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터 독점
사할린섬.
신기와 박철은 등대 모양으로 지어진 소각장 건물의 최상층에서 빵을 우물거리며 괴물이 쓰러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시체 조종사가 뜨거운 기름에 들어간 낙지처럼 꿈틀거리다가 결국 바닥에 몸을 고이 뉘었다.
"형, 영웅 형이 사냥터 독점이 아니냐고 엄청나게 성화예요."
흑룡강에서 오대연지와 경박호 화산을 비롯해 세 곳에서 사흘 씩 보낸 후 홋카이도에 가서 하룻밤 자고 바로 사할린섬으로 향했다. 미국의 프로젝트에는 제이크와 공우진 그리고 김태풍만 참여했다. 효주는 요코와 함께 거제도에서 곰과 개들을 돌보고 있고 아즈미와 가가와 그리고 최영웅은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등대에서 스킬을 수련했다.
"다음에 보면 봉인 스킬 얻으라고 해. 그럼 A급 할애비라도 만들어준다."
"헤헤, A급이 좋기는 좋네요."
우연인지 아니면 박철의 염원이 닿았는지 A급이 되면서 박철은 철벽 스킬을 얻었다. 거기에 불멸의 안개 스킬까지 얻어서 괴물 무리에 반 시간 정도 던져둬도 목숨의 위험이 없다. 반 시간 뒤에는 기력이 다 떨어져서 죽을 확률 100%지만 말이다.
"형, 혼슈에 봉인한 화산 두 개가 다시 풀렸대요."
"들었어, 신경 쓰지 마. 홋카이도의 봉인이 다 풀려도 상관없어. 근데 얘네 해저 화산 봉인은 풀 생각을 안 하네."
"혹시 물에 가라앉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해골과 달리 시체 조종사가 가볍기는 하다. 신기는 설마 그렇게 간단한 이유일까 궁금했지만, 정보 단말도 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구슬이나 주워 담자."
괴물이 전부 사라지자 등대 밖으로 나가 구슬을 끌어왔다. 차가운 해풍이 거세게 불어 끌려오던 구슬이 촉수를 벗어나 마구 굴러다니기도 했다. 꽉 잡고 오는 게 아니라 톡톡 치면서 굴리는 거라 바람이 세면 구슬 수거가 힘들어진다.
"작은 애완견들을 각성시켜 구슬을 모아오게 하면 안 돼요? 헬기 하나에 수십 마리씩 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작은 애완견이 어디 있어? 웬만큼 먹을 수 있는 건 다 잡아먹었구먼."
애견인이 많은 유럽에서도 개고기가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다. 괴물이 굳이 짐승들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지만, 겁에 질린 나머지 무작정 덤벼드는 짐승들까지 가만 놔두지는 않았다. 그리고 목장 같은 곳이 운영되지 않아 고기가 무척 귀해졌다. 목장이 운영된다고 해도 도축, 운반이 원활하지 않아 고기를 먹기 어려운 곳들이 많아졌다.
"혹시 인간이 자연을 너무 파괴해서 하느님이 벌을 내린 게 아닐까요?"
"아닐걸. 신은 기본적으로 인간뿐 아니라 세상에 관심 없어."
정보 단말로부터 들은 거니 정확할 것이다. 부모님은 불자였으나 굳이 신기에게 부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신앙이 두텁지 않았기에 정보 단말의 말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럼 신은 뭐에 관심을 가져요?"
"모르지. 다만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실 것 같아. 잡담 그만하고 스킬이나 써."
같은 구슬 두 개를 먹어도 아무 소용없다. 그래서 박철은 시체 조종사가 또 나타났음에도 시큰둥했다. 그러나 신기는 사할린에서 하루에 시체 조종사 세 마리나 나온 일을 쉽게 간과할 수 없었다. 아이슬란드와 쿠바와 멕시코의 화산 봉인이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게 아닌지 자꾸 마음이 쓰였다.
### DUAL SYSTEM ###
영국 런던.
"아이슬란드 봉인 프로젝트는 유럽 연맹의 이름으로 발안한 것이오. 그런데 왜 영국의 헌터들만 참여한다는 말이오?"
"여력이 되는 국가가 있어 헌터를 보내주면 고맙죠. 1차 선발대가 고전을 면치 못해 지원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고전은커녕 맥의 공포 스킬 덕분에 괴물을 손쉽게 쓸어버리고 있다. 맥과 미끼 스킬 각성자 그리고 고등급의 마법사와 기력 사용자들이 괴물을 때려잡느라 지칠 지경이다.
"무조건 군단급으로 보내라고 하니 문제요. 지금 상황에서 천 명이나 되는 고등급 헌터를 차출할 수 있는 국가가 몇이나 된다는 말이오."
그런 능력을 갖춘 국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각성자를 파견하는 순간 유럽 연맹은 영국파와 반영국파로 갈리게 된다. 대의를 위해 몇몇 국가들도 파병을 자제하고 있다.
"군단급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언제 서로 손발을 맞춘다는 말입니까. 우리 영국도 C급 이상의 헌터가 넘쳐나는 건 아닙니다. 제발 헌터들을 보내 영국의 부담을 덜어주기 바랍니다."
봉인 각성자가 영국의 손에 있기에 어쩔 수 없다. 거기에 아이슬란드의 화산을 봉인하면 유럽 대륙의 화산에서 더 많은 괴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아직 정확한 데이터가 없어서 각성자들을 차출해도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헌터 전력에 여유가 있는 국가는 헌터를 보내고, 그렇지 않은 국가는 물자 지원이나 합시다. 서로 자기 소리만 하다가는 날 새겠습니다."
'멍청한 자식. 그러니까 문제인 거 아니냐. 영국 헌터들이 실력을 키우는데 우리는 물자를 지원해서 돕기나 하고.'
일의 진행이 마음에 안 들지만, 총자루를 잡은 게 영국이어서 방법이 없다. 비록 영국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구멍을 견주기만 해도 곁에 섰던 사람들이 다 거리를 벌릴 것이다.
"2차 파병은 사흘 후입니다. 파병에 참여할 국가는 내일까지 지휘관 명단과 인원 구성 자료를 제출하십시오."
역시 아무 소득도 없이 회의가 끝났고 영국과 친한 몇몇 국가의 대표를 제외하고 다들 씹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씹은 표정으로 회의장을 떠났다.
### DUAL SYSTEM ###
쿠바.
제이크는 부친의 정보력에 감탄했다. 부드러운 얼굴 윤곽에 선한 눈매를 하고 생글생글 웃는 여자는 분명히 제이크의 이상형에 부합했다. 제이크가 가문의 후계자로는 적합하지 않음을 부친도 제이크도 알고 있기에, 제이크의 부친은 미인계로 제이크를 유혹했다.
"괜히 혼자서 이상한 상상을 펼치는 건 아니겠죠?"
"아무 생각 없습니다. 지쳤거든요."
부드럽게 거절하고 싶으나, 이상형에 완벽히 부합하는 여인의 얼굴을 이렇게 빨리 치우고 싶지 않다. 만약 제이크가 제이크가 아니었다면, 이런 유혹 대신 선글라스에 검은 양복 입은 남자들의 협박과 회유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축객령인가요? 아니면 빨리 침대로 가고 싶다는 암시?"
가지런한 흰 이를 자랑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모습마저 밉지가 않다. 그러나 제이크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냈다. 처음에는 단순히 반항으로 시작된 독립의 꿈이었지만, 여자 하나로 흔들릴 정도로 가볍지 않다.
"혹시 아시아에 관심 있어요? 한 달이면 봉인이 다 끝날 테니 그때까지 답을 주시면 됩니다. 그럼 너무 피곤해서 이만."
제이크는 최대한 부드럽고 대범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거절당한 여자는 풀죽은 얼굴로 일어섰다. 자신 있게 나섰는데 다 익은 오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도망친 기분이다. 평생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성공보수가 눈앞에 아른거려 술의 도움이 없으면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다.
"아빠. 나는 단순한 사업을 하는 게 아니야.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려는 거라고. 이 꿈은 팰러딘의 곁에서만 꿀 수 있는 유치하고 허황한 꿈이라고. 자꾸 날 꿈에서 깨우려 하지 마."
공우진과 김태풍은 회유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제이크는 신기를 믿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둘을 보냈다는 건, 둘이 회유되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거나 회유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 DUAL SYSTEM ###
제주도.
검은 구슬을 잔뜩 실은 헬기들이 서둘러 착륙했다. 예전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각성시켜줬는데 이제는 보름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사할린의 일정을 끝내고 다시 흑룡강으로 가기 전에 제주도에 들르는 것이다.
"김 비서님, 이거 시체 조종사를 잡고 나온 흰 구슬 세 개입니다. 필요한 것들과 바꾸든지 아니면 중요한 사람에게 복용시키든지 하십시오."
김 비서는 신기에게 공손하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식량도 부족하고 석유도 안 나는 나라가 일본까지 등대를 운영하려니 등골이 빠질 지경이다. 비록 미국과 중국 그리고 꽤 많은 나라가 도움을 주고 있다지만, 십 리 밖의 물이 눈앞의 갈증을 해결해주는 건 아니다.
"요즘 백두산으로 몰려가는 괴물이 없어서 수비 압박이 무척 줄었습니다. 일본의 등대 안정화도 곧 끝나가니 조금만 더 고생해 주십시오."
김 비서의 인사를 뒤로하고 신기는 각성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수만 명의 사람이 신기를 보자마자 환호를 질렀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자도 있고 신기를 향해 절을 올리는 자도 있고 흥분한 나머지 기절한 사람들도 속출했다.
'나쁘진 않은데 괴물을 다 몰아낸 후가 부담스럽군.'
대부분은 신기를 신의 아들이라 믿는 자들이다. 각성한 후에도 명령에 잘 따르고 괴물과 싸울 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기를 보여준다. 가끔 사람이 죽어도 이들이 나서서 신의 품으로 일찍 간 것뿐이라며 언론을 조성해서 구슬 각성자들의 사기는 늘 높았다.
신기가 중앙의 단상에 올라서자 제주도에 상주하는 각성자들이 지망자들에게 구슬을 먹였다. 구슬을 먹는 걸 멈추면 바로 가면을 씌워줬다. 구슬을 먹은 자들은 바닥에 누워 연신 헛소리를 하고 고함을 질렀지만, 가면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각성에 성공하여 일어난 자들은 도움을 주던 각성자가 파티에 가입시켰다. 수만 명이나 되는데 정보 단말은 특별한 스킬을 얻은 각성자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쉬움을 달래고 신기는 다시 헬기에 몸을 실었다. 거제도에 들러 하루 쉬고 내일 박철과 함께 오대연지로 가야 한다.
### DUAL SYSTEM ###
노팅엄.
'바다 같은데. 쿠바 쪽일까 아니면 아이슬란드 쪽일까?'
에릭은 D가 있는 장소가 바뀐 걸 확인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천지를 탐색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바닷물이어서 더 명확히 보이는 걸까? 아니면 실제로 D가 더 명확해지는 걸까?'
D의 모습과 윤곽이 더 잘 보였다. 예전에는 그저 몸집이 너무 크고 물속이어서 흐릿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에 한 번씩 확인할 때마다 D의 모습이 점점 더 잘 보였다. 장식품의 동물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후회하기 싫으면 멈춰라."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에릭은 흠칫 몸을 떨었다. 예전과 다르게 D의 말이 의미가 명확하게 들려왔다.
"지금 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뭘 하지 말라는 건데?"
"무슨 뜻인지 속으로 알 것이다. 당장 그만두어라."
"왜 그만둬야 하는지, 그리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줘."
에릭은 왠지 D가 비웃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귀로 웃음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다. 당연히 코로 비웃는 냄새를 맡은 것도 아닌데, 그런 느낌이 강하게 몰려왔다.
"네 저능한 머리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너의 생존을 보장해주겠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협상의 기본도 모르는 멍청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주고받는 것, 협상의 기본이다."
"너는 내게 줄 게 없다. 아는 것도 없고. 그러니 거래가 성립될 가능성이 없다."
에릭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넌 지금 어디인데?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할 셈이냐?"
"멈추면 멈추는 대로, 계속하면 계속하는 대로 나는 대처할 수 있다. 다만 내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에 짜증을 느낄 뿐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감정이 짜증이나 분노 따위라니, 정말 짜증 나는군."
"네 계획대로 되면 어떻게 되는데?"
"처음 계획대로면 신을 바라볼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는 힘들 것 같군. 그래도 지금 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다. 다음 기회가 또 있으니 짜증과 분노를 참으며 멍청한 네놈을 설득하고 싶지 않구나."
"설득? 네가 언제 나를 설득했다고 그래? 늘 알아듣지도 못할 단어나 뱉어냈으면서."
"갓난쟁이가 대학교수의 강연을 알아듣지 못하고 강연이 형편없다 비하하는 것과 똑같군. 나는 모든 걸 말했지만 네 수준이 낮아서 알아듣지 못한 것뿐이다."
"지금은 왜 대화가 가능하지?"
에릭은 D가 짜증을 내고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내가 수준을 낮춰서 그래. 멍청한 놈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상한 놈이 나타나서 판을 흐리는 바람에 내가 격을 낮춰 현신하기로 했다."
"너는 인류의 적이야?"
"개체로는 존재할 수 없고, 인류라는 집합을 만들어서 구성원을 계속 바꾸며 존재하다 결국 사라질 저급한 집합체. 적이라는 건 최소 대등한 자격을 갖춘 자들 사이에 성립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네가 뭘 할지 말해봐."
에릭의 도발에 넘어갔는지, 아니면 정말로 무시하고 있는지 D는 순순히 대답했다.
"모든 걸 지우고 처음부터 시작해야지. 힘을 얻어서 말이야."
- 작가의말
댓글이 많이 달린 걸 보니, 저와 달리 촉수를 좋아하는 분이 많은가 봅니다.
독일을 2:0으로 이긴 후, 중국에서 한국팀에 대한 칭찬이 대단합니다. 황색 인종도 월드컵 우승팀을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면서, 02년도 사실 심판의 판정이 그리 편파적이었던 건 아니라는 주장도 머리를 쳐듭니다. 18년 월드컵 아시아 최고의 팀은 한국팀이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선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인칭 축구 소설을 기획하고 있는데 중국 리그 위주로 써볼까 합니다. 자료 조사를 많이 했지만 여전히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게임 소설도 하나 기획하고 있는데, 지금 게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세 가지 게임을 만들려고 하는데, 머리가 몹시 아픕니다. 시장성이 없어 안 만들면 몰라도 캐릭터 간 균형이 엉망인데 수억 명이 빠지는 그런 게임은 등장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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