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왕
미국.
신기 일행은 헬기 등불을 운전해 세인트헬렌스 화산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규격 외 괴물인 '트랜스포머'가 나타났다. 수비할 때는 구형으로 변하고 공격할 때는 다양한 형태로 변하는 무척 신기한 로봇이다.
그러나 일행은 로봇의 정보를 볼 생각도 없이 인터넷 뉴스에 집중했다. 어차피 신기가 간단하게 처리할 거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전혀 없다.
"동남아 국가들이 합친다는데. 베트남, 미얀마 등이 중국에서 독립한 대리랑 함께 새 나라를 만든대. 태국만 빼고 거의 다 가담했네. 남미도 몇 개 나라가 통합한다는 얘기가 있어. 아프리카는 아예 하나의 국가로 통합할 의지가 있다고 해."
티벳과 인도도 정부는 따로 두지만, 국경을 없애고 국적을 서로 통용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건, 일본 정부가 한국에 통합을 요청했다.
"일본 무슨 생각이지?"
박영광은 일본이 하는 일은 모두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형, 맨날 장군님 소환하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더니 머리도 굳었네. 인구 천만도 안 되는 일본이 영토가 몇 배로 늘어나고 인구가 8천만이 넘는 한국 곁에서 기를 펴고 살겠어? 차라리 한국에 편입되어 떵떵거리며 살자는 거지."
"난 반대야. 친일파들의 논조랑 똑같잖아."
"형은 친일파 싫어하는 게 아니라 매국노 싫어한 거네?"
박영광은 신기의 태클을 무시했다. 사실 박영광도 자기감정이 뭔지 혼란스럽다.
"정부가 받아 줄까?"
"안 받아주면 중국이랑 합칠걸. 받아주는 게 차라리 낫지."
"왜 일본 놈들은 이렇게 줏대가 없어?"
"줏대 없는 게 아니고 현실적인 거야. 수천 년 동안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시달려서 사람들이 생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거지."
"일본을 받아주면 다른 국가들도 다 한국에 통합하자고 달려들걸. 얼핏 생각해도 대만과 필리핀은 바로 떠올라."
"대통령과 정부가 알아서 잘하겠지."
괴물 사태로 대량의 인구가 소실된 국가들이 통합을 고민하고 있다. 예전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시대라면 몰라도, 인구수가 적으면 시장이 작고 시장이 작으면 자본의 외면을 받는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대만이랑 일본이랑 필리핀이랑 통합하게 하는 거야. 한국은 그저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해."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니까. 그리고 한국이 중심이 되지 않고 셋이 합쳐봤자 서로 아옹다옹하다가 망하겠지."
"젠장. 너마저 알 정도면 다 안다고 봐야겠군. 지들끼리 내분만 일으키다 망하기 바랐는데."
"물구나무."
박영광의 비하 발언을 바로 응징했다. 최첨단 기술을 응용한 현역 최고의 헬기라고 하지만, 300킬로에 가까운 시속으로 움직이며 흔들림이 전혀 없을 수 없다. 물구나무를 선 박영광은 거듭 앓는 소리를 뱉어냈고, 신기는 적당히 괴롭히다 물구나무 자세를 풀어줬다.
"박철. 미끼 스킬이 고급 7레벨이 되었네?"
박철은 별장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계속 명령을 내리는 연습을 했다. 그게 수련이 되어 스킬 레벨이 빠르게 상승했다. 지금도 최영웅에게 왼발로 오른쪽 귀를 잡으라는 명령을 계속 내리고 있다.
"나는 왜 안 되죠?"
"다른 스킬도 얻어야 해. 흑인 아저씨의 팅커벨이 쓰는 최면 스킬."
대화하고 장난치는 사이에 세인트헬렌스에 도착했다. 헬기 문이 열리고 신기가 먼저 뛰어내렸다. 다시 문을 닫은 헬기는 천천히 착륙했다.
신기의 도착을 알렸는지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신기는 미국인들의 리액션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다른 세상 사람인 듯 경외하는 것도 아니고, 호기심에 차서 희귀 동물 보는 듯한 눈빛도 아니고, 함께 싸워 줄 든든한 전우를 대하는 반가움이 함성에 묻어있다.
신기는 빠르게 앞으로 달리며 기력을 주먹에 뭉쳤다. 찬권(鑽拳)으로 둥근 금속구를 날카롭게 찔렀는데, 금속구는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한 점에 집중된 힘을 넓게 분산했다. 찬권의 의미가 사라진 셈이다.
신기가 주먹을 거두는 사이, 로봇은 어느새 변신했다. 마치 흙을 파내는 굴착기와 비슷한 형태인데, 다른 점은 커다란 삽이 아닌 망치를 달았다는 것이다. 신기는 철벽과 강화를 비롯해 방어력을 올리는 많은 스킬을 사용하여 로봇의 공격을 버텼다.
신기의 체구보다 훨씬 큰 망치가 머리를 때렸지만, 스킬 덕분에 신기는 전혀 피해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영화처럼 땅에 박히는 일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로봇의 공격을 받아낸 신기는 다시 주먹을 들고 붕권(崩拳)을 펼쳤다.
'요해가 없네. 어떻게 해치워야지?'
최근 깨달은 거지만, 명확한 약점이 없으면 간파 스킬은 쓸모가 없다. 각성자나 신기 자신의 요해가 보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심장이나 머리를 요해라고 하기에 인간의 육신은 너무 나약하다. 팔목이 잘려 피를 과하게 흘려도 죽는 게 인간이어서 딱히 요해라고 할 만한 곳이 없다.
붕권이 찬권보다 효과가 좋은지 로봇은 변신하지 않고 계속 금속구 형태를 유지했다. 신기는 두 주먹을 번갈아 내지르며 붕권으로 금속구를 두드렸다. 그러나 타격을 교묘하게 분산하는 금속구를 붕권만으로는 해치우기 힘들다.
어느새 다가온 최영웅이 망치를 들고 금속구를 때리기 시작했다. 제이크의 흙 거인도 주먹을 크게 만들어 내려치기 시작했다. 박영광이 소환한 장군님이 검으로 금속구에 생채기를 냈지만, 금속구는 곧바로 완벽한 구모양으로 복구되었다.
"무적질풍쌍룡추."
역사는 반복한다. 가가와의 도움이 없지만, 최영웅은 역시 높은 오성으로 깨달음을 얻어 억지로 초식 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최영웅이 만들어낸 결과는 다른 사람이 최영웅을 비웃을 기회를 놓치게 했다.
물을 적당히 탄 우유처럼 말간 빛이 최영웅의 두 망치에 어렸다. 모든 기력을 한꺼번에 쏟아낸 최영웅은 탈진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견고함을 자랑하던 금속구가 푸딩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죽었어요."
박철이 금속구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증하자, 우렁찬 함성이 터졌다. 신기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금속구의 수비 원리를 알아내려고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런데 최영웅이 신기가 끓이고 있는 밥에 재를 뿌렸다.
나 잘했지 표정을 지은 최영웅을 보며 이가 살짝 갈렸지만, 신기는 최영웅의 관종 특성을 무시한 자신의 탓도 크다고 생각했다. 금속구의 '시체'를 뒤적거려 구슬을 찾아낸 신기는 여러 스킬로 구슬이 어떤 스킬 혹은 능력들을 줄 수 있는지 가늠했다.
"철벽 스킬 강화."
신기가 구슬을 던져주자, 초롱초롱 눈을 빛내던 최영웅이 헤벌쭉 웃었다. 누가 빼앗을세라 바로 구슬을 삼킨 최영웅을 맥이 업었다. 대략 두 달여 전에 최영웅이 업어준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다.
"지구의 평화를 위하여!"
수천 명의 미군과 미국 각성자들이 헬기로 향하는 신기 일행을 향해 구호를 외쳤다. 굳이 한국어로 외쳐 대부분 사람이 '직구이 편활 위여'로 외쳤다. 그래도 뜻은 전달되어 신기 일행도 미군 식 군례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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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삼촌, 우리 언제 결혼해요?"
처음에는 강 회장이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양심 고백을 했고, 강 회장을 어렵사리 달래서 내보내니 효주가 바톤을 이어받아 신기를 괴롭혔다. 차라리 예전처럼 아저씨라 부르며 반말을 찍찍 뱉을 때는 '싫어' 한 마디로 물리칠 수 있었는데, 이젠 그것도 힘들다.
"우리 결혼하자고 약속한 적 없잖아."
"했어요."
"언제?"
"몰라요."
너무 당당하게 모른다고 하니 대답이 궁하다. 신기는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국의 괴물이 깡그리 사라져서 이쪽 화산들 봉인하러 왔고, 한국 정부와 소각장 운영에 대해 상의하려 했는데 두 조손 때문에 일정을 다음 날로 미루기로 했다.
박영광이 직접 운전해서 가족들이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모님과 달리 동생은 게임에 빠져 아는 척도 안 했지만, 신기는 그마저도 즐거웠다. 괜히 반가운 척 기껍게 맞이하면, 뭘 사달라고 떼쓸까 걱정부터 하게 된다. 원하는 걸 다 해줄 능력이 있지만, 부모님은 동생이 삐뚤어질까 봐 걱정이 크다. 동생의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 결정하는 게 신기에게는 꽤 큰 스트레스다.
엄마의 손맛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전문 요리사의 고급 요리로 배를 불린 일행은 별장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 덕분에 별장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느라 수많은 사람이 고생했지만, 신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한 거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게 받았다.
### DUAL SYSTEM ###
일본.
신기는 화산 하나 봉인하는 데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제주도, 울릉도, 추가령, 백두산과 용강, 경박호와 오대연지를 모두 봉인했고, 현재는 일본의 화산들을 봉인하고 있다. 소각장을 이미 과하게 운용하고 있고, 미국이 5만 명의 각성자를 차출하여 일본에서 지원팀을 운영했다.
등불을 타고 다음 화산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종교 대통합에 관한 회의를 여는데, 신기가 꼭 참석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신기는 어이가 없어 왜 종교 회의를 병원에서 여느냐고 물었더니, 신기의 생가는 재개발되어 없어져서 신기가 태어난 병원에서 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아우, 병원에 간 김에 CT 찍어봐. 혹시 사리가 있으면 수술로 꺼내 경매하자. 수수료 0.5%, 어때?"
제이크의 농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왜 신구가 별장 밖으로 나가지 않는지 알 것 같다. 신기는 접근하기 부담스럽지만, 가족은 아닐 것이다. 아마 신기도 가끔 느끼는 희귀 동물이 된 기분을 가족은 외출할 때마다 느꼈으리라.
신기는 홋카이도와 규슈의 화산을 다 봉인하고 혼슈의 화산도 일부 봉인한 후에야 서울로 향했다. 신기를 기다리느라 종교 대통합 회의가 사흘 연기되었다. 그러나 신기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회의장에 나타났을 때, 복장을 지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신교(大神敎)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통합하기로 했습니다. 초대 교주는 신의 사자인 신기 경이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싫어."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나이가 지긋한 인자한 인상의 노인들이 너나없이 성호를 그었다.
"지금 성호도 제각각인데, 이런 건 통합하지 않기로 했습니까?"
"미안합니다. 새로운 성호를 만들어냈지만, 몸에 배어서 단기간에 고쳐지지 않습니다."
"교황은 당신들이 알아서 선출하세요. 신을 위해 순교도 못 한 주제에 교황이 말이 됩니까. 난 그저 신성왕(神聖王) 정도로 만족할게요."
말을 마친 신기는 회의실을 떠났다. 교황의 위에 왕을 두어 종교가 인류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일을 없애려는 게 신기의 목표다.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분위기이고, 많은 사람이 신에 의지하는 게 지금 상황이다. 종교의 순기능이 더 큰 지금이지만, 평화가 지속하면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짐작할 수 없다. 싹은 자를 수 없지만, 미리 짓밟아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 DUAL SYSTEM ###
아프리카.
엘프 여왕은 약속대로 신기에게 무기를 건넸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목검으로, 그저 보기엔 무척 물러 보였다. 그러나 신기는 기력을 쑥쑥 받아먹는 목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히드라가 도망갔는데, 그놈도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하는 건가? 계약을 좀 조정할 수 없어?"
"격이 낮은 네가 원래부터 불리한 조건인데, 계약을 수정하려면 너에게 더 불리하게 변할 뿐이야. 그리고 난 계약을 수정할 생각이 전혀 없어. 앞의 정보는 그저 내 호의라고 생각해."
'효주도 그렇고 이 꼬맹이도 그렇고. 애들은 상대하기 어려워.'
"피 빠는 네 부하는?"
"돌아가서 내 종족을 지키고 있어. 너와의 계약이 아니라면 벌써 세계수를 심고 내 종족들을 불러와야 하거든. 그러니까 다른 초월자들을 물리치는 걸 좀 더 빠르게 해줬으면 해."
"어차피 자유의지를 거세당해 개성이 전혀 없는 권속들이 아닌가. 그리고 세계수에서 열매처럼 달려 태어난다며. 마나만 있으면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권속인데 뭘 그렇게 걱정해?"
"숫자가 적어질수록 환경이 내 종족에게 적대적으로 변해. 내가 없어서 세계수가 생산을 멈췄단 말이야."
"그럼 돌아갔다가 다시 오든가."
"그러면 힘의 소모가 너무 커져. 네가 계약을 어기고 나를 해코지해도 반항할 수 없거든."
"계약을 어길 수도 있어?"
"어기면 운명이 나쁜 쪽으로 바뀌지. 초월자도 모든 운명에 저항할 수 있는 건 아니야. 특히 이 세상은 자유의지를 가진 종족이 있어 우리 세상보다 운명의 힘이 더 강해."
- 작가의말
신기는 기절해 있으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짓을 꾸미는 걸 모두 ‘감지’했습니다. 그래서 무척 심술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겁니다. 지금 신기는 로또 1등 당첨금을 부모에게 모조리 빼앗긴 것과 같은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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