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과 장사꾼
강원도 추가령.
만 명에 가까운 각성자들이 모인 화산구에서 하현주가 봉인 스킬을 사용했다. 제주도 때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역시 수많은 방송사가 모여들었다. 화산을 봉인하는 과정을 기록해 두려는 목적도 있지만, 신기의 말처럼 빛이 나타나지 않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이다.
신기는 오전에 울릉도에서 박철이 불러낸 괴물을 가볍게 쓸어버리고 바로 추가령으로 날아왔다. 봉인이 끝나면 서울로 가서 회의하고 저녁에는 울릉도로 돌아가야 한다. 제주도를 통해 데이터를 어느 정도 얻었지만 표본이 적어서 추가령을 봉인한 후의 상황을 확신할 수 없다.
제주도의 화산구를 봉인한 후 등대로 몰려오는 괴물의 숫자에 변화가 생겼다. 동해안은 더 많아지고 서해안과 남해안은 오히려 적어졌다. 추가령을 봉인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르기에 특별팀은 울릉도에서 최대한 많은 괴물을 불러내 소멸하기로 하고 최근 대량의 충원을 받은 지원팀은 조속한 지원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특수부대들이 화산구 주변에 진을 쳤다. 지금 하현주가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화산구는 북한의 땅이다. 비록 명목상 통일을 선포했지만, 미국이나 중국 그리고 러시아는 북한이 하현주를 납치하는 등의 허튼짓을 벌일까 봐 걱정됐는지 각성자들과 군인을 파견해서 하현주를 보호했다.
- 화산의 봉인에 성공했습니다.
머릿속에 성공했다는 목소리가 들리자 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주 역시 마력이 꽤 남아있는데 스킬이 멈춘 것으로부터 성공을 유추했다. 신기는 하현주와 눈길이 마주치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명확한 제스처에 만 명이 넘는 각성자가 환호를 터뜨렸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일정 기간 관찰하고 나서 다음 행보를 결정하겠습니다. 파티 스킬과 마찬가지로 화산의 봉인이 긍정적인 영향만 가져다주는 건 아닙니다.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미 중국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및 유럽 연맹과 협상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우선 중국은 대만을 비롯해 팽호열도와 남사군도 등 화산섬이나 해저 화산구가 많은 지역에 많은 등대를 건설하고 유지할 것을 약조했다. 그리고 일정 기간까지 일본의 오키나와 지역에도 등대를 세워서 괴물을 처리할 것을 약조했다.
러시아도 원동 지역에 등대를 구축하고 운영할 것을 약조했다. 미국 역시 많은 지역에 등대를 건설하고 유지하기로 했다. 이들은 각성자뿐 아니라 현대 화기까지 동원해서 괴물을 처리할 계획이다.
그렇게 '소각장'들을 충분히 만들어 운용한 다음 내륙의 화산을 차례로 봉인한다. 화산의 봉인 순서는 모두가 협상하여 결정하며 추가령의 봉인 계획은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화산의 봉인이 어느 만큼의 범위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치는지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봉인이 끝났지만 군대와 각성자들이 남아서 사흘을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모든 화산구가 연결된 게 아니라면 일부 화산구에서 괴물이 계속 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봉인 스킬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기에 성공 사례가 아직 부족하다.
### DUAL SYSTEM ###
서울.
강 회장은 신기와 박영광을 번갈아 보면서 속으로 가볍게 한탄했다. 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식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각성자가 되어서 병이 낫고 몸이 건강해졌는데 마음은 오히려 더 약해진 느낌이다.
"신 전무 생각은 울릉도를 남겨두고 백두산을 먼저 봉인하자는 거지? 울릉도는 각성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당분간 봉인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 자네 생각은 잘 알았네."
아직도 신기의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강 회장은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에 앞서 항상 신기의 의견을 확인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신기의 의견에 따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웬만하지 않은 것 같다.
"울릉도를 봉인하고 백두산은 그대로 두는 건 어떤가?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일본으로 향해야지. 일본에 등대를 세우고 중국과 러시아의 등대가 안정화가 이루어진 다음 백두산을 봉인하기로 하세."
김연희가 데리고 있는 연구팀이 최근에 얻어낸 결론이다. 만약 일본 해안선을 따라 등대를 세우면 한국 해안선의 부담이 훨씬 줄어든다. 그렇게 되면 일부 등대에서 각성자를 철수할 수 있고 범위 공격형 스킬을 갖춘 각성자가 부족한 문제점도 완화된다.
물론 일본에 세운 등대의 부담이 조금 크지만, 지금처럼 등대가 불러온 괴물을 처리하지 못하면 지원팀이 부랴부랴 출발해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현재의 등대 프로젝트는 외부에 선전하는 만큼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다.
미끼 스킬로 불러온 괴물을 다 처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 미끼 스킬을 사용하면 그 효과가 미미하다. 가까이 있는 괴물들이 미끼 스킬에 한 번 더 걸리고 먼 곳의 괴물들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 괴물들은 등대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다른 등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육지를 향해 움직일 수도 있다. 어느 상황이든 안정적인 수비가 흔들릴 수 있기에 원칙상 지원팀의 도움을 받더라도 당일 할당량을 다 처리해야 한다.
만약 일본 해안에 등대를 건설한다면 이런 걱정이 없다. 먼 곳의 일이어서 당일 처리하지 못해도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배 혹은 헬기로 지원팀을 빠르게 나르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날씨 때문에 지원을 가지 못할 때 해변의 수비를 강화하느라 군대와 각성자를 파견하지 않아도 된다.
즉 등대의 범위를 일본 해안선까지 확장하는 게 오히려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홍보 효과도 더 좋다. 먼 곳에서 괴물을 미리 처리해버린다고 하면 사회와 민심의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회장님, 그래도 백두산부터 봉인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백두산의 수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박영광은 구슬을 먹고 각성자가 된 후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 여전히 친일파를 싫어하고 일본도 증오하지만, 그 증오를 엉뚱한 곳으로 쏟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이 했던 경솔한 결정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북한이 우리를 적대하는 건 알고 있겠지?"
박영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등대 프로젝트 2단계를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그룹들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강 회장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강 회장은 딱 잘라 거절했다. 다른 사람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붙는 건 괜찮지만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에게 붙는 건 절대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김태풍을 다시 받아준다면 데리고 있는 각성자들이 흔들릴 수 있다. 배신하고 떠났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오면 누구라도 태운 그룹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공우진이 이미 김태풍의 자리를 차지했기에 김태풍이 돌아오면 오히려 불화만 일으킨다.
너무 칼 같은 거절에 희망을 잃은 이들은 북한과 더욱 밀착했다. 그래서 북한은 태운 그룹을 적대하는 정서가 가득 찼다. 거기에 거듭되는 북한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면서 서로 앙금이 쌓여갔다.
"만약 백두산을 봉인해주면 북한하고 붙어먹은 잡것들이 고맙다고 절할 것 같아? 오히려 힘을 키워서 일본에 진출하려는 우리 뒷다리를 잡아끌지도 몰라."
태운 그룹은 정부와의 협상을 끝냈다. 정부는 개인 혹은 단체가 일본의 땅을 수복하면 20년 동안 사유지로 인정해준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20년 후에는 원칙상 국가의 땅으로 환원되지만, 20년 사이에 정해진 금액을 내면 완전한 사유지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백두산을 봉인해주면 북한이 일본 정벌에 끼어들어서 경쟁자 혹은 방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후 보따리를 건져주고 분실한 물건의 보상까지 해주었다 해도 이보다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칼자루를 쥔 자가 상대의 몸에 묶인 밧줄을 굳이 풀어서 자기 몸에 동여맬 필요가 없다.
"회장님, 백두산을 봉인한 후 대경에 있는 석유부터 취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흑룡강에 위치한 대경 유전을 취하면 석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헬기와 차량 그리고 배를 동원할 수 있기에 모든 계획의 실행이 더 빨라진다. 그러나 강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한국보다 몇 배나 큰 땅을 언제 안정시킨단 말인가?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석유를 나는 돈 주고 사야 하네. 그리고 그 석유에서 뽑아낸 휘발유를 쓰는 건 나뿐이 아니라 상대도 마찬가질세."
박영광의 제안은 강 회장에게 바로 부결당했다. 그제야 박영광은 자신이 지금껏 태운 그룹을 국가나 정부처럼 생각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운 그룹은 분명히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인데 그간의 행적이 너무 화려해서 박영광의 착각이 지금까지 깨지지 않았다.
"박 이사, 하나 명심해야 할 게 있네. 나와 내 자식들이 보유한 지분을 다 합쳐도 태운 그룹 지분의 절반이 되지 않는다네. 만약 지속해서 그룹의 이익을 해치는 결정을 한다면 자네들은 다른 회장과 일해야 할지도 모르네."
물론 강 회장이 받는 지지도를 생각하면 웬만해서는 바뀔 걱정이 없다. 그러나 강 회장의 말을 통해 박영광은 다시 한번 자신이 몸담은 태운 그룹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했다.
### DUAL SYSTEM ###
울릉도로 향하는 비행기.
"신 전무님, 울릉도를 먼저 봉인하자는 결정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박영광의 질문에 신기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백두산을 봉인하고 울릉도를 남기자고 한 건 울릉도를 레벨업 장소로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일본에 새로 울릉도와 비슷한 레벨업 장소를 마련한다고 하니 딱히 다른 생각이 없다.
"일본 쪽에서 몰려오는 괴물이 많다고 하니 그쪽으로 뻗어 나가는 것도 이해가 되는 결정입니다. 어차피 모든 괴물을 몰아내야 하니깐요."
"그러시군요."
신기의 대답에 박영광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고 강 회장과도 다른 사람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익을 우선순위에 놓은 강 회장이나, 한국만 생각하는 자신과 다르게 신기는 오직 더 많은 괴물을 죽이고 몰아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영웅이겠지. 강 회장은 장사꾼이고. 난 그저 또라이에 불과하고.'
그간 박영웅을 지탱해주던 무언가가 흔들리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각성하기 전에 자신을 지탱하던 것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디딤돌을 만들었는데 그것 역시 지금 흔들리고 있다.
'친일파 문제를 빌미로 한국을 비난하던 북한은 지금 친일파 후손들과 손잡고 있다. 그리고 친일파의 후손인 김 회장이 돌아선 것 역시 이익 때문이겠지. 내 조상이 친일한 것 역시 이득을 위해서고, 일본 대신 미국이나 중국에 굽신거리는 작자들 역시 친일파와 다르지 않다. 친일파만 문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보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문제다.'
개인 정보를 불러왔다. 아직 D급에 소환 스킬이 중급 8레벨이다.
'난세에는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 영웅, 이순신 장군님 같은 분이 필요하다. 그러나 영웅도 결국 왕의 시기와 질투에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영웅의 앞길을 막는 왕은 차라리 사라져야 한다.'
박영광은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각을 누르지 않고 오히려 더 부추겼다.
'만약 그때 이순신 장군님이 왕이었다면 어땠을까?'
다시 신기를 바라보았다. 자기와 달리 키도 크고 몸도 건장하며 얼굴도 잘생겼다. 명문대에 수석으로 입학했으나 가족이 사고를 당하며 휴학했다고 한다. 위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찾아다닌다.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늘 괴물을 몰아낼 생각만 하고 있다.
'이 사람이 왕의 재목이 맞을까?'
박영광은 무식한 미친놈이 아니다. 꿈이 역사학자였던 박영광은 많은 역사책을 탐독했다. 군주론을 비롯한 많은 책을 통해 이상적인 왕이 어떤 왕인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광개토대왕, 가장 이상적인 왕.'
"신 전무님, 일본 진출도 그렇고 이후 새롭게 영토가 된 땅들을 안전하게 지키려면 육군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 얘기해서 구슬의 할당량을 더 높여주면 안 되겠습니까?"
타국의 각성자를 안전하게 각성시켜 주면서 구슬을 하나씩 받고 있다. 그러나 신기가 최근 정화로 괴물을 직접 처리하는 일이 드물어서 구슬의 획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한번 건의해 보겠습니다. 싸울 줄 아는 각성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죠."
- 작가의말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슬럼프 이유를 찾아낸 것 같습니다.
1. 봄이면 늘 그렇듯 건강상태가 나빠짐, 물론 병은 없음.
2.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비축분을 많이 만들고 싶은 욕심에 조금 조급했음.
3. 며칠 전 새벽에 전화를 받고 깬 후 잠을 설치고 속으로 짜증이 났었음, 물론 자신이 짜증 났다는 걸 확실히 느끼지 못해 제때에 풀지 못했음.
4. 예전에 느끼던 연재의 압박이 덜해졌음.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긴장감도 풀어진 것 같음. 너무 느슨한 것도 좋지 않으니 조금 조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음.
역시 글을 쓰면서 별의별 경험을 다 해보네요. 사실 연재에 대한 부담과 연참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서 뭔가 성장을 이뤘다 생각했는데 긴장감이 너무 풀어진 것 같습니다. 봄이면 난데없이 피곤하고 힘이 빠져서 그런 것도 좀 있는 것 같고요.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다시 힘내겠습니다. 어제 글에 달린 수천 개의 댓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물론 혼자 간직하고 싶어서 캡쳐한 후 조금만 남기고 다 삭제했습니다. 댓글이 아예 없는 것도 너무 작위적인 것 같아 대표적인 댓글만 남겼습니다.
Commen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