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전
후지산.
초월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계약이 오갔다. 그것을 감지한 신기는 후지산을 향해 곧게 달렸다. 자신이 가장 강해지고 초월자들이 가장 약해지는 곳에서 전투를 벌이려는 목적이다. 아까 탐식괴 때처럼 피하기 어려운 공격이 펼쳐질 것이다.
'강신사제구나.'
쫓아온 초월자는 아홉이다. 천사가 어느새 사라졌다. 그러나 신기는 굳이 감각을 넓혀 천사를 찾을 필요가 없다. 먼 곳에서 허신이 나타났다.
'종족을 희생해서 강신사제에게 힘을 주었다.'
천사가 허신을 펼친 후 종족을 모두 허신의 힘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힘을 강신사제에게 넘겼다. 아무래도 강신사제가 희생하고 천사가 살아남아 새롭게 종족을 만들어내려는 목적인 듯하다.
강신사제의 두 소매에서 천이 끝없이 나와 신기를 감쌌다. 도저히 피할 수 없었고, 종족을 희생해 힘을 얻은 강신사제의 천은 심판의 검으로도 자를 수 없었다. 신기는 급히 얼음상자 마법을 펼쳐 자신을 안에 가뒀다. 강신사제의 천이 신기를 꽁꽁 감싸자 초월자들이 신기를 공격했다. 강신사제의 천은 다른 초월자들의 공격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뭉텅이로 깎여나가고 순식간에 회복되는 기력을 확인하며 신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지산이 아닌 다른 곳이었으면 기력의 회복이 소모를 따라가지 못해 저들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강신사제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천사가 도망을 쳐도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전혀 걱정이 없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이름을 불러 다시 끌어오면 된다.
신기가 아는 일을 초월자들이라고 모를 리 없다. 신기는 데빌과 타이탄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감지했다. 저들의 속셈을 손쉽게 헤아린 신기는 얼음상자를 깨고 블리자드 마법을 몸에 둘렀다. 수비용이 아닌 공격용 마법으로 바뀌자, 강신사제의 힘이 소모되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효천, 초월자 둘이 그쪽으로 간다. 목적은 인류의 말살이다. 최대한 내가 돌아갈 때까지 시간을 끌어라.'
신기가 돌아오며 초월자들의 운명이 비틀렸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초월자들의 운명이 죽음으로 고정된다. 사고나 다툼으로 죽는 것과 달리, 운명이 죽음으로 바뀌면 부활의 기회도 거의 사라진다. 그래서 이들은 도박을 감행했다. 인류를 말살하여 D에게 힘을 주려는 목적이다.
원래 D는 신기를 죽일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신기 역시 초월자가 되었고 강한 힘을 보유했다. 만약 D가 신기를 죽인다면 이들의 운명이 구원받을 수도 있다. 신기가 죽어도 운명이 그대로 흐를 가능성이 크지만,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건가? 초월자라면 생사에 초탈해야 하는 거 아냐?'
초월자들의 공격을 블리자드가 최대한 상쇄하고 있지만, 물리력으로 하는 공격을 마법인 블리자드가 전부 막아낼 수 없다. 공격이 몸에 적중할 때마다 신기는 뼈 시린 공격을 견뎌야 했다.
강신사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폭했다. 초월자들이 공격을 멈추고 몸을 피했고, 먼지가 자욱한 곳에서 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신창이가 된 신기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설마를 소환했다. 웬만한 상처라면 바로 회복했겠지만, 초월자들이 전력으로 공격하여 남긴 상처는 몸에 그대로 남았다. 몸 여기저기가 멍들고 붓고 째지고 으깨져서 강한 통증을 신기의 뇌리에 전달했다.
전투기계는 송곳 모양의 커다란 무기 두 개를 들고 있었고 베히모스의 발톱 역시 무시무시하다. 어비스 드래곤은 온몸이 무기이고 드레이크는 강력한 방어력으로 이들에게 향하는 공격을 막았다.
'빙룡만 불러낼 수 있다면 이것들은 순식간인데.'
힘이 부족해 빙룡을 불러내지 못한다. 솔직히 빙룡을 불러낼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이들을 소멸했을 것이다. 신기는 인류의 숫자가 급감하는 게 느껴지자 초조해졌다. 데빌과 타이탄이 벌써 수백만 명의 인간을 시체로 바꿔버렸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해야 한다.'
드레이크는 요해가 여섯이다. 거의 동시에 여섯 요해를 공격해야 하기에 무척 어렵다. 남은 셋은 딱히 특별한 약점이 없다. 신기는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일단 한 놈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마와 신기가 동시에 움직였다. 설마는 자신의 두 팔을 뜯어 드레이크에게 던졌다. 두 팔이 드레이크를 묶은 사이 두 다리로 베히모스의 다리를 꽉 감았다. 그렇게 둘이 묶인 사이, 신기는 심판의 검을 꼬나 들고 송곳 두 자루를 든 전투기계를 덮쳤다.
맞공격보다 수비를 선택한 전투기계는 순식간에 변형하여 구가 아닌 타원 모양으로 변했다. 물리법칙이 너무 강하게 적용하며 법칙이 비틀렸다. 구형보다 타원형이 힘을 분산하는 데 더 유리한 상황이고, 전투기계는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깨달았다.
가진 기력을 절반 이상 쏟아부은 공격이 전투기계를 가루 냈다. 심판의 검을 이용해 기력을 방사하니 물리법칙보다 상위의 법칙이 작용하며 전투기계의 물리 방어력을 훨씬 넘어가는 공격을 쏟아부었다. 신기는 심판의 검의 위력을 얕잡아보는 바람에 기력을 20% 정도 낭비했다.
그리고 신기는 눈앞이 노래졌다. 어비스 드래곤이 몸통 박치기로 신기의 허리를 들이받았다. 생명의 위협을 받은 신기는 멀리 날아갔다. 신기가 날아가는 방향에 천사가 불타는 검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너도 죽인다.'
어차피 피할 겨를도 없다. 신기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검에 다시 기력을 모았다. 그러나 창졸간에 기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기력을 충분히 모으면 스쳐도 천사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검에 실린 기력을 전부 천사에게 투사해야만 목숨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
둘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졌을 때, 천사가 갑자기 휘청였다. 덕분에 신기의 검은 정확하게 천사의 가슴에 기력을 전부 투사했다. 천사를 감싼 천이 세차게 출렁였고, 천사는 뒤로 쓰러졌다. 신기도 불타는 검에 스치면서 화상을 입었다.
"낭아권.","광룡추."
기술명이 예전보다 간결해졌다. 가가와와 최영웅이 바닥에 쓰러진 천사를 공격했다. 옛날에는 연환권을 주로 사용하던 가가와는 강한 괴물을 상대하며 스타일을 바꿔 묵직한 일격을 날렸다. 최영웅 역시 커다란 망치에 맺힌 우윳빛 기력을 천사에게 전부 투사했다.
모든 기력을 쏟아내며 더 강력해진 가가와와 최영웅의 공격이 이미 목숨이 간당간당했던 천사를 죽음에 몰아갔다. 신기가 손을 썼다면 죽음이 아닌 소멸을 선사했을 테지만, 둘의 공격은 살짝 부족했다.
'최영웅의 운명이 바뀌었다.'
신기는 이쪽 세상으로 건너오면서, 자신이 돌아옴으로 최영웅과 제이크도 죽는 운명으로 바뀌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최영웅이 천사를 해치우는 걸 확인하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빨리 돌아가. 초월자들이 한국을 공격하고 있어."
가가와와 최영웅은 기력을 전부 소모하는 일을 자주 겪었는지 비칠거리면서도 잘 달렸다. 둘이 헬기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뒤로하고, 신기는 남은 초월자 셋을 뒤에 달고 후지산을 빙빙 돌았다. 히드라와 포이즌 드래곤도 신기에게 아무런 위협도 주지 못하자 데빌과 타이탄의 뒤를 따라 인류를 공격하러 출발했다.
어느새 3천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어차피 의뢰를 완수하면 시간을 되돌릴 생각이지만, 다른 사람의 죽음을 감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너무 많이 죽어 D가 DPP라도 얻으면 큰 변수가 된다. 신기는 도망을 멈추고 설마를 다시 불러냈다.
설마가 모습을 드러내자 드레이크가 설마를 덮쳤다. 그전에는 신기만 목표로 삼았었는데, 이번에는 드레이크가 방해꾼인 설마의 발목을 잡았다. 어비스 드래곤이 신기를 향해 몸통 박치기를 펼쳤고, 베히모스가 그 뒤를 따르며 기회를 노렸다.
'소멸의 빛.'
약해진 히드라를 죽일 때보다 열 배는 더 많은 힘을 소멸의 빛 마법에 사용했다. 그리고 신기의 몸은 아주 짧은 순간 무방비가 되었다. 그런 신기를 베히모스의 발톱이 스쳐 지나갔다. 미리 왼쪽으로 피하자고 마음먹었고 소멸의 빛을 펼치자마자 몸을 던졌다. 다행히 운이 따라 베히모스의 공격을 정통으로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잘린 오른팔이 안타깝지만, 후회할 시간도 아깝다. 잘린 손에서 심판의 검을 회수한 후 곧바로 드레이크를 향해 달렸다. 심판의 검에 야구공 크기의 기력이 모였다. 설마가 자폭하며 드레이크의 몸을 순간 얼려버렸다. 당분간 설마는 불러낼 수 없고 얼음 마법도 사용할 수 없다.
야구공을 앞으로 던지자 순식간에 여섯으로 나뉘었다. 배구공 크기의 기력 덩어리 여섯 개가 드레이크의 여섯 요해에 박힌 후 폭발했다. 그 순간 베히모스의 발톱 하나가 신기의 등에 박혔다. 신기의 몸통이 꽤 두꺼운 편이라서 발톱이 가슴으로 삐져나오지는 않았다.
신기의 모든 기력을 담은 심판의 검이 베히모스의 미간으로 날아갔다. 베히모스는 신기의 공격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힘을 신기의 몸에 박은 발톱으로 집중시켰다.
내부에서 거력이 터지며 신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너무 강한 충격을 받아 몸의 기능 대부분이 정지했다. 다행히 이곳이 신기의 영역이나 다름없고, 신기의 공격이 간발의 차이로 먼저 베히모스에게 적중했기에 죽음은 면했다.
드레이크와 베히모스가 모두 죽었고, 야만족이 캐나다와 알래스카 그리고 러시아 땅에서 한국을 향해 달려왔다. 다행히 다른 종족의 초월자들은 신기가 중태에 빠진 상황을 알지 못했다. 아무리 신기에게 유리한 전장이라도 세 초월자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신기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2억이 넘던 인류는 1억2천으로 줄었다. 오른팔이 잘리고 등에 커다란 구멍을 하나 얻은 신기는 비칠거리며 한국을 향해 달렸다. 기력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바다가 나타나기 전까지 날지도 않았다. 거신을 유지하지 못해 원래 크기로 돌아간 신기는 알몸으로 열심히 움직였다.
바다가 신기에게 자신이 가진 마나를 아낌없이 내주었다. 기력이 가득 차 있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한 톨의 마나라도 반가웠다. 해수면으로 날아가다 보니 대마도에서 난동을 부리는 포이즌 드래곤이 보였다. 기다란 혀로 잘 뭉친 액체 덩어리를 사방으로 튕겨냈고, 포이즌 드래곤과 멀어진 독액은 곧 기체 상태로 변한 후 포이즌 드래곤을 향해 움직였다. 그 과정에 일반인은 중독으로 즉사하고 각성자들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신기는 포이즌 드래곤의 독 안개를 뚫고 등에 안착했다. 심판의 검을 꽂은 후 빛의 칼날을 키워 배에 있는 요해를 찔렀다. 잠깐 꿈틀거린 포이즌 드래곤이 죽음을 맞이했고, 신기는 기력을 아끼기 위해 소멸로 몰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뭐라고 신기를 향해 외쳤지만, 신기는 귓등으로 흘리고 제주도로 달려갔다. 제주도에서는 히드라가 난리 치고 있었다. 박영광이 소환한 장군님과 수천 명의 각성자가 히드라를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다.
"다른 두 놈은?"
"육각수와 깡통은 효천이를 쫓아갔어."
괴물에 대한 공포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초월자들에게 이상한 이름을 지어주었다. 머리에 뿔이 여섯 개인 데빌은 육각수라는 별명을 얻었고 타이탄은 깡통으로 불렸다.
"빨리 둘의 위치를 찾아줘. 그리고 치유 각성자를 나한테 좀 할당해."
잘린 팔은 여전히 자라지 않고 등의 구멍도 메꿔지지 않았다. 그러나 치유 각성자들의 치료가 아무 효과도 없는 건 아니다. 기력의 사용이 조금 더 원활해진 신기는 박철에게 히드라를 처리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히드라의 아홉 머리를 동시에 잘라야 해. 미끼 스킬을 유혹으로 해서 아홉 머리를 동시에 불러와. 한 놈이 아닌 아홉을 부른다고 생각해야 해. 해낼 수 있지?"
신기가 입은 상처가 어찌나 큰지, 포이즌 드래곤도 그렇고 히드라도 그렇고 신기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졌지만, 신기는 엘프 여왕이 두려워하던 기술이 있다.
철벽 강화 각성자들이 박철의 앞에 수비벽을 만들었다. 신기는 히드라의 목을 베기 좋은 위치에 서서 정신을 집중했다. 박철이 미끼 스킬을 사용하자 히드라의 아홉 머리가 박철을 향해 움직였다. 아주 짧은 순간 아홉 머리가 박철을 향해 움직이다가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는 신기에게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신기는 거신 스킬을 심판의 검에 사용했다. 힘들게 모인 기력이 심판의 검으로 쑥 빨려 나갔다. 기력을 모조리 소모한 신기가 뒤로 쓰러졌지만, 심판의 검이 알아서 움직였다. 거대한 검이 히드라가 아주 잠깐 멈칫한 사이 아홉 개의 머리를 모조리 잘라버렸다.
박철의 지휘하에 각성자들이 히드라의 머리를 잡고 멀리 도망쳤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히드라의 몸통을 향해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신기는 이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고, 자신이 없는 사이 많은 고생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헬기 준비해주고, 둘의 위치를 빨리 알려줘. 둘을 잡고 바로 엘프 여왕과 D도 해치워야겠어. 미리 다 준비해줘."
- 작가의말
신기는 시간을 되돌릴 생각으로 알몸으로 일본에서 한국까지 달렸습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리지 못한다면 평생 흑역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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