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탄전
시코쿠.
거대 해골은 머리를 세우고 신기를 향해 곧게 돌진했다. 딱히 스킬 같지는 않지만, 눈덩이를 주렁주렁 달고도 꽤 빨랐다. 그래도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서 신기는 미리 판단하고 대처할 시간이 넉넉했다.
충검과 둔검을 결합하여 검막을 펼치고 기력을 최대한 많이 쏟아부었다. 과연 마력이나 신성력보다는 기력이 잘 먹히는지 검막은 돌파당하지 않았다. 그사이 최영웅이 커다란 검을 휘둘러 측면에서 해골을 공격했다.
"대장, 꼬리뼈 중 하나가 흰색이야."
물론 최영웅은 그 흰색 뼈마디를 공격하는 데 실패했다. 검을 놓치지 않은 건 강화 스킬 덕분으로 만약 스킬 없이 이만큼 반탄력을 받았다면 손아귀가 찢어졌을지도 모른다. 딱딱한 뼈가 아니라 쇠처럼 강하고 고무처럼 탄성이 센 무언가를 때린 느낌이다.
신기는 바닥을 쓸며 채찍처럼 후려쳐 오는 꼬리를 피해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높이 뛰어도 피할 수 있지만, 아까 부드러운 동작을 보았기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꼬리가 들리면 신기로서는 피할 방법이 없다. 물론 얼음 갑옷이 충격을 막아주겠지만 멀리 날려갈 가능성이 크다. 지금만큼은 최영웅의 철벽과 강화 스킬이 무척 부러운 신기다.
'물리적 공격도 소용이 없는 건가?'
강화 스킬을 사용한 최영웅의 검격은 그 파괴력이 육백 근이 넘는다. 검을 제대로 휘두르면 최고로 팔백 근까지 이른다. 쉽게 말하면 최영웅이 팔백 근의 검을 휘두른 것과 같은 파괴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거대 해골은 수비도 하지 않고 공격한 최영웅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력을 이용한 공격만 제대로 된 타격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제이크, 잘 도망 다녀."
현재 유일하게 거대 해골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신기뿐이다. 하지만 신기의 기력도 무한한 게 아니어서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낼 수 없다. 최영웅이 가끔 공격하지만 검의 길이가 너무 길어 공격이 느렸고 최영웅의 타격 자체가 정교하지 못해 괴물의 요해를 단 한 번도 적중하지 못했다.
'눈사람 병정.'
눈사람들도 꼬리가 위협적이라는 걸 알았는지 몸통보다는 꼬리에 달라붙었다. 눈송이가 너무 많이 붙어서 움직임이 불편하여지자 해골은 머리를 번쩍 들고 몸을 세운 후 입으로 검은 연기를 토해냈다. 검은 연기가 밑으로 흐르면서 몸통과 꼬리에 붙은 눈송이를 없앴다.
'약해졌나?'
눈송이를 없앤 해골은 다시 속도가 빨라졌지만, 왠지 아까보다 공격이 가벼워 보였다. 신기는 부상을 각오하고 아까보다 적은 기력으로 검막을 펼쳐 해골의 앞길을 막았다. 해골의 대가리가 검막과 충돌한 후 뒤로 튕겼다.
'눈사람 병정.'
마력이 회복되는 대로 눈사람 병정을 소환해서 해골에게 붙였다. 그러면 해골이 검은 연기로 눈송이를 제거했다. 제이크는 계속 도망을 다녀야 했고 최영웅은 흰 뼈를 맞히는 데 거듭 실패했다. 이대로 괴물의 힘이 소진되기를 기다렸는데, 괴물의 회복력도 만만치 않았다.
쿵 소리와 함께 3층 건물 하나가 무너졌다. 해골은 제이크를 잡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제이크가 숨은 건물 자체를 공격했다. 직선으로 돌진해서 소처럼 건물에 머리를 박았다. 세 번 정도 들이받은 후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더니 어느 순간 건물이 폭삭 주저앉았다.
"팰러딘, 저 괴물이 점점 똑똑해지는 것 같아."
각성하면서 힘이나 체력이 강해지지만, 그렇다고 도망 다니는 게 쉬운 건 아니다. 땀을 잘 흡수하는 전투복 덕분에 찝찝한 느낌은 덜하지만, 제이크는 이미 땀투성이가 되었다. 육체적으로도 조금 힘들고 정신적인 압박은 무척 강하다.
"대장, 내가 한 번 막을 테니 대장이 공격해 봐."
신기는 둔검과 중검 중에서 고민하다 둔검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기력으로 공격력을 강하게 만드는 중검보다는 기력으로 공격하는 둔검이 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이크, 유인."
둘의 대화를 똑똑히 들은 제이크는 작전을 이해하고 최영웅의 뒤로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괴물을 향해 봉인 스킬을 한 번 사용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자기 몫은 어떻게든 해내는 걸 자랑으로 삼는 미국 공민 제이크다웠다.
"합!"
최영웅은 기합까지 지르며 검을 버리고 몸으로 부딪쳐갔다. 최영웅의 철벽은 괴물의 공격만 막아주고, 강화는 육체를 단단하게 만든다. 검술 스킬도 없는 최영웅에게는 사실 짧고 무거운 휘두르기 좋은 무기가 어울리는데, 최영웅의 고집으로 검을 사용하게 되었다. 물론 구울을 상대하는 실전에서는 도끼를 더 많이 사용했다. 너무 긴 검을 휘두르는 건 다른 각성자에게 민폐이기 때문이다.
맨몸의 최영웅과 충돌하자 괴물의 돌진이 잠시나마 멈췄다. 강화를 통한 최영웅의 육체가 괴물을 멈춘 게 아니라, 기력으로 펼친 철벽 스킬이 멈춘 것이다.
검술 스킬이 고급에 달한 신기는 둔검을 정확히 괴물의 하얀 뼈에 적중했다. 최영웅이 검으로 때렸을 때는 답답한 느낌의 소리가 났는데 이번에는 몽둥이로 수박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해를 공격당한 괴물이 급히 몸을 돌려 신기를 덮쳤다. 신기는 검막을 펼쳐 괴물의 공격을 막아내며 신속하게 옆으로 피했다. 덩치가 큰 괴물은 신기가 피한 방향으로 몸을 돌리다가 꼬리가 건물에 걸렸다.
마치 바늘에 딸려오는 힘없는 실처럼 꼬리가 부드럽게 건물을 쓸었다. 그때 충돌의 아픔을 참고 검을 다시 줍던 최영웅이 기회다 싶었는지 달려가서 검으로 꼬리를 힘껏 내리쳤다.
뼈로만 이루어진 꼬리에도 힘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지, 아까와는 달리 최영웅의 검격은 괴물의 꼬리에 흠집을 냈다. 최영웅이 신나서 또 검으로 내리치려고 할 때 신기가 소리쳤다.
"피해요."
부드럽던 꼬리가 다시 빳빳해졌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보인 건 아니고, 최영웅에게 전해진 느낌이다. 급히 검을 버린 최영웅은 건물 옆의 전봇대로 보이는 기둥 모양의 물체를 걷어차고 부서진 2층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숨어들었다.
어느새 제이크가 다가와 괴물을 향해 봉인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나 괴물은 제이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신기를 쫓았다. 다시 셋이 힘을 합쳐서 요해를 공격해야 하는데 전혀 작전을 짤 시간도 주지 않고 마치 광전사라도 된 듯 괴물은 신기만 죽어라 쫓아다니며 공격했다.
다행히 눈사람 병정으로 눈송이가 많이 달라붙으면 괴물은 몸을 멈추고 검은 연기로 눈송이를 없앴다. 덕분에 신기는 위기에 몇 번이나 처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제이크와 최영웅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힘겹게 따라왔다.
쿵 소리와 함께 음식점으로 보이는 단층 건물이 박살 났다. 제이크의 말대로 점점 똑똑해지는지 건물들이 신기를 쫓는 데 방해가 된다는 걸 알아채고 하나하나 부수기 시작했다. 신기가 틈틈이 검환을 날렸지만, 전혀 꼬리뼈의 요해를 맞추지 못했다.
"팰러딘, 이쪽으로 유인해."
신기가 아무 생각 없이 도망만 다니는 사이에 뭔가 준비한 듯하다. 제이크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가니 바닥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에 서서 괴물을 멈춰."
신기는 동그라미에 멈춘 후 검막을 펼쳐 괴물을 막아냈다. 그때 양쪽 건물에서 기합 소리가 들리더니 사거리의 신호등이 쓰러졌다. 밧줄에 끌려 쓰러진 신호등이 괴물의 몸 위에 떨어지며 교묘하게 엉켰다. 검을 든 최영웅이 미친놈처럼 달려왔다.
예상대로 괴물의 몸이 부드러워지며 빠져나오려 했다. 최영웅은 자신의 명중률에 확신이 있는지, 꼬리의 요해 대신 괴물의 목뼈를 노렸다. 최영웅이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체중과 힘을 모두 실어서 내려찍은 일격은 괴물의 목뼈에서 뼛조각이 부서져 나오게 만들었다.
"반달이 돌격."
효주의 간절한 외침과 함께 중형차보다 조금 더 큰 덩치의 반달곰이 괴물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몸통 박치기를 익힌 반달이는 괴물의 머리를 향해 겁 없이 부딪쳐갔다. 우득 소리와 함께 괴물의 대가리와 몸통이 분리되었다.
그때 괴물의 꼬리가 날아와서 방심한 최영웅과 반달곰을 후려쳤다. 다행히 철벽 스킬을 습관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최영웅은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철벽 스킬이 미처 상쇄하지 못한 공격력에 몸이 20미터나 날아갔다.
반달곰 역시 10미터 정도 굴렀다. 아마 철벽 스킬이 아니었다면 최영웅은 그 자리에서 몸이 조각이 났거나, 최소 100미터는 날아갔을 것이다. 효주가 급하게 반달곰에게 달려가서 강화 스킬을 사용했다. 덩치도 커지게 하고 힘도 세지게 하는 강화 스킬은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도 있다. 물론 훈육으로 이어진 동물만 치유할 수 있다.
괴물의 몸통이 머리에 다가가서 비비적거리며 떨어진 머리를 다시 붙이려 했다. 효주가 급히 불곰과 효천을 불렀다. 곰과 곰을 닮은 개가 달려와서 해골의 머리에 자기 머리를 대고 밀기 시작했다. 신기는 둘을 후려치는 꼬리를 검막으로 막아주었다.
머리를 굴리자 거기에 붙으려는 몸통도 따라갔다. 신기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꼬리의 공격을 두 번째로 막아낸 후 둔검으로 하얀 꼬리뼈를 내리쳤다.
요해가 얻어맞자 몸통은 머리를 포기했다. 효천과 불곰은 효천이 몸통만 한 대가리를 데굴데굴 굴리며 멀어져갔다. 신기의 둔검 스킬이 세 번째로 하얀 뼈에 적중했다. 검을 통해 뭔가 느낌이 왔다. 검도장에서 고무공을 때리다가 내구가 떨어진 고무공의 끈이 끊어질 때 전달되던 느낌처럼, 뭔가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이 전해졌다.
그 감각에 취한 신기는 잠깐의 방심으로 괴물의 꼬리뼈에 다리가 묶였다. 부드럽게 변한 꼬리뼈는 조이는 힘이 강하지 않지만 벗어나기도 힘들다. 꼬리 끝으로 신기의 발목을 잡은 괴물은 머리가 없는 몸통을 일으켜 세운 뒤 신기를 내리찍었다.
얼음 갑옷이 자동으로 펼쳐지며 괴물의 공격을 방어했다. 신기는 간당간당한 마력과 기력에 싸움을 끝내기로 했다. 긴 싸움에 정신적인 피로도 심했고, 위기에 닥치니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어서 이판사판으로 내린 결정이다.
남은 기력을 전부 둔검에 투입한 후 괴물의 몸통이 내려올 때 하얀 뼈를 힘껏 때렸다. 파삭 소리와 함께 얼음 갑옷이 깨지며 괴물의 몸통이 신기의 어깨를 때렸다. 신기는 왼쪽 어깨에 감각이 사라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억지로 정신을 다잡은 신기는 속으로 외쳤다.
'치유, 고정.'
치유를 펼친 후 신기는 천천히 기절했다. 기절하기 전에 파삭 뭔가 부서지는 소리를 한 번 더 들었다. 모든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신기는 이 모든 게 꿈이기를, 깨어나면 괴물 없는 세상이 자신을 반겨주기를 바랐다.
신기의 치유 덕분에 빠르게 회복한 최영웅이 검을 들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괴물이 쓰러진 후였다. 제이크와 둘이 힘을 합쳐 신기의 발목을 감은 꼬리를 벗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다행히 몇 분이 지나자 괴물의 시체가 사라졌다.
최영웅은 괴물의 시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달걀 크기의 구슬 하나를 주웠다. 흰색의 구슬은 크기도 크기지만, 약간 불길한 느낌을 주는 검은 구슬과는 달리 보기 좋았다. 효천이 다가와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지만, 최영웅은 하얀 구슬을 전투복 주머니에 넣고 효천에게 넘기지 않았다.
효주의 구슬림에 효천은 흰 구슬을 포기하고 두 곰을 데리고 검은 구슬을 주워오기 시작했다. 도시바와 혼다가 양쪽 건물 옥상에서 다른 일본인 각성자들을 훈계했다. 아까 한창 싸울 때 괴물을 불러온 신기 일행에 대한 불만을 토했었는데 괴물을 처리하고 나자 도시바와 혼다가 그에 대해 복수를 하고 있다.
괴물이 전부 처리되자 아지트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전부 달려 나왔다. 맨날 갇혀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밖으로 마음 놓고 나올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시간에 최대한 많은 쓸모있는 물건들을 찾아서 아지트로 가져가야 한다.
이런 생활이 2년 가까이 되어서 어른이든 아이든 아주 능숙하게 움직였다. 오전에 각성자가 된 나이 많은 자들이 무척 팔팔하게 움직여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이 모든 소란을 뒤로하고 제이크는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문에서 독립하고 싶은 건 진심이었고 신기와 함께 하면 큰 사업을 성공시킬 자신도 있다. 그러나 방금 상대한 새로운 괴물을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물론 사업을 해서 돈을 벌 생각은 여전하지만, 괴물이 생각처럼 멍청하고 쉬운 상대만은 아님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 사태를 이용해 돈을 벌더라도 가장 높은 가치는 돈보다 괴물의 처리에 두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했다.
그리고 B급으로 승급하면서 바뀐 봉인 스킬이 괴물을 세상으로부터 몰아내는 데 자신이 큰 몫을 할 것을 확신하게 했다.
- 작가의말
최영웅은 자신의 명중률에 확신이 있는지, 꼬리의 요해 대신 괴물의 목뼈를 노렸다.
당연히 명중 못 하리라는 확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작가의말에 밝힙니다. 깔깔 유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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