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적
시코쿠의 어느 도시.
신기는 보호 특성을 활성화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겁에 질렸던 사람들이 두려움을 떨쳐냈다. 아무래도 각성자마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스킬인 듯하다. 그리고 사달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보통 미끼 스킬에 걸린 괴물은 무작정 스킬 사용자를 향해 달린다. 그런데 일부 괴물이 생존자 수백 명이 있는 아지트를 공격하고 있다. 눈썰미가 좋은 박철은 손목시계 혹은 팔찌를 찬 몇몇 해골을 발견하고 외쳤다.
"형, 일부 해골 손목에 팔찌랑 시계가 있어요."
아무래도 거리의 시체를 저 거대 해골이 걷어간 모양이다. 신기는 5층 옥상에서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건물과 아지트의 중간쯤 되는 곳까지 빠르게 달려간 후 성휘의 지름을 300미터로 넓히고 정화 특성으로 바꿨다.
다행히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아서 양쪽 모두 성휘의 범위에 포함할 수 있다. 신기의 주변에서 수백의 눈사람이 나타나 거대 해골을 향해 달려갔다. 신기는 쓰러지는 괴물과 더불어 급격히 줄어드는 신성력에 눈살을 찌푸렸다.
막대한 양의 신성력과 어마어마한 회복력으로 신기는 백록담 이후 신성력이 고갈된 적이 없다. 박철이 불러온 십만이 넘는 괴물을 처리하면서도 신성력이 반 정도 남았었다. 그러나 거대 해골만 남은 지금 신성력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줄어들었다.
정화 특성을 멈춘 신기는 차오르는 신성력을 느끼며 검을 들고 거대 해골을 향해 달려갔다. 신기의 몸에는 얼음 갑옷이 살얼음처럼 덮였고 보일락말락 한 투명한 방패가 주변을 맴돌았다. 얼음 갑옷은 물리 방어, 얼음 방패는 속성 방어가 뛰어나다.
눈사람 병정의 공격을 해골은 몸을 감싼 안개로 수비했다. 안개에 닿은 눈사람은 물에 닿은 눈송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성력을 이용한 공격도, 마력을 이용한 마법 공격도 소용이 없자 신기는 해골을 향해 검환을 날렸다.
검환과 해골의 뼈가 부딪히자 마치 나무망치로 돌담을 두드린 것과 같은 소리가 났다. 분명 타격음이지만 맑지 않고 둔탁하다. 신성력과 마력과 달리 기력을 이용한 공격을 안개가 막아내지 못하자 신기는 좀 더 접근하려 했다.
그때 안개가 갑자기 촉수처럼 뻗어와서 신기의 몸을 후려쳤다. 얼음 방패가 잽싸게 움직여서 촉수를 막아냈다. 그러자 거대 해골은 촉수 두 개를 내 뻗었다. 얼음 방패는 그중 하나만 막아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신기는 촉수에 적중되었다.
얼음 갑옷은 있으나 마나 했다. 신기는 갑자기 체력이 쑥 빠진 느낌이 들어 급히 치유 특성을 깨웠다. 체력이 급하게 차오르는 걸 보니, 단순히 체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공격에 당해 느껴지지도 않는 상처를 입은 것 같다.
'지금까지 편하게 레벨업 했다고 벌 받는 건가?'
촉수를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가끔 넘어지기도 했다. 길이 여기저기 깨져서 발이 걸릴 데가 많고 신기에게 익숙한 전장도 아니다. 거기에 언젠가부터 검술은 혼자서 수련하고 정화로 쉽게 괴물을 처리하다 보니 몸을 움직이는 전투가 생소하다.
'제길. 요해부터 찾아야지.'
반이나 되는 마력과 기력을 낭비한 다음에야 신기는 정신 차렸다. 간파 스킬의 레벨이 부족한지, 아니면 저 안개가 간파 스킬도 막는 건지 거대 해골의 요해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신기는 검환을 해골의 몸 곳곳에 날려 요해를 알아보기로 했다.
우선 가능성이 가장 큰 머리로 검환을 연속 날렸다. 성휘 때문에 느려져서 수비를 못 했는지 아니면 수비를 할 필요가 없었는지 해골은 그대로 검환을 맞아주었다. 목뼈에도 검환을 날려보고 갈비뼈에도 일일이 검환을 날렸다. 그러나 해골은 안개를 움직여 검환을 막으려는 시도만 했을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눈사람 병정. 정화.'
특성을 정화로 바꾸고 눈사람 병정을 소환했다. 그리고 검환을 무차별로 마구 날렸다. 눈사람과 정화 스킬에 대항하느라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래서인지 간파 스킬이 거대 해골의 약점을 알려왔다.
'꼬리뼈 세 번째 마디?'
작은 해골과 마찬가지로 인간형인 줄 알았는데 꼬리가 달린 놈이었다. 신기는 배에 힘을 주고 크게 외쳤다.
"기력 스킬을 사용하는 원거리 공격자 없어? 꼬리뼈 세 번째 마디가 요해다."
박철이 신기의 말을 제이크에게 어렵게 전했고 제이크가 일본인에게 영어로 질문했다. 그러나 바닥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일본인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저었다.
"대장, 여기 다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해."
배 안에 간만 들어있을 것 같은 최영웅이 소리 질렀다. 역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저앉았지만, 말도 못 하는 일본인 각성자들보다는 나았다. 신기는 성휘를 넓게 펼치고 보호 특성을 사용했다.
"대장, 나도 도울게."
겁이 사라졌지만 최영웅은 감히 5층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고급에 이른 철벽과 중급에 이른 강화 스킬의 조합은 꽤 괜찮았다. 기력만 고갈되지 않는다면 좀비와 해골 무리에 파묻혀도 쉽게 죽지 않는다. 그래도 웬만큼 간이 크지 않고서는 주저도 없이 달려오기는 힘들다.
"꼬리뼈 세 번째 마디."
최영웅은 날 길이가 160센티가 되는 장검을 들고 해골의 뒤에서 깐죽거렸다.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있지만, 7층 건물 높이의 괴물이라 꼬리의 위치가 어마어마하게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팰러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줘. 여기도 도울게."
"제이크, 내가 신호 주면 네가 지휘해. 네 지휘에 따라 모두 전력으로 공격하는 거야."
제이크에게 큰소리로 외친 신기는 최영웅에게 말했다.
"투사님, 우선 꼬리 위치랑 세 번째 마디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제이크가 신기를 팰러딘으로 부르자 최영웅은 자신을 검투사라고 불러 달라고 요구했다. 스킬의 특성상 봉이나 망치와 같은 중병기가 훨씬 어울리는데, 검을 사용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은근히 신기처럼 검술 스킬이 생기기를 바라는 눈치다. 박철은 화투 사기꾼을 줄여 투사라고 불렀고 다들 검투사보다 투사라는 호칭이 더 입에 붙었다.
최영웅에게 지시를 내린 신기는 제이크에게 신호를 보냈다. 제이크는 일본인 각성자들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한 후 누가 어디를 공격할지 지시했다. 준비가 끝나자 제이크가 카운트를 시작한 후 액션을 힘차게 외쳤다.
두 종류의 바람 마법이 날아왔고 큼직한 불덩이가 날아와서 해골의 머리를 맴돌았다. 위력은 별로였지만, 신기의 눈사람 병정과 검환까지 합쳐지니 안개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결국 감춰졌던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드러냈다.
"대장, 꼬리가 엄청 길어."
"뱀이 해골이 된 건가?"
물론 뱀이라고 부르기에는 상체 쪽은 사람과 닮았다. 척추에서 이어진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어 팔만 달리면 인도 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상체에 뱀의 꼬리가 달린 나가나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와가 해골이 된 모습으로 연상하기 딱 좋다.
깡 소리와 함께 최영웅이 창백한 얼굴로 물러섰다. 신기는 빠르게 치유로 바꿔 최영웅을 치료해준 다음 다시 보호로 되돌렸다. 안개와 접촉하지 말라는 말을 깜빡 잊었다. 대등한 상대와의 전투 경험이 없어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대장, 땡큐."
신기의 '기치료' 덕분에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던 것이 해소되었다. 최영웅은 괴물의 꼬리가 얼마만큼 단단한지 알아보려고 다가가 검으로 후려쳤고 그 과정에 안개와 접촉하면서 순식간에 몸이 약해졌다가 신기 덕분에 회복했다.
'정보 단말, 정보 좀 줘.'
정보 단말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신기는 절반 정도로 회복한 신성력과 30% 정도 남은 마력, 그리고 10% 정도 남은 기력을 확인하고 암담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괴물을 상대하며 이처럼 막막했던 적이 없다.
"제이크, 이 괴물에게 봉인 스킬 사용해 봐."
딱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어 뭐든 해보는 것뿐이다. 신기의 외침에 제이크가 슬금슬금 걸어서 거대 해골에게 다가갔다. 괴물은 안개를 통해 촉수 모양으로 공격하는 것 외에는 다른 공격 수단이 없는지 촉수를 고집했다. 그리고 촉수를 두 가닥밖에 뽑지 못하는지 신기에게 하나 최영웅에게 하나 배정하고 다가오는 제이크는 가만히 놔뒀다.
신기와 최영웅이 재주 넘는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해골의 시선을 빼앗는 사이 제이크가 손을 내 뻗고 거대 해골을 향해 봉인 스킬을 사용했다. 지금까지 아무 반응도 없이 묵묵히 서 있던 해골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더러운 힘."
"팰러딘, 저 새끼 영어 하는데?"
"아냐, 난 한국어로 들었어."
제이크가 큰 소리로 최영웅에게 물었다.
"투사, 넌 어떻게 들었어?"
"한국어야. 그것도 서울 표준어."
최영웅이 한국어로 대답했고 제이크는 이해했다. 하현주와 달리 제이크는 봉인 스킬을 멈출 수 있다. 봉인을 멈춘 제이크는 신기에게 질문했다.
"팰러딘, 날 보호해 줄 수 있어? 저 뼈다귀 스네이크가 나를 싫어하는 눈치야."
"너만 싫어하는 게 아닐 거야. 죽기 싫으면 계속 스킬을 써."
제이크는 죽는 걸 두려워한다.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수많은 재물과 미국 공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게 두려워서다. 그렇기에 현재 살기 위해서 봉인 스킬을 사용해야 함을 알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부터 나를 용맹한 위저드라고 불러줘."
제이크는 신기를 가운데에 두고 해골에게 봉인 스킬을 다시 펼쳤다. 해골의 안개는 신기의 신성력 공격과 마력을 통한 마법 공격은 수비했고 기력으로 펼친 검환은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제이크의 봉인 스킬에는 아무 대응도 못 하고 안개가 점점 사라졌다.
'같은 힘이라도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 효과가 다르구나.'
신기는 마력으로 펼친 봉인 스킬이 눈사람 병정과는 달리 해골에게 효과를 보는 걸 확인하고 마력이나 신성력의 사용에 대해 더 고민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특성 혹은 마법이라는 형식이 아닌 자의로 사용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절대영도 같은 무시무시한 마법은 없는 건가?'
안개가 거대 해골의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제이크의 봉인 마법이 안개를 괴물의 몸에 봉인해 버렸다고 신기는 이해했다. 허공에서 움직이지 않고 안개로 공격과 방어만 하던 괴물이 안개가 사라지자 땅에 내려왔다.
"쉣!"
제이크는 갑자기 뱀처럼 바닥을 기며 빠르게 다가오는 해골을 피해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해골은 신기의 검환을 무시하고 건물 문을 부수며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어느새 3층까지 올라간 제이크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괴물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제이크를 느낄 수 있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몸을 부드럽게 돌려서 나오는 괴물을 반긴 건 철벽을 두르고 강화 스킬로 몸을 단단하게 만든 최영웅이다. 자칭 검투사는 검을 휘두르며 겁도 없이 정면으로 해골에게 덤벼들었다.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고개를 빳빳이 든 거대 해골이 대가리로 최영웅의 몸을 때렸다. 근육도 없는 해골이 어떻게 저런 부드러운 움직임이 나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박치기였다.
"대장, 살려줘."
신성력의 소모가 적은 걸 보니 큰 부상은 아니다. 최영웅이 처음 느끼는 통증에 큰 부상으로 오해하고 당황한 것뿐이다. 철벽이든 강화든 아픈 걸 안 아프게 해주는 효과는 없기에 최영웅의 움직임은 한껏 조신해졌다.
'눈사람 병정.'
아까와는 달리 안개가 없어 눈사람들이 해골에게 접근했다. 거대 해골의 몸에 닿은 눈사람들은 아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안개에 당했을 때와는 달리 눈사람이 사라지면서 거대 해골의 몸에 작은 눈덩이가 달라붙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성휘의 영향을 안 받는 것 같구나.'
성휘를 멈추고 확인하고 싶지만, 만약 성휘의 영향을 받아서 이만큼 느려진 거라면 큰일이다. 멈추는 순간 순식간에 둘의 포위를 뚫고 제이크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기는 이 궁금증을 나중에 풀기로 했다.
눈사람 병정은 그간 자신보다 약한 괴물을 상대하면서 진정한 능력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다 거대 해골을 만나 끝내 신기에게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선보이게 되었다. 눈덩이가 주렁주렁 달린 거대 해골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부자연스러워졌다.
"내가 유인할 테니 투사가 요해를 찾아요."
어디까지 척추고 어디부터 꼬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검환으로 확인하기에는 명중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 그리고 검환의 위력이 강화 스킬을 사용하는 최영웅의 내려치기보다 못하다.
"대장, 믿어줘서 고마워."
안개가 사라지고 거대 해골과의 전투가 두 번째 라운드에 접어들었다.
- 작가의말
안개를 밖으로 내보내면 마법사 형, 안개를 안으로 거두면 전사형이 되는 완벽한 괴물입니다. 주인공은 그간 꿀만 빨다가 갑자기 높아진 난도에 막막했습니다. 다행히 주인공 보정으로 제이크를 이용해 두 번째 페이즈로 빠르게 넘어갔습니다.
괴물의 모습에 관해 서술을 좀 더 정확히 해드리면, 인간형에서 팔다리와 골반을 떼고 척추를 따라 기다란 꼬리가 있습니다. 총 길이가 20미터 가량인데 꼬리가 16미터 정도 됩니다. 그리고 신성력에 대한 저항도 할 수 있는 고급 괴물입니다. 혹시 어딘가에 비슷한 괴물이 있다고 해도 절대 표절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제가 한 번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 모습으로 시체 조종사의 모습을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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