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와 성기사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
백록담에는 수많은 전설이 얽혀 있다. 선녀들이 목욕하는 물이라는 말도 있고 신선이 타는 흰 사슴이 뛰노는 곳이라는 말도 있다. 그 외에도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전설들이 존재한다.
수많은 화산구 중에서 백록담을 선택한 이유다. 정보 단말을 통해 서로 연결된 화산이어서 한 곳에서만 스킬을 사용해도 된다는 확인을 받았다.
"시청자 여러분, 저희는 현재 제주도 한라산의 백록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전에 등대 프로젝트 특별팀이 수많은 괴수를 불러내서 처리하여 이곳은 매우 안전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미 보름 가까이 지속한 봉인이 오늘 끝날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현주는 이미 보름째 화산을 향해 봉인 스킬을 사용하고 있다. 오전에 박철의 스킬로 괴물을 뽑아내서 처리한 후 밤늦게까지 백록담을 향해 봉인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신기는 정보 단말을 통해 정확한 수치를 알아냈다.
- 현재 화산의 봉인은 99.7%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등대 프로젝트 팀의 도움으로 각성에 성공한 세계 각국의 각성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성한 후 이곳에서 레벨업을 통해 스킬을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정부 라인에 속한 방송국은 시종일관 등대 프로젝트라 칭하며 태운이라는 두 글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가장 안 좋은 위치를 배정받은 것에 대한 심술도 조금은 들어있다.
"아, 지금 시작하려나 봅니다. 시청자 여러분, 현장에서 이 위대한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 무한한 영광을 느끼고 있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여성 리포터를 비추던 카메라도 하현주의 모습을 담았다. 이쁜 얼굴은 아니지만 화장하고 흰옷을 갖춰 입은 하현주의 모습은 무척 신비스럽게 연출되었다. 구울을 상대하는 커다란 검을 등에 멘 신기가 하현주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분장은 하지 않았지만 갑주 비슷한 차림으로 전사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하현주만 잡는 카메라가 대부분이지만 위치가 유독 좋은 카메라들은 신기까지 함께 화면에 담아냈다.
하현주는 두 손을 앞으로 뻗은 후 눈을 감으며 속으로 봉인을 외쳤다. 스킬 수련만 하느라 등급은 아직도 C급이지만, 마력 회복이 느린 대신 양이 많다. 같은 스킬을 갖춘 각성자가 없어서 위력이 강한지는 알 길이 없다.
스스로 멈출 수 없기에 마력이 다 소모된 후에야 스킬이 중단되었다. 하현주는 앞으로 뻗었던 두 손을 거두고 신기를 바라봤다.
- 99.98%입니다.
"이십 분 쉬고 다시 합시다. 다음에 성공할 겁니다."
곧 카메라들이 몰려와서 신기를 취재했다. 하현주는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의자에 편히 기대서 휴식을 취했다. 처음에는 수많은 카메라와 구경꾼 때문에 불편했는데 보름이 되니 타인의 눈은 거의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많아야 두 번의 시도 안에 봉인이 끝납니다. 아주 큰 확률로 다음 시도에서 봉인이 완성되고 제주도는 세계 최초의 봉인섬이 될 겁니다."
"제주도 봉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그러나 국민은 전문가의 말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각성자나 스킬에 관해서는 아직 베일에 싸인 부분이 더 많기에 신기의 입으로 나온 말은 더욱 무게감이 있다.
"내륙 화산을 봉인하면 해안선 수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변수가 많이 줄죠. 다만 제주도를 봉인한 후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충분한 데이터를 얻어 확신을 가진 후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화산을 봉인할 예정입니다."
"화산을 봉인하는 게 2단계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3단계나 4단계, 심지어 최종 단계까지 다 계획하고 있습니까?"
신기는 미리 준비했던 답을 머릿속에서 한 번 굴린 다음 입으로 뱉어냈다.
"2단계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땅을 확실하게 확보하는 게 목표입니다. 지금 군의 도움으로 태운 그룹의 사유지가 된 땅을 수복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마음 놓고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2단계죠. 3단계는 더 넓은 범위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데이터가 부족해 지금은 목표만 정했고 구체적이고 상세한 실행 계획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특히 다른 '영지'와 국가들과도 관련된 사항이라서 서로 신중한 협상을 거쳐 계획을 짜야 합니다."
그 후에도 레벨이나 스킬 숙련도를 묻는 물음도 있고 여자친구가 있는지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TV 앞을 떠날 시청자가 없지만, 아직도 예전 습관이 남아 있어서 어떻게라도 분량의 공백이 없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생방송이어서 난잡하기 그지없으나 이런 모습이 오히려 더 생동하게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왜 파티 정보를 일찍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외국인 기자의 질문은 꽤 공격적이었다.
"확신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좋기만 한 것도 없고 나쁘기만 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태운 그룹을 통해 파티 기능의 효과를 확인하고 부작용을 점검한 후 필요한 정보만 공개하려고 했습니다."
"미리 공개했다면 많은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신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히려 세계가 하나 되는 데 방해가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전 세계 각성자가 하나의 파티에 속해 있다면 각성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단합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국가와 지역 그리고 민족과 신앙에 따라 파티가 갈라지고 있습니다. 각성자의 스킬 대부분이 일반인에게 효력이 없습니다만, 각성자에게는 효과를 제대로 봅니다. 각성자 사이의 다툼이 점점 격해지고 있습니다. 만약 정보를 공개할 때 파티를 탈퇴하는 방법이라도 숨겼다면 다툼이 덜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현재 가장 괴물에 대응을 잘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과 영국이다. 영국은 최근 파티 정보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공개하면서 여론의 찬양을 한몸에 받았다. 신기는 세계가 주목하는 생방송에서 대놓고 영국 정부를 비난한 셈이다.
"그런 강제적인 방식으로 얻어낸 단합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생존 앞에서 의미는 무의미합니다. 저는 파티 정보를 공개한 시기가 너무 당겨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국가가 모여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의견 차이를 좁힐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여깁니다."
대부분 질문이 태운 그룹 전략기획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친 김에 새 정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기는 잠깐 말을 멈추고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심지어 마력을 회복하던 하현주도 귀를 세웠다.
"파티에 한 번이라도 들었던 사람은 파티 등급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0인데 이 등급이 5가 되면 파티를 맺어도 경험치 손실이 사라집니다. 많은 사람이 같은 파티에 속해 있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 자신뿐 아니라 같은 파티에 소속된 다른 각성자의 파티 등급 상승에도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파티에 대한 정보만 공유하지 않았을 뿐, 파티의 유용한 효과들을 공유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중국과 미국을 비롯해 많은 국가의 각성자들이 우리와 같은 파티에 속해 있으면서 파티 등급을 빠르게 올렸고 스킬 레벨도 빠르게 올렸습니다. 만약 사사로운 이득만 생각했다면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가 공동으로 마주한 미지의 적 앞에서 우리는 경쟁의식을 버리고 단합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보의 공개도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기를 추궁하던 기자는 말문이 막혔다. 신기의 대답은 기자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서 이해하고 새로운 질문을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원하는 기자들도 있어 결국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이는 TV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신기의 승리로 비쳤다.
20분이 되어 신기는 다시 하현주의 뒤로 이동했다. 대부분 카메라는 다시 하현주에게 초점을 맞췄다. 눈빛으로 신기에게 허락을 구한 하현주는 신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킬을 발동했다.
- 제주도의 화산이 봉인되었습니다.
정보 단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백록담에서 빛이 터졌다. 굳이 터졌다는 표현을 사용한 건 너무 급작스러웠기 때문이다.
- 신성력입니다.
- 첫 봉인이기에 신성력이 발생했습니다. 중요합니다.
정보 단말의 모호한 힌트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나 신기는 거기에 신경 쓸 정신머리가 없다. 호흡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 신성력이 기존의 신성력과 섞이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예전에는 안개 속에서 손을 휘젓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물속에서 손을 휘젓는 느낌이다. 기력은 아직도 옅은 안개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신성력은 물과 같은 질감으로 느껴진다. 뜻밖의 소득에 신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스킬이 고급이 되어도 신성력 걱정이 없겠다.'
중급의 성휘는 지름이 60미터다. 지금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고급으로 등급이 오를 때 스킬 범위 혹은 사거리는 5배가 된다. 지름 300미터가 되면 신성력이 부족할 것을 각오했는데 의외의 소득으로 신성력이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어머, 저 스킬 레벨이 올랐어요. 그리고 마력도 세 배가 된 것 같아요."
- 재주의 상승은 우연입니다. 마력은 순도가 높아졌습니다. 신성력의 효과입니다.
"그럼 이후 봉인하는 속도도 빨라지겠군요."
하현주와 신기의 대화는 생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퍼졌다. 하현주는 어망 결에 말이 나온 것이고 신기는 의도적으로 날린 멘트다. 원래부터 끝모르게 치솟던 하현주의 가치가 더 높이 솟았다. 봉인 스킬을 각성하는 각성자가 또 나타난다고 해도 하현주의 위상에 도전할 여지가 사라졌다.
'다음에 화산을 봉인할 때 신성력이 나타나지 않는 거지? 하현주가 아닌 다른 각성자가 봉인할 때도 마찬가지고.'
- 정확합니다.
하현주는 언변이 부족해 신기가 인터뷰를 전담했다.
"제주도 화산은 봉인되었습니다. 이제 백록담을 비롯한 모든 제주도의 화산구에서 더는 괴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희는 이곳에 커다란 등대를 세워서 오늘을 기념할 겁니다. 이곳 한라산에 세워진 등대는 아까 보셨던 신이 내린 광명을 전 세계로 퍼뜨릴 것입니다."
"아까 봉인할 때 보였던 빛이 신의 기적이라는 말씀입니까?"
"인간의 기적입니다. 인간이 이룬 기적에 신이 찬사를 보낸 것입니다."
- 일부 정확합니다.
- 충분한 DPP가 모여 전승 특성이 강제로 발동합니다. 스킬 마법을 얻었습니다.
신기는 황급히 물병을 들고 마시는 척했다. 시간을 끌며 놀란 가슴을 달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너무 예고 없이 치고 들어와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터는 빛이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최초이기에 나타난 기적의 빛입니다. 덕분에 저도 그렇고 하현주 씨의 마력도 몇 배가 되었습니다. 특별팀은 급히 추가령으로 이동해서 만약을 대비해야 하니 인터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태운 등대에서 모두에게 알려드릴 겁니다."
'시스템, 호환성, 법칙, DPP, 신성력. 기본 뼈대는 갖췄고 살을 붙여야 할 것 같은데.'
원래 신기의 입으로 발표하려고 했던 내용은 보도자료로 언론과 방송사들에 전해지게 되었다. 신기는 헬기장으로 이동하며 개인 정보를 띄웠다. 스킬 성휘 옆에 마법이라는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 하현주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사용할 수 없는 스킬이다.
그 후 사흘 동안 전 세계는 인류 유사 이래 가장 재미없는 생방송을 보게 되었다. 24시간 카메라는 제주도의 화산구들을 분할화면으로 비췄다. 마치 CCTV 화면을 보는 듯한 생방송이지만 시청률은 유례없이 높았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후 전 세계는 화산을 봉인할 수 있고 다시 안전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승리는 언젠가 인류에게 속할 것이라는 신념이 생겼다.
전 세계로 생방송을 하면서 신기와 하현주는 성기사와 성녀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백록담에서 터진 빛이 신기에게 빨려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 일부는 신기를 교황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검을 등에 멨고 나이도 젊기에 성기사라는 호칭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종교 단체들이 너나없이 태운 그룹에 연락을 취했다.
한편 신기는 하루빨리 A급이 되기 위해 레벨을 빠르게 올릴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다. 아마 A급이 되면 하현주가 그랬던 것처럼 마법이 뭔가 다른 스킬로 변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혹시 봉인처럼 무척 유용한 스킬이 아닐지 크게 기대했다.
- 작가의말
저는 글 쓰는데 슬럼프라는 게 있다는 걸 믿지 않았습니다. 이미 결말 다 정해놓고 줄거리 다 만들었는데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게 웬 말입니까.
그런데 어제 3천 자 정도 썼다가 다 지웠고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했습니다. 이 글뿐 아니라 동시에 연재하는 무협도 한 글자도 손대지 못했습니다. 이유도 딱히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가 손가락으로 쳐낸 단어와 문장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명 내용은 내 머릿속에서 생각한 내용인데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와 문장에서 표현하려는 의도가 확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혹시 같은 일이 발생하고 비축분이 없다면 하루 정도 연재를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컨디션 좋고 글이 잘 써지는 날에 연참하겠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비축분이 있어서 버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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