발걸음이 날랬다. 성큼성큼 다가온 김 비서는 우선 신기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후 효주에게 다가갔다.
"아기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작은할아버지."
김 비서는 효주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예전에는 눈치를 보지 않고 충언을 마음껏 올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강 회장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아마 각성한 이후였던 것 같다. 효주를 프로메테우스로 보내는 일에 반대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었는데, 미사일 공격을 받고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대한민국 태운 영지에서 왔습니다. 태운 영지는 괴물의 위협에서 안전한 곳입니다. 여러분이 태운 영지의 손님으로 방문하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김 비서가 유창한 일본어로 생존자들에게 환영 의사를 밝혔다. 배에서 선원들이 내려와서 짐을 나르는 걸 도우려 했지만,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전원 각성자여서 짐을 나르는 데 누구도 힘겨워하지 않았다.
최영웅과 가가와 그리고 아즈미와 도시바 삼 형제가 커다란 가방 하나씩 메고 배에 올랐다. 사람의 키만큼 큰 가방에는 구슬이 꽉 채워져 있다. 신기와 제이크는 배에 오르지 않고 김 비서와 대화했다.
"각성자가 되고 싶은 사람을 모아주십시오. 한국인도 좋고 동남아도 좋고 아프리카 흑인도 괜찮습니다. 각성자가 된 후 목숨 걸고 전투에 임할 각오가 된 자들로만 받겠습니다."
"뭐든 말씀하시면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원하시면 태운 등대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회사는 지분 구조가 복잡하다. 그러나 태운 등대는 모든 지분이 강 회장과 그 자식들이 가지고 있어 깔끔하게 신기 소유로 넘길 수 있다. 신기는 김 비서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회사지만, 회사의 형식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돈이나 계약이 아니라 신념과 의리로 결속력을 다질 생각입니다. 물론 계약서는 작성해야겠지만 파기하려면 목숨을 대가로 내놔야 합니다. 지금 세상이 몇 년 전의 세상이 아니라는 걸 이젠 인정해야죠."
"뜻을 잘 알겠습니다. 헌법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계약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김 비서는 신기의 말을 알아들었다. 신기는 협조를 요구하는 듯하지만 사실 협박하고 있다. 법을 바꿔서라도 내가 하려는 일을 모두 합법으로 만들어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간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기대합니다."
신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크는 담판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알았다. 김 비서에게서 위성 전화를 빌린 제이크는 십수 개의 숫자를 눌러 통화를 완성했다.
"아빠, 나야. 제이크. 그래그래, 잘 있고말고. 울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나는 가문에서 독립하기로 했어. 가문 모두의 재부를 다 합친 것보다 더 값진 일을 해낼 거야. 세계사에서 최소 열 페이지는 차지할 위대한 업적을 이루겠어. 나는 미국 모든 어른과 어린이의 우상이 될 거야. 내 초상권 5%를 줄 테니 나의 어린 시절 모습부터 시작해서 피규어를 대량으로 생산해. 판매 대행비는 당연히 따로 쳐줄게. 그래, 우리 모두 살아있어. 다른 사람들의 초상권도 내가 곧 협상할 테니 미리 계약서를 준비해 둬."
- 작가의말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제 성향에 관한 건데, 저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 빼고는 확고한 성향이 없습니다. 세상은 제 수준으로 판단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한 가지 생각에 매몰되지 않고 두루 마음을 열어 많은 생각을 담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잘것없는 자라 커다란 세상의 한 귀퉁이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에는 제가 담은 세상보다 더 작은 세상을 담을 수밖에 없고, 글 속의 세상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캐릭터에게 제가 알고 있는 성향들을 담습니다. 이 글의 모든 캐릭터의 생각과 행동과 말이 제 생각과 성향을 반영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더라 정도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어떠한 성향이나 사상 혹은 이상을 표출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피규어의 표준 표기법이 피겨라고 합니다. 그러나 피겨가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아 피규어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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