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봉인
시코쿠.
어깨가 곤죽이 된 신기가 쌔근거리며 잠을 자자 박철은 심술이 조금 났다. 자신은 신기가 걱정되어 잠이 전혀 오지 않는데 어깨가 부서지다시피 한 신기는 아주 달게 자고 있다. 그러나 피곤으로 야기된 심술은 곧 사라지고 두려움과 걱정이 치밀었다.
신기의 '기치료'는 박철도 잘 안다. 웬만한 치유 각성자도 신기의 기치료만큼 효과가 빠르지 않다. 완치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신기의 기치료는 언젠가부터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 아픈 곳이 순식간에 낫는 체험은 쉽사리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기를 덮은 이불을 살짝 들추고 어깨를 살폈다. 심술 많은 아이가 마구 밟은 진흙처럼 뭉개졌던 신기의 어깨가 어느새 멀쩡하게 변했다. 손가락으로 살살 건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자 박철은 대담하게 손으로 만졌다. 생채기 하나 없는 매끈한 어깨 피부가 만져졌고 심지어 딴딴한 근육의 탄력까지 느껴졌다.
'괜히 걱정했네.'
신기의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에 저항할 수 없었다. 한쪽 구석에서 제이크가 자고 있고 최영웅은 권총을 들고 대문을 지키고 있다. 세 일본인 각성자 역시 대문 가까운 곳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효주는 한참 울다가 지쳐서 신기의 오른손을 잡고 엎드린 채 잠들었다. 박철은 이불을 다시 잘 덮어준 후 조심스럽게 문으로 향했다. 최영웅은 도시바 등에게서 이곳의 일본인들이 괴물을 불러왔다고 원망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잠을 설쳐가며 일행을 지켰다. 신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느끼고 경계했다.
"형, 신기 형 상처 다 아물었어요."
최영웅은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최영웅은 신기가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좀비에게 물려 죽어가는 자신을 살린 게 신기였기에 이 정도 상처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너도 좀 자둬라. 나도 곤하면 제이크를 깨우고 잘 거다."
말은 저렇게 해도 최영웅이 안 잘 것을 알기에 박철은 빨리 자고 빨리 깨어서 최영웅을 재워야겠다고 결심했다.
### DUAL SYSTEM ###
미국.
미군은 무인 정찰기들을 보내 사고 지점과 가까운 규슈를 주로 탐색했다. 제이크를 찾기만 하면 미국은 매우 적은 투자로 세계를 호령할 수 있다. 예전에도 세계 경찰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그때는 어마어마한 투자가 필요했다.
"이게 설마 다섯 번째 괴물인가?"
안개를 온몸에 두른 거대한 괴물이 백만은 넘어 보이는 괴물을 이끌고 움직이고 있었다. 괴물이 움직이는 방향은 중국이었다.
"중국에 알릴까요?"
"알려야지. 중국이 알아내기 직전에 '우호'적으로 알려."
아직 중국의 봉인 각성자가 죽은 사실을 모르는 미국은, 중국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적대 행위에 대한 감정이 없을 수 없기에 알려는 주되 큰 피해를 강요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차라리 이 기회에 돌을 던지는 건 어떻습니까? 항공모함 둘 정도 파견하면 정신이 팔려 저 괴물을 더 늦게 발견할 겁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헌터를 보유한 국가야. 언제 어떤 쓸모 있는 헌터가 나타날지 몰라. 팰러딘과 제이크라는 마스터 카드를 잃었으니 당분간은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
인구수가 중국에 지지 않는 인도는 엄격한 계급사회다. 각성자와 군대에 많이 의지해야 하는 난세인데 귀족 계층이 태도를 바꾸지 않자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과정에 수많은 각성자가 괴물이 아닌 인간 사이의 싸움에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봉인 각성자를 확보하기 전에는 친절한 국가가 될 필요가 있어. 그 상대가 쿠바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그리고 우리 정찰기는 잠시 철수시켜."
### DUAL SYSTEM ###
시코쿠.
신기는 눈을 뜨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는 최영웅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손에 든 총은 치웠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얼음 갑옷 덕분에 권총 정도로 죽지는 않지만, 머리로 안다고 총이나 칼에 대한 두려움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른손이 축축한 느낌이 들어서 살피니 효주가 자면서 흘린 침이었다. 작은 체구에서 무슨 침이 저렇게 많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각성해서 침샘이 마르지 않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잠깐 떠올렸다.
왼팔을 움직여보니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어나서 최영웅의 안부 인사에 다 나았다고 대답한 신기는 효주를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도시바 등이 문가에서 잠들어 있고 제이크가 한쪽 구석에서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그 곁에 누운 박철은 입을 헤 벌린 채 세상모르고 숙면에 빠져 있었다.
"팰러딘, 잠깐 얘기 나눴으면 해."
한쪽에 의자 몇 개가 있었다. 둘은 의자에 앉은 후 미지근하게 식은 끓인 물로 목을 축였다. 물을 마시고 좀 더 정신이 맑아졌는지 제이크는 한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팰러딘, 회사 말인데, 나 지분 10%는 받아야겠는데."
신기는 제이크의 자신만만한 표정에서 뭔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보 단말의 도움으로 그 뭔가를 확인했다.
- 절대 봉인은 기존 봉인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마법입니다.
등급이 B급으로 오르면서 제이크의 봉인 스킬은 절대 봉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너무 많은 화산을 봉인하면 일부 봉인이 깨질 수도 있다. 남은 화산이 24시간으로도 괴물을 다 내보내지 못하면 하나 혹은 몇 개의 봉인이 깨진다.
그러나 절대 봉인은 이런 상황에서도 깨지지 않는다. 외부에 나온 괴물이 봉인을 깨지 않는다면 그대로인 게 새롭게 변한 제이크의 절대 봉인이다.
"축하해. 그런데 스킬 숙련도는 다시 올려야겠네."
안타깝게도 절대 봉인으로 바뀌면서 제이크의 스킬은 초급으로 등급이 떨어졌다. 제이크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마력이 더 많아졌거든."
한국이나 미국의 수련 환경에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신기의 계획대로 움직인다면 조만간 꽤 괜찮은 스킬 수련 환경이 마련될 것이다. 거기에 화산이 유독 많은 일본이라 스킬 경험치를 얻기도 무척 쉽다.
"제이크, 난 왕이 되고 싶어."
"팰러딘이 왕이 되면 Saint King인가?"
농담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가라앉힌 제이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장은 왕이 될 수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왕정이 무너질 수도 있어. 왜 굳이 왕이 되고 싶은 거야?"
"내 목표는 괴물을 전부 몰아내는 거야. 그런데 태운 그룹에서도 그렇고 프로메테우스에서도 그렇고, 내 목표로 곧게 가는 길이 아니라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걸었어. 내 말 이해할 수 있어?"
한국어에 영어를 섞어서 대화하기에 제이크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걱정되었다.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난 언어에 재능이 있어."
"사실 나는 국가를 세우고 이끄는 데 흥미가 없어. 내가 말하는 왕은, 내가 앞장서면 모두가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야."
"그럼 나보고 대신 관리해 달라는 뜻?"
"유식한 말로 하면, 네가 배후 흑막이고 나는 바지사장이지."
바지사장의 의미를 전해 들은 제이크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신기도 잘 모르기에 설명해주지 못했다. 2년 전이었으면 인터넷으로 간단히 검색했을 텐데, 선진국에 속하던 일본에서 현재 인터넷이 전혀 안 되고 있다.
"재밌을 것 같아. 그리고 나도 오래 살고 싶기에 괴물을 한시라도 빨리 몰아내고 싶어. 괴물이 나를 무척 싫어하는 걸 이미 확인했고, 지금부터는 더욱 증오할 것 같아."
대화를 마친 신기는 최영웅을 불러서 제이크의 스킬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고 제이크를 지켜 달라고 요구했다. 신기는 권총 정도도 위협이 되지 않기에 가장 지켜야 할 인물이 제이크이다.
"대장, 이거 어제 괴물을 잡고 나온 구슬인데, 무척 맛있어 보여."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먹고 싶어."
신기는 흰 구슬을 먹어도 되는지 정보 단말에 질문하려다가, 구슬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대답해주지 않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최영웅이 간절하게 원하는 걸 보면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6의 감각이 막 생겨나고 그런 건 아니지만, 각성한 사람들은 보통 직감이 뛰어났다.
"드세요. 제 감이 나쁘지 않다고 알려주네요."
최영웅은 신기가 번복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지 바로 달걀 크기의 구슬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누웠다. 딱히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누워있으니 아프다고 배를 안고 뒹구는 것보다 더 걱정되었다.
신기는 성휘의 치유와 보호 그리고 정화를 번갈아 사용했다. 성휘만 펼쳐도 검은 구슬을 먹고 각성하는 확률이 100%다. 그러나 흰 구슬은 처음이라 노파심에 특성들까지 번갈아 사용했다.
- 파티원 최영웅이 새로운 재주 '불멸의 안개'를 얻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영웅이 얻은 안개 스킬은 기력으로 펼치는 것으로 변형되면서 공격 기능이 사라졌다. 대신 괴물이 사용할 때와 달리 딱히 기력에 약점을 보이지 않는다. 물리력을 제외한 모든 공격에 어느 정도 대항하며 특히 각성자나 괴물의 공격에는 거의 면역 수준의 방어력을 보인다.
'어느 정도 대항한다면서 면역 수준은 모순 아니야?'
- 간단한 예로, 각성자의 화염 마법에는 거의 손해를 보지 않지만 산불과 같은 자연의 불에는 더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불에도 방어 효과가 있지만, 각성자나 괴물의 공격은 거의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기에게서 스킬의 효과를 전해 들은 최영웅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대장, 튼튼한 갑옷을 입으면 괴물 무리에 떨어져도 전혀 걱정이 없겠어."
'괴물이 최영웅을 밟으면 그건 물리력으로 쳐 아니면 괴물의 공격으로 쳐?'
- 괴물의 공격입니다.
'법칙, 법칙. 서로 다른 법칙. 그런데 명확하게 뭔지 모르겠어. 공부를 좀 더 해야 하는가?'
사람이 밟으면 물리력이지만 괴물이 밟으면 괴물의 공격으로 여기고 방어해낸다. 그리고 각성자들의 스킬을 보면 물리 법칙이 아예 안 먹히지 않지만, 또 물리 법칙에 완전히 부합되지도 않는다. 뭔가 답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명확한 답을 알아내지 못해 오히려 더 막막해지고 답답해 왔다.
"팰러딘, 최영웅이 스킬 쓰는 모습을 일본인들에게 보여주면 좋겠어. 괴물의 스킬을 빼앗았다는 것만으로 저들은 우리를 두려워할 거야."
"공포를 통한 통치는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직접적인 공포가 아닌 간접적인 공포여서 효과가 무척 좋아. 인간은 공포를 싫어하기에 간접적인 공포는 우상 숭배로 쉽게 전환되지. 저기 저 말 많은 세 일본인에게 적당히 각색해서 소문을 퍼뜨리라고 해."
의도치 않게 신기와 제이크가 획책하는 사업의 홍보관이 되어버린 셋은 최영웅으로부터 각색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신기가 괴물을 처단한 후 스킬을 빼앗아서 최영웅에게 건넸다는 말에 세 일본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는 자신들도 대단한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불타오르며 기세등등하게 밖으로 나가 이야기를 더 과장되게 퍼뜨렸다.
"팰러딘, 이제부터 우리 권위를 세워야 해. 우리가 해낸 일들도 최대한 자세하게 알려야 해. 다만 너는 그게 가능한데 나나 다른 사람들은 좀 어려운 것 같아."
"숨기지 말고 공개하면 돼. 네가 화산을 봉인해서 괴물이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마법사라고. 넌 이제 세계의 희망이야. 나는 희망의 불을 지키는 파수꾼. 파수꾼 이즈 가디언, 오케이?"
그때 최영웅이 끼어들었다.
"대장, 제이크가 위저드면 난 검투사 안 하고 기사 할래."
"오케이. 난 위저드, 캡틴은 팰러딘, 히어로는 나이트, 철은 샤먼 하면 되겠어. 기우제 지내서 비를 불러오는 그런 샤먼 말이야."
제이크와 최영웅이 신난 모습에 신기는 머리가 아팠다.
"제이크, 이런 얘기는 우리끼리만 있을 때 할 거지?"
"팰러딘, 이건 조크가 아니야. 이미지 포장은 유치하고 친근한 게 훨씬 나아. 어른들은 두려워하고 아이들이 동경하는 이미지가 가장 돈이 되는 이미지야. 그냥 재미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이해했어. 그럼 효주도 하나 지어줘. 혼자 별명 없으면 심술부릴지도 몰라. 그러면 효주의 불불이나 반달이 너를 어떻게 할지 장담할 수 없어."
"드루이드가 좋을 것 같아."
"아냐, 동양에서는 테이머가 더 잘 먹힐걸. 특히 일본에서는 말이야."
제이크와 최영웅은 맞고로 승부를 내기로 하고 결국 최영웅이 이겨서 효주는 테이머가 되었다.
- 작가의말
월드컵이 눈앞입니다. 어제 일부러 새벽 2시가 넘어서 잠들었습니다. 점심 먹고 낮잠까지 자면 완벽하게 월드컵 시즌을 맞이할 것 같네요. 물론 글은 최대한 이어가겠습니다. 혹시 하루 연재 못 하게 된다면 꼭 연참으로 주 7편 연재를 보장하겠습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