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의 마지막 단계
에콰도르.
"세상과 세상을 가로막은 절대의 법칙을 부수는 거야. 물론 절대도 상대적이지. 누구한테는 절대겠지만 너에게는 절대가 아니야. 이 법칙은 단순해. 두 세계의 법칙이 다를수록 더 단단해진다. 그러면 어떻게 뚫어야겠어?"
"속임수를 쓰라는 말인가? 반대편과 같은 법칙이 되게 만들어 얇게 만든 후 힘으로 뚫으라고?"
"넌 초월자가 적성에 맞는 것 같구나. 내 부군이 되어 나랑 저쪽 세상을 지배할 생각 없어?"
'너 효주냐? 그리고 내 로리왕 별명 굳히기로 했어?'
신기는 속에서 울컥 치미는 화를 눌렀다.
"그런데 D가 이걸 해냈다고?"
"그 멍청한 놈은 이상한 힘을 이용해 힘으로 뚫었어."
"DPP 말하는 거야?"
"너 DPP도 알고 있었어?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신기는 엘프 여왕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두 세상을 가로막은 막과 엘프 여왕이 봉합한 흔적을 확인한 후 눈을 뜨니 박철이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사흘 전에요."
"그 핸드폰은 뭐야?"
"생중계하고 있어요. 여기 향해 손 한 번만 흔들어줘요. 그리고 지금까지 뭘 했는지 알려주세요."
신기는 박철이 든 핸드폰을 행해 손을 흔들었다.
"구멍을 뚫어 히드라를 불러내 소멸할 거야."
"음, 옆에 엘프 여왕도 인터뷰하고 싶은데, 대신 부탁해 줄래요?"
엘프 여왕은 순순히 승낙했다. 신기는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박철은 엘프 여왕과 대화를 나누면서 팡팡 터지는 풍선에 행복해했다.
"여러분, 엘프 여왕이 지구에서 가장 인상 깊은 건 셀카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인터넷으로 셀카 사진 검색하는 게 취미라고 하네요."
"물론입니다. 신기 님이라고 안 먹고 안 싸는 건 아닙니다. 잠도 자고 잠꼬대도 하거든요. 성격은 무척 좋습니다. 까칠하지 않냐고요? 절대 아닙니다. 저랑 처음 만났을 때 소고기 10인분을 사주셨을 정도로 친절한 분이에요."
"엘프 여왕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요? 아까 부탁해봤는데 거절당했습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신기는 기력을 움직여 엘프 여왕이 봉합한 부분이 아닌 다른 곳을 찢었다. 막이 급속도로 복구되려 하여 지속해서 기력을 투입했다. 이젠 아무리 써도 티가 나지 않는 기력이 막의 찢어진 부분으로 흘러 들어갔다. 반대쪽 세상에 닿은 기력이 다시 신기에게 돌아왔다.
그렇게 기력이 순환하자 두 세상이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멍과 가까운 곳의 법칙이 점점 비슷해지다가 결국에는 같아졌다. 찢어진 막이 복구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신기는 기력을 거뒀다. 그 과정이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엘프 여왕을 놀라게 했다.
"박철. 히드라 불러."
박철은 핸드폰을 고정한 후 화산구에 가까이 다가가 미끼 스킬을 사용했다.
"히드라. 당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제이크와 최영웅의 죽음은 박철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신기보다 더 가깝게 지내던 둘의 죽음으로 외로움을 부쩍 느낀 박철은 과장된 행동으로 자신의 슬픔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너무 어설퍼서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닌 신기도 낌새를 알아챌 정도다.
땅이 흔들리며 박철이 핸드폰을 고정한 거치대가 넘어졌다. 박철은 황급히 달려가서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나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모든 게 끝나버렸다. 신기는 땅에서 주운 구슬을 닦지도 않고 입에 넣었다.
진화 스킬을 사용했을 때처럼 큰 힘과 많은 능력을 얻지 못했다. 그저 구슬이 가진 힘의 매우 적은 일부와 능력 하나만 얻었다.
"간다."
신기가 화산구로 몸을 던진 후 한 시간 정도 지나고 엘프 여왕이 생명의 막을 풀어 구멍을 봉합했다. 아프리카에서 봉합하던 것과는 달리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박철의 핸드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신기가 왜 화산에 들어갔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박철에게 전화를 계속 걸어서 생중계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 DUAL SYSTEM ###
이계.
하늘은 그저 검은색이다. 땅은 회색이고 세상 모든 게 흑백에 가까운 색으로 보였다. 신기의 피부마저 옅은 회색으로 보인다.
"환영합니다. 조금 쉬시겠습니까?"
신기는 힘의 절반을 잃었다. 그러나 초월자들과 달리 신기에게 큰 타격이 아니다. 출력이 제한되어 지구전으로 싸워야 하는 초월자들에게는 양이 중요하지만, 모든 기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신기에게는 전투력의 하락이 전혀 없다. 절반 남은 기력을 모조리 쏟아부어도 초월자를 죽일 수 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신의 법칙이 확고한 다른 초월자들과 달리, 신기는 세상의 기본 법칙에 크게 위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세상으로 왔음에도 힘의 감소가 그렇게 심하지 않다.
"뱀파이어 드래곤?"
무척 잘생긴 미청년이 다가와 신기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렇습니다."
신기는 눈으로 세상을 보던 걸 멈추고 감각을 넓혔다. 푸른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떠 있고, 세 개의 태양이 서로 교차하고 있다. 회색으로 보이던 바닥은 붉은 풀이 가득하고 가끔 흰 꽃과 검은 꽃이 보였다. 눈이 무척 크고 코와 입이 작은 엘프들이 축 처진 귀를 흔들며 어딘가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다른 종족을 말살하고 있습니다. 우리 종족만 남게 되었으니 언젠가 우리 세상의 격이 더 높아질 겁니다."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삶이 싫지는 않아?"
"불합리한 죽음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종족의 일원으로 종족을 위해 죽는 것만큼 더 명예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언젠가 죽어 사라지지만 내 종족이 영원히 남아서 나를 기억해주면, 그거야말로 영생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내 육신은 다시 새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희생하는 건 언제나 힘없는 자들이잖아."
"아닙니다. 초월자도 희생할 때가 있습니다. 천사가 허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걸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천사가 아닌 강신사제는 왜 희생하지 않았지?"
"강신사제가 종족을 천사에게 넘겨주었다면 강신사제가 희생했을 겁니다. 그러면 강신사제 대신 천사가 종족을 이끌었겠죠."
"그렇군. 그럼 구멍을 뚫으러 가볼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마에 난 뿔, 등에 달린 날개, 손가락과 발가락에 자라난 날카로운 손발톱을 보며 신기는 뱀파이어 드래곤에게 질문했다.
"다시 돌아가면 내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법칙이 달라 외관이 다르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하긴, 엘프들도 지구에서 보던 모습과 다르다. 특히 피 묻은 무기를 들고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구에 온 괴물은 멍청하고 단순했는데 이곳에서는 생동감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가끔 특이한 존재가 태어나면 처리한다고 들었네."
"다 처리하는 건 아닙니다.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라면 따로 독립시키기도 합니다. 완전히 다른 법칙을 사용하는 종족보다는 비슷한 법칙을 사용하는 종족이 많은 게 유리하거든요. 세상의 법칙을 우리 법칙과 일치시키려면, 우리와 비슷한 종족이 많아 남아야 합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게 목표가 아니고 세상의 법칙을 우리 법칙으로 대체하는 게 목표니까요. 우리와 같은 법칙을 사용하는 다른 종족이 그것을 이룩해도 우리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그럼 법칙이 서로 상충하는 불사족이나 타이탄족은 모조리 죽여버리겠군?"
"타이탄족은 맞지만, 불사족은 우리와 비슷한 법칙을 사용합니다. 그저 목숨을 이어가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뱀파이어 드래곤을 따라가는 과정에 엘프가 해골이나 좀비를 죽이는 모습을 적잖이 보았다. 해골은 무척 정갈하게 생겼고 좀비도 오관이 똑바로 박혀 무척 멋진 모습이었다. 움직임도 어색하지 않고 무척 부드러웠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건 히드라의 권속입니다. 원래 여왕의 계획은 히드라 일족을 흡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약의 집행 과정에 좀 문제가 생겼네요. 히드라가 마지막 조건이 되어 여왕도 어쩔 수 없이 원래 계획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히드라가 종족을 넘기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모두 소멸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해주지?"
"계약의 반동을 최소화하기 위함입니다. 여왕의 실수로 어떻게든 반동이 오기 마련입니다. 아마 저쪽 세상에서도 여왕이 D에게 자초지종을 실토하고 있을 겁니다."
"어겨도 D와의 계약을 어기겠지?"
"D와의 계약에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약속대로 당신이 이쪽 세상으로 왔기에 계약의 대부분 완성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여왕의 격이 더 높기에 이 주장이 먹힐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D의 매개체는 내가 갖고 있는데?"
"계약의 힘은 대부분 법칙보다 상위입니다. 매개체가 없어도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습니다."
원래 세상으로 도망가면서 히드라는 힘을 태반이나 잃었다. 그래서 박철은 저등급 괴물을 불러내는 것처럼 히드라를 쉽게 불러냈다. 신기는 소멸의 빛으로 빼꼼 내민 히드라의 첫 머리를 적중했고, 히드라는 즉사했다. 굳이 소멸의 빛으로 히드라를 소멸한 건, 엘프 여왕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다.
뱀파이어 드래곤의 말을 들은 신기는 작은 걱정이 생겼다. 엘프 여왕과 D가 계약을 수정해서 자신한테 불리한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엘프 여왕. 혹시 내 말이 들리는가?'
몸은 계속 뱀파이어 드래곤을 따라 달리는데, 신기의 정신은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기에는 엘프 여왕뿐 아니라 D도 있었다.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는 게 좋아. D 너는 죽을 준비나 하고."
세상의 법칙을 가공하는 힘이 마나다. 현재 지구는 마나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강자의 입장인 D는 신기를 죽이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원했던 것을 달성해서 신기를 패배시키거나, D와 전혀 관련이 없이 신기가 죽기를 바라야 한다.
"초월자의 지혜를 얕보지 말아라. 내가 D급인 건 격에 비해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격을 위해 힘을 버린 멍청이들이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제길. 다 지가 옳다고 지랄이네. 엘프 여왕, 내 경고를 무시하면 어떻게든 대가를 치를 것이다. 내가 천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너를 해코지할 수 있어."
말을 마친 신기는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어느새 뱀파이어 드래곤과 함께 멈춘 곳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어느 세상이나 마찬가지로, 물이 마나와 가장 친화도가 높습니다. 이곳에서 구멍을 뚫으면 봉합도 쉬워집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안을 탐사했다. 엘프 여왕과 D의 만남을 확인한 신기는 다급해졌다. 저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기 전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 만약 엘프 여왕이 건너오지 않는다면, 엘프 여왕의 종족을 지우면 된다.
지구에서 구멍을 뚫을 때는 지구의 법칙을 이 세상과 같게 바꿨지만, 지금은 이쪽 법칙을 지구의 것과 같게 바꿔야 한다. 법칙의 공명을 이루는 과정에 신기는 저쪽에서 뭔가 작은 수작을 부렸음을 알아챘다. 지구의 법칙이 아주 조금 비틀려 있었다.
'이상하군. 이 정도 수작질은 아무 쓸모도 없고 계약의 반동만 더 심하게 할 뿐일 텐데.'
신기는 훨씬 능숙하게 구멍을 뚫으며 뱀파이어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뱀파이어 드래곤은 엘프 여왕의 피를 마시고 자랐기에 서로 마음이 통한다. 계약이나 다름없는 상위의 법칙이어서 세상이 가로막아도 서로 대화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물이 얼고 한쪽에서는 물이 끓었다. 물이 거꾸로 흐르기도 하고 물방울이 하늘로 떨어지기도 했다. 지구와 법칙이 다른 세상이어서 그런지 반응도 달랐다.
그리고 구멍을 뚫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프 여왕이 호수에 나타났다. 이마가 얼굴의 반을 차지했고 눈이 무척 크다. 코는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작았고 입 역시 뭘 먹을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로 작다. 축 늘어진 두 귀는 개의 것도 아니고 고양이의 것도 아닌 어중간한 모양새다.
키는 8미터 정도로 무척 컸으며 다리가 거의 5미터 이상인 듯했다. 몸에 비늘이 덮였지만,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고 조화로운 느낌을 주었다.
"D를 불러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내가 돌아가면 이 구멍을 다시 봉합해. 그럼 우리 계약은 끝나는 거다."
"알았어. D를 불러내는 방법을 알려주지. 나에게 부탁하면 된다. 이제 네가 돌아가면 우리 계약은 끝난다. 돌아가서 나에게 부탁하거라, 그럼 내가 D를 불러주마."
"개소리."
신기가 돌아가면 계약이 끝난다. 그러면 신기는 엘프 여왕에게 부탁할 방법이 없다. 계약은 끝나지만, 신기가 원하는 결과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약이란 원래 이래. 격도 낮은 주제에 함부로 계약하는 거 아니다."
"D와의 계약은 어떻게 됐지?"
"네가 이 세상으로 오는 순간 계약이 완화되어 조항을 수정했지. D는 다시 이쪽 세상으로 구멍을 뚫지 않기로 약속했고, 나는 D를 불러내는 방법을 현재 방법으로 알려주기로 했어."
신기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감정이 마모된 엘프 여왕과 뱀파이어 드래곤에게 신기의 미소는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럼 부탁한다. D를 불러내 줘."
- 작가의말
어제 실수로 시간을 잘못 설정해서 두 번째 글이 먼저 올라갔군요. 124화가 ‘진화’, 125화가 ‘이중 계약’이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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