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 여왕
아프리카.
아무리 공격해도 괴물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각성자들은 밤과 낮을 이어 계속 공격했다. 십수 명만 알고 있는 절망적인 정보를 굳이 수천 명에게 알릴 필요가 없고, 또 하나는 괴물이 약해졌을 때 탐지 스킬을 사용하면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얻어낸 정보가 희망을 키우는 정보이냐 절망을 더 깊게 하는 정보이냐다. 에릭이 얻어낸 정보는 대부분 쓸모가 없었고, 유용한 정보는 사람을 더욱 절망하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엘프 여왕까지 나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 지역은 인류에게 적대적인 환경으로 변한다는 말입니까?"
"뱀파이어 드래곤이 나타나는 순간 영지화는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 엘프 여왕까지 나오면 지구의 법칙을 새로운 법칙이 대체하게 됩니다. 저 괴물들이 정말 편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되고, 인류에게는 적대적인 환경이 되죠."
"그리고 영지화를 완전히 끝내면, 저들은 '침략'을 시작할 겁니다. 다른 괴물이 나오는 화산을 강탈하는 거죠. 그러면 영지를 넓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초월자들도 급히 지구로 넘어올 겁니다. 모든 화산을 빼앗기면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하니까요. 두 세상의 연결이 너무 확고하여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저쪽 세상이 멸망합니다. 그래서 모든 화산을 빼앗기기 전에 이쪽으로 넘어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 죽지 않는 괴물과 비슷한 존재가 총 열여섯이나 짧은 시간 안에 지구로 온다는 말이죠?"
"영지화가 끝나면 우리는 저 괴물에게 생채기도 못 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영지화가 방금 시작했고 마나가 부족해 저렇게 멍청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처리하던 저등급 괴물들도 최소 D급 각성자의 위력을 보인다고 합니다."
"저 괴물을 끌어내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화산에서 멀어지게 하자는 말씀인가요? 그런데 어떻게 저 괴물을 제압할 생각입니까? 소리만 질러도 B등급 낮은 레벨들이 기절하고, 힘도 대단히 센 편입니다."
정보가 부족하면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한다. 그런 시도를 통해 괴물이 뭘 싫어하는지 알아내고, 그걸 파고 들어가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힘이 부족해 시도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미스터 신이 얼굴을 안 보여 각성자들이 불안해합니다. 자신들이 제물로 바쳐지는 게 아니냐고 비약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안 좋은 소문도 있습니다."
에릭이 머뭇거리자 제이크가 재촉했다.
"영국 첩보부에서 입수한 정보인데, 미스터 신이 어린 여자아이를 성추행하다가 신의 힘을 빼앗겼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빠르게 단속했지만, 어쨌든 영국 첩보부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최소 중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도 알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사실 에릭이 걱정하는 건 다른 문제다. D가 아닌 신기가 이 괴물들을 불러온 장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좀 더 힘을 키우며 시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굳이 아프리카의 화산을 봉인하며 초월자를 끌어내려 했다.
D와 신기가 대화할 때 맥이 함께 있었다지만, 맥은 두 사람의 대화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둘의 대화를 들으며 D가 나쁜 놈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D의 심장 조각을 가져가지 않고 둘에게 맡겨서 철석같이 믿었었다.
"철수 준비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에릭의 말에 박영광과 제이크가 이를 악물었다. 여기 보인 7천 명의 각성자는 무척 강한 전력이다. 만약 엘프 여왕까지 나와서 전부 몰살당하면 인류는 미래가 없다. 신기가 다시 힘을 얻어 돌아온다고 해도 소각장의 운영 등에 차질이 생기며 결국 괴물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답답해진 제이크가 전화를 걸어 신기의 상황을 질문했다. 여전히 의식불명의 상태이고, 발견 당시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말만 들었다. 계획을 짜고 지휘하는 일은 늘 제이크와 박영광이 도맡았는데, 든든하게 받쳐주던 신기가 없으니 둘에게 쏟아지는 중압감이 너무 크다.
"이렇게 합시다. B급 각성자들은 멀리 보내서 상황에 따라 철수하거나 전장에 투입하고, A급만 남아서 엘프 여왕을 상대합시다."
넷은 지휘부를 간신히 설득했다. 지휘부는 무조건 괴물을 처리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견해지만, 현재 아프리카에 모인 각성자들은 등급을 떠나 스킬 효과가 무척 좋은 각성자다. 쉽게 말하면 각 나라의 핵심 전력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한꺼번에 잃으면, 현재 군대가 과한 화력을 동원해 겨우 유지하고 있는 소각장들이 단시일 내에 무너지게 되어있다.
### DUAL SYSTEM ###
아프리카.
진동 따위는 없었다. 아마 뱀파이어 드래곤이 뚫어놓은 길로 편하게 오고 있는 모양이다. A등급에 이른 각성자 일부만 남고 남은 각성자들은 꽤 먼 곳으로 철수했다. 헬기와 지프가 넉넉히 준비되어 상황에 따라 철수하거나 지원할 수 있다.
"어?"
뭐라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엘프 여왕이 화산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키가 1미터 정도 되는 작은 꼬마인데, 인간 기준으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용모다. 여왕이니 여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건 인간 기준일 뿐이다. 여왕이란 그저 인간이 부르기 편한 명칭일 수도 있다.
"공격!"
마법사들이 급히 마법을 펼쳤고 투창 각성자 둘도 재빨리 투창을 던졌다. 엘프 여왕의 작은 두 손에 잡혀있는 붉은 보석이 목표다. 누가 봐도 뱀파이어 드래곤의 핵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향해 수많은 원거리 공격이 쏟아졌다.
푸른 막이 펼쳐졌다.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얇은 막인데,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막에 닿은 투창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실체가 없는 마법들 역시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얼굴이 두꺼비를 닮은 괴물이 기다란 혀로 붉은 보석을 둘둘 감은 후 입에 넣었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보석을 삼켰을 것이다. 20미터의 괴물이 줄어들더니 소머리 크기의 둥그런 알이 되었다. 그리고 엘프 여왕은 푸른 막을 펼친 채 조용히 각성자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엘프 여왕은 공격 능력이 없습니다."
재빨리 B급 각성자들을 전부 불러왔다. 수십 혹은 수백 명씩 번갈아 가며 푸른 막을 공격했다. 원거리로 쉴새 없이 공격했고, 근접 거리에서 공격하는 것도 시도했지만, 푸른 막은 깨지지 않았다.
불멸의 안개를 두른 최영웅이 손에 든 망치에 기력을 모았다. 신기의 가르침을 받고 늘 노력했지만,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느낌은 알겠는데 그 느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망치에 기력을 최대한 담아 공격했지만, 그저 기력을 한계까지 담은 것뿐. 최영웅의 공격은 막을 출렁이게도 하지 못했다.
각성자들이 물러서고 포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최신형 탱크의 철갑도 찢는다는 미사일마저 푸른 막에 닿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에릭을 비롯한 탐구 각성자들이 기력이 차는 대로 스킬을 사용했고, 예측 각성자들도 알이 언제 괴물로 변할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별수단을 다 사용했지만, 푸른 막은 요지부동이었다. 봉인 각성자들까지 동원했지만, 푸른 막에도 화산에도 효과가 없다. 탐지를 비롯한 쓸모가 없는 스킬 각성자들도 급히 수배해서 데려왔지만, 물에 빠졌을 때 잡은 지푸라기보다도 쓸모가 없었다.
어디서 샜는지 아프리카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소문이 인터넷에서 돌았다. 그리고 신기가 어린 여자아이를 성추행하고 신의 힘을 잃었다는 소문도 무성하게 퍼졌다. 각국의 정보기관이 전력을 다해 막아내려 애썼지만, 두 가지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역병보다 더 빨랐다.
현재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공포가 전 세계를 휩쓸었고, 겨우 안정되었던 경제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정부는 며칠 전 뱀파이어 드래곤의 머리를 베고 팔다리를 뜯어내는 영상을 공개했다. 첫 괴물은 이미 처리했고, 새로 나온 괴물과 대치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새로 나온 괴물은 수비 능력만 있고 공격 능력이 없음도 발표했다.
온 세상이 술렁이고 있을 때, 엘프 여왕의 푸른 막이 갑자기 출렁였다.
"제이크. 혹시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엘프 여왕의 등에 날개가 있었나요?"
에릭의 질문에 제이크도 시력을 집중했다. 푸른 막이 시야를 살짝 방해하여, 엘프 여왕의 등 뒤에 난 투명한 날개를 어렵게 확인했다.
"없었을 겁니다. 바로 영상을 돌려보죠."
녹화한 영상을 통해, 저 날개가 서서히 자라난 것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모두가 날개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뱀파이어 드래곤이 붉은 보석을 삼키고 변한 알이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껍데기을 깨고 나오는 게 아니라 그저 모습이 변했다. 서양보다는 동양의 용에 더 가깝지만, 등에 날개가 달려 있었다. 크기는 20센티 정도로 엄청 귀여운 크기지만, A급에 이른 각성자들은 뱀파이어 드래곤이 품고 있는 거대한 마력을 어렴풋이 느꼈다.
엘프 여왕이 손가락을 내밀자 뱀파이어 드래곤이 날아가서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서서히 길이 10미터 정도로 자랐다. 엘프 여왕의 푸른 막도 뱀파이어 드래곤을 따라 커졌다.
뱀파이어 드래곤은 동양의 용처럼 몸통이 뱀을 닮았다. 그러나 머리와 날개는 오히려 서양의 드래곤이 연상될 정도이고, 특히 꼬리가 서양의 드래곤처럼 가늘어지는 형태다.
엘프 여왕은 엘프들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무늬가 있는 비늘로 덮여있고, 등에는 투명한 날개가 있다. 엘프들과 달리 얼굴은 인간과 무척 닮아있었다. 엘프들은 오관이 가운데 몰려 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데, 엘프 여왕은 그저 귀여운 아이 같은 외모다.
"당신들은 D의 수하인가? 맞는지 아닌지 나도 구분이 힘들어 질문하는 거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결국 에릭이 나섰다.
"당신은 말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미적분 계산 공식을 묻는다면 당신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할 겁니다."
"D는 두 세상을 연결하는 구멍을 뚫었다. 그래서 우리 세상은 멸망이 예정되었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으로 옮기기로 했다. 너희는 D의 힘을 사용하지만, 초월자와 권속에게 꼭 필요한 연결이 없구나."
"당신들이 그 구멍을 막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노력했지. 그런데 이쪽에서 뚫은 구멍이라 결국 이쪽에서 막아야 한다. 그런데 그걸 막을 수 있는 우리가 이쪽으로 건너와서 구멍을 막으면 다시 저쪽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에게 적대적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권속들을 보내 이 세상에 침입했다."
"당신이 구멍을 다 막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지구에서 당신이 살 수 있는 지역을 넘겨주죠."
"네 약속은 아무 효력이 없다. D가 나와서 직접 약속하게 해라."
"D가 나와서 약속만 하면 됩니까?"
"나에게 지금 영지를 넘긴다고 약속하고, 힘을 합쳐 구멍을 막아야 한다. D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와 직접 대면해서 어리석고 멍청한 짓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얼마의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너희는 D의 권속이 아닌 모양이군. D가 이 세상에 남긴 매개체가 있을 것이다. 그 매개체를 가져오면 내가 직접 D와 대화하지."
D의 심장 조각이 박살 난 후 남은 주먹 크기의 조각은 제주도에 있다. 아프리카에서 괴물을 처리하지 못하면 신기가 그 조각을 삼키기로 약조했다. 그러나 신기가 쓰러진 후, 심장 조각이 그대로 있는 걸 확인했다. 신기가 혼절한 건 심장 조각을 삼켰기 때문이 아니다.
"매개체를 가져오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런데 우리도 당신의 말을 믿기 힘들군요."
"그래서 내가 D와 대화하려는 것이다. 너희의 말에는 진실이 없고, 내 말에 깃든 진실은 너희가 판별할 능력이 없다."
"그럼 이렇게 하죠. 우리가 D의 매개체를 가져오겠습니다. 그 대가로 당신은 영지를 넓히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엘프 여왕의 앳된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D의 권속도 아닌데 꽤 많은 정보를 알아냈군. 하지만 그 약속에는 유효기간이 붙어야 한다. 영지가 확장하는 건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힘이 세지면 영지는 자연스럽게 확장한다. 그게 아니면 초월자들이 존재하는 세상에 다툼이 있을 수 없지."
"모순이군요. 우리는 결국 적대해야 할 운명이라는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너희가 내 권속이 되면 생존할 수 있다. 내 권속이 되면 절대적인 법칙의 지배만 받는다. 병에 걸리지도 않고 아픔도 모르고, 본인이 원하면 슬픔이라는 감정을 잊고 살 수 있다. 그리고 D와의 협상이 성공하면, 계약으로 내 영지를 제한할 수 있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 작가의말
엘프 여왕. 채찍을 들고 머리에 토끼 귀를 한 여왕을 상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비축분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을 올리는 시각에 6편 남았습니다. 완결까지 다 쓰면 그때부터는 더 많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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