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의 결단
평양.
태운 그룹이 새롭게 디자인한 전투복을 멋있게 차려입은 신기가 불불이의 등에 타고 가장 앞장섰고 반달이의 등에 탄 제이크와 효천의 등에 탄 효주가 그 뒤를 따랐다. 요코의 도움으로 훈련받은 곰들이 드디어 효주 외의 사람을 등에 태우기 시작했다. 현재 효주의 강화 스킬로 무럭무럭 자라는 곰이 수십 마리나 된다.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북한 사람들이 길 양옆에 나와서 태극기와 북한 인공기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열심히 흔들었다.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이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신기의 눈에 보였다.
"다음으로 괴물을 물리치고 조선 반도를 해방할 신기 동무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열렬한 박수로 맞이하십시오."
신기는 미리 외워둔 말들을 앵무새처럼 옮기기 시작했다.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간 고생 많으셨지요? 미국과 중국이 식량 원조를 약속했습니다. 이미 삼백만 톤의 식량이 제주도와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힘찬 박수가 터졌다. 거짓인지 진실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기쁨에 겨워 손뼉부터 치고 본 것이다. 신기가 평양에 도착한 후 확인한 가장 진실한 모습이다.
"이제 백두산에서 괴물이 나오지 않도록 봉인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깨에는 더욱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바로 전 세계의 고통받는 인류를 괴물로부터 해방할 중대한 임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안심하고 싸울 수 있도록 모든 분이 우선 경상도와 전라도로 이주해서 살게 될 겁니다. 여기보다 더 따뜻하고 식량도 많고 괴물도 없는 안전한 곳입니다. 집도 주고 자전거도 나눠주고 일을 하면 쌀과 고기도 넉넉히 줍니다."
이젠 박수가 아니라 고함을 지르고 발을 구르는 자들도 있다. 일부는 미리 지시를 받고 선동하는 자들이겠지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러나온 사람도 적지 않다. 확실히 한국 사람보다는 북한 사람들이 다루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특별한 시기에는 통치자의 입맛에 훨씬 맞는 단순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버려졌겠지.'
약육강식 적자생존. 결국,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 세상에 빨리 적응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 방식이 용감한 것이든 비겁한 것이든, 신기는 살아남은 자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함께 괴물과 싸울 용감한 지원자를 찾습니다. 팔다리가 불편하고 힘이 없어도 각성자로 만들어주고 아픈 것도 치료해 줍니다."
미리 준비한 팔다리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팔다리가 꼬이고 근육이 말라서 누가 봐도 살아있는 게 용한 사람들이다. 신기가 내주는 구슬을 삼킨 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악다구니를 부렸다.
시간이 흘러 하나둘 각성하기 시작했다. 신기는 마지막 각성자까지 파티에 받은 후 치유를 사용했다. 1단계의 회복 경험치가 다 차서 2단계 복구가 된 치유 특성은 예전보다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 비틀린 팔다리들이 정상적으로 펴지고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걷기는커녕 부축을 받으며 움직이는 것도 힘겨워하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두 발로 걸었다. 걷는 게 어색해서 힘 있는 걸음은 아니지만, 부축을 마다하고 자기 발로 걷는 사람들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는 곧 신기에게 절을 거듭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거짓된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신앙으로 삼던 사람들에게, 신앙의 부재를 메꿔줄 존재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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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만 명에 달하는 각성자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목적지로 움직였다. 평양의 사람들이 남쪽으로 움직이는 걸 엄호할 겸, 혹시 모를 생존자를 구해내기 위해서다. 일본 생존자의 예로 알 수 있듯이 이런 난리 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 구원을 받은 후 신기에게 광신에 가까운 호감을 보였다. 신기 주변이 끈끈할수록 못된 생각을 품은 자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결정이 어려워지며 행동이 굼떠질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용 정찰 위성이 신기를 중심으로 어떠한 불온한 움직임이 없는지 늘 살피고 있다. 물론 제이크에 대한 보호도 있지만, 신기가 열쇠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예전과는 다른 대우를 해주고 있다. 시체 조종사의 출현 후 세계 각국에서 각성자들의 지위가 한껏 상승하고 있고 신기와 제이크처럼 특별한 각성자는 그 대우가 무척 달라졌다.
백두산 화산은 화산구가 백 개가 넘는다. 모두 이어졌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가장 가까운 화산구로 가서 봉인을 시작하기로 했다. 백두산의 봉인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신기가 백두산을 봉인하기로 하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들에 '통보'했다는 점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드디어 백두산 화산구에 도착했고 먼저 박철이 미끼 스킬로 괴물을 국수처럼 뽑아냈다. 시간을 끌 것도 없이 신기가 나서서 순식간에 괴물을 처리하고 구슬을 회수한 후 제이크가 봉인을 시작했다. 만 명이 넘는 각성자가 제이크 주변에 빼곡히 모여서 스킬의 위력을 더해주었다.
40여 개의 화산구와 연결되어 있고 어두운 저녁이 될 때까지 40%나 진도를 나갔다. 시체 조종사를 세 번이나 잡으며 마력이 부쩍 는 것도 있고 절대 봉인 스킬 자체가 기존 봉인보다 효율이 무척 높은 느낌이다.
"야영 준비."
지시만 내리면 각 분대가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많은 훈련을 받은 게 아니지만, 웬만큼 힘든 일을 해도 쉽게 지치지 않으니 적극성이 훼손되지 않는다. 힘든 일을 오래 하면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기 마련인데, 각성자만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그럴 일이 없다.
신기는 중심의 천막에 가서 성휘를 펼친 후 정화 특성을 고정했다. 물론 경계 근무를 세우겠지만, 괴물이 범위 안에만 들어와도 알아채는 성휘가 훨씬 믿음직하다. 경계를 맡은 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빠르게 잠들었다.
### DUAL SYSTEM ###
백두산 천지.
백두산의 화산은 세 개로 나뉘었다. 남은 두 개는 이미 봉인하였고 마지막 남은 봉인을 천지에서 하기로 했다. 굳이 오르기도 힘든 천지를 택한 건 순전히 백두산 천지를 한번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제길, 민족의 성산이라고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이제야 눈으로 직접 보게 되네."
최영웅이 천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며 툴툴거렸다. 높은 산꼭대기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다는 것도 경이로웠고, 천지의 물에 거꾸로 비친 봉우리들도 무척 멋있었다. 이렇게 좋은 풍경을 그동안 마음대로 보지도 못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그때 비행기들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속되게 '삐라'라고 불리는 전단을 뿌리는 비행기들로 중국이 버린 지역들에 전단을 뿌리러 가는 것이다. 원래 중국에 속했던 단동과 훈춘에 등대를 운영하며 생존자들이 찾아오면 보호해준다는 전단이다. 정기적으로 선박이 운항하며 생존자를 포항과 목포로 실어갈 계획이다.
"박철."
화산을 봉인하기 전에 괴물을 최대한 뽑아내는 건 매너다. 봉인하기 전에 모든 국가에 한 번 통보하고, 봉인에 성공하면 다시 통보해야 한다는 법이 국제법에 새롭게 추가되었다. 다른 봉인 각성자가 나타나지 않은 지금 이 법을 지켜야 할 사람은 제이크뿐이다. 그래서 제이크 법이라고도 불린다.
"오, 운 좋은데."
시체 조종사 한 마리가 꾸물거리며 물 밖으로 움직였다. 신기는 빠르게 특성을 보호로 바꾸었다. B급에 가까워지는 최영웅과 가가와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하 등급들은 시체 조종사의 등장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E급에 이르지 못한 구슬 각성자가 많아서 머릿수만 많았지 괴물을 상대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번 구슬은 누구에게 줄 거야?"
제이크의 질문에 신기는 고민을 오래 하지 않았다.
"박영광에게 주는 게 좋겠어."
성휘를 최대 크기로 펼친 덕분에 대부분 괴물이 아직 멀리 있다. 제이크는 시체 조종사를 향해 봉인을 펼쳤다. 안개가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시체 조종사는 부하들을 다 뿌리치고 바닥을 기어 제이크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제이크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던 구울이나 좀비가 모두 시체 조종사의 돌진에 조각이나 가루로 변했다.
눈사람들이 통통 튀듯이 달려서 시체 조종사의 몸에 마구 달라붙었다. 속도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 최영웅이 실수하지 않고 해골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질풍승룡권!"
45도 각으로 연타를 때려 해골의 머리가 살짝 들리게 했다. 시체 조종사의 꼬리가 커다란 호를 그리며 방해하는 가가와와 제이크를 함께 쓸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꼬리로 후려치는 공격은 돌진하는 공격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최영웅이 제때 달려가서 철벽과 강화 그리고 불멸의 안개로 막아냈다.
어느새 검을 잡은 신기가 요해를 향해 달려갔다. 전에 없이 집중력을 끌어올린 신기가 검으로 요해를 힘껏 내리쳤다. 검술 스킬이 무의식에 작용하여 몸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만들어 정확도가 높아지고 타격의 위력이 강해졌다.
'한 번에 간다.'
마력이 충분하여 지난번처럼 괴물의 발악에 당할 염려는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방에 괴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충검으로 기력을 뽑아낸 후 둔검으로 뭉치게 하고 중검으로 단단하게 만들었다. 검 끝에 올올이 맺힌 기력이 하얀 뼈에 적중하는 순간 오매불망하던 꽃망울이 터지듯 순식간에 만개했다.
"마력 각성자들 앞으로."
마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처음부터 일반 마력 각성자보다 마력이 많았던 신기와 달리 이들은 시체 조종사의 죽음과 더불어 늘어난 마력의 양이 기적처럼 받아들여 졌다. 심한 자는 마력이 2배로 늘기까지 했다.
신기는 달려오는 괴물 쪽으로 몸을 돌리고 특성을 치유로 바꾸었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신기는 가진 기력을 이번 공격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꽉 찬 위에 있던 음식물이 한순간에 사라져서 포만감이 갑자기 허기로 변한 것처럼, 신기는 탈진한 느낌이 들었다. 핼쑥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다른 각성자들을 등졌다.
'기력, 마력, 신성력. 시스템이 부여한 게 아니고 원래부터 있었던 힘이 아닐까?'
요즘은 정보 단말에 질문하는 걸 자제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답이 '일부 정확합니다'여서 물으나 마나 한 것도 있고, 머릿속에 구체적인 생각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려고 하기에 정보 단말을 배제하고 우선 틀리더라도 관점을 명확히 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형, 몇 번 더 뽑아야 할 것 같아요. 여기 장난 아닌데요."
식별 스킬 덕분인지 아니면 미끼 스킬의 특별함 때문인지, 박철은 화산에서 아직 기어 나오지 않은 괴물을 느꼈다. 신기는 속이 허전한 느낌이 사라지면 곧바로 정화로 괴물을 정리하려 했는데 박철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전투 대형."
제이크의 지휘에 각성자들이 분대별로 모여서 괴물을 상대할 준비를 마쳤다. 신기는 눈사람 병정으로 가장 앞장서서 달려오는 구울을 더욱 느리게 만들었다. 괴물의 장점은 난전 중에 같은 편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무모한 공격이다. 그래서 최대한 난전으로 이끌어가지 않으려면 먼저 오는 구울을 좀비와 해골이 도착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낭아질풍권과 용아광풍추에 이어 몇 개 중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외침이 뒤를 이었다. 전투의 긴장감을 적당히 완화하고 사기를 고취한다는 심리 전문가의 판단이 있어 제지는커녕 은근히 부추기는 추세다. 물론 신기는 돈을 아무리 준다고 해도 저러고 싶지 않았다.
시체 조종사가 더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주는 교훈에서 알 수 있다시피 욕심을 버려야 복이 생긴다. 오전 내내 '잡몹'만 처리하고 오후부터 봉인을 시작했다. 열흘 정도면 봉인을 끝낼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고 적당한 곳에 군영을 앉혔다.
"그런데 정말 일본의 화산을 다 봉인하면 전 세계 괴물이 몰려올까?"
"아니면 더 좋고. 괴물이 제각각이라면 각개격파하면 돼."
"각가각파, 조금 어려운 말인데?"
"원 바이 원. 하나씩 처리한다는 뜻이야."
### DUAL SYSTEM ###
영국 노팅엄.
헌터 협회의 건물이 살짝 흔들렸고 맥과 에릭은 급히 지하로 달려갔다. 아직 날짜가 되지 않았음에도 D를 만날 수 있다는 느낌이 갑자기 생겼고 곧바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건물이 흔들렸다.
"함께 가자. D가 일부러 우리를 부른 것 같은데."
함께 D의 공간에 들어가니 넘실대는 기운이 평소보다 훨씬 격렬했다.
"코리아, 제지. 봉인, 제지."
"이유, 이유를 말해. 난 네 시종이 아니야. 그리고 이유를 알아야 정확히 대처할 수 있어."
"그만해, 여기 네 사무실이야."
에릭이 정신을 차려보니 평소처럼 지하에 나타난 게 아니라 본인 사무실로 이동했다. 다시 교회로 달려가니 건물이 무너져있었다. 급히 건물 잔해를 치웠지만, 어디에도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 작가의말
아르헨티나 경기는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뭘 잘못 먹었는지 복통에 일어나니 아르헨티나 경기더군요. 그나저나 월드컵 전에 날두를 광고 모델로 쓴 업체들 대박 났고 메시를 광고 모델로 계약한 업체들 울게 생겼습니다. 어찌어찌 아르헨티나가 마지막 경기에 대승해서 16강 진출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광고 이미지가 안 좋은 쪽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이번 월드컵은 남미와 북유럽 팀들이 날뛸 거로 생각했는데, 축구의 패러다임이 바뀌며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가 힘겨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요.
자면 오후에 깨어날 것 같아 미리 올립니다. 그나저나 D의 의지는 도대체 뭘까요? 약 십 년 전부터 D의 의지가 무척 궁금했는데 아직도 풀리지 않아서 더러워서 내가 쓴다를 실천하고 있는 글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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