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의 정체
멕시코.
"좋은 계획이 있습니까?"
머리가 셋 달린 뱀은 덩치가 크고 방어력이 높고 회복이 빠른 걸 제외하면 별다른 스킬은 없었다. 현대 무기에 의한 공격도 각성자의 공격도 묵묵히 맞아주기만 했고, 미국이 몰래 화학무기도 사용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요해가 목뼈입니다. 여길 공격할 방법을 최대한 고민해 보세요."
하필이면 뱀의 몸에서 가장 두꺼운 부분이다. 지금까지 어떤 공격에도 비늘 한 장 떨어뜨리지 않은 뱀인데 깊숙이 숨겨진 목뼈를 공격하라니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온다.
미국은 전 세계의 인재가 모여드는 곳이고,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성과만 내면 존중해준다. 그래서 미국에서 괴물을 연구하는 자 중에 괴짜가 엄청 많다.
"로봇을 입안으로 들여보내는 거야. 목구멍에 도착한 다음 드릴로 팔다리를 고정한 후 기관총으로 난사하면 돼. 정 안 되면 폭탄을 가지고 들어가 터뜨려도 되고."
"뱀을 꽉 잡아둔 다음 미사일을 쏘면 돼. 목뼈를 향해 미사일 백 발을 쏘면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버텨내기 힘들걸."
"뱀을 뭐로 잡아둬? 네 그 혓바닥으로?"
"머리 세 개를 철사로 묶은 다음 각성자들이 당기면 돼. 듀라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배 쪽에 항문이 없을까? 입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안전하게 항문을 통해 안에 들어간 다음 목뼈를 찾아서 처리하는 거야."
'미국에는 각성자가 매우 많을 텐데 왜 괴물의 약점을 찾아내지 못했지?'
신기는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말을 귀로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신기가 매우 큰 오해를 하는 것이, 모든 국가의 사정이 한국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은 신기 덕분에 파티 기능을 이용해 초반부터 비전투 각성자들의 스킬 레벨에 신경 썼다.
그러나 미국이나 중국은 군대에 더 의지했고, 각성자의 중요성을 확인한 후에는 전투형 각성자들을 전장에 내보내 레벨업 시키는 데 주력했다. 뒤늦게 파티 기능을 영국이 공개하여 비 전투형 각성자들을 모아놓고 스킬 수련을 시켰지만, 그때는 많은 각성자들이 전투에 동원되어 대형 파티를 구성하기 힘들었다. 한국처럼 땅이 작으면 모으기도 편리한데, 중국이나 미국이나 그게 어렵다.
그리고 신기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도 사실 신기에게 의지하고 있고 영국도 에릭 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면이 크다. 지금 각성자들의 발전 속도는 사실상 D의 예측보다 훨씬 빠르다. 그런데도 부족해 보이는 건, 화산 봉인으로 괴물의 출현 속도가 너무 빨라졌기 때문이다.
신기가 아니라면 파티 기능은 더 늦게 발견되어야 한다. 봉인 스킬을 얻어도 스킬 레벨이 부족하여 봉인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다고 해도 화산 하나를 몇 달씩 잡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수만 명이 파티를 이루며 스킬 레벨이 쑥쑥 올라갔고 스킬 효과도 혼자 있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러다 중국의 막무가내 봉인으로 난리가 났고 덕분에 시체 조종사가 예정보다 일찍 나타나게 되었다. 그 시체 조종사를 처리하며 제이크의 마력이 부쩍 늘었고, 그 뒤로도 시체 조종사를 여럿 처리하며 마력이 원래의 몇 배가 되었다. 그래서 원래 '상식적'인 진행보다 몇 배는 빠른 진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신기는 지금 미국 각성자들의 부족함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거기에 D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음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D가 Doctor의 이니셜인가 고민하고 있다.
삼두사를 처리할 방법을 토론하던 전문가들은 어느새 왜 괴물에게 현대 무기나 화학 무기 그리고 레이저 등 무기들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지 토론하기 시작했다. 토론의 방향이 바뀌자 신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까 대화는 그나마 알아들었는데, 지금 나누는 외계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 DUAL SYSTEM ###
노팅엄.
"D의 행방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에릭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알이 빨갛고 눈 밑에 기미가 거뭇하다. 맥 역시 에릭과 크게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술을 덜 먹어서인지 눈에 초점이 흐리지는 않았다.
"에릭, 네가 알아낸 걸 나에게 알려줘."
맥이 용기를 냈다. 에릭이 알아낸 진실을 맥에게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 맥은 거부했다. 이유는 딱히 없고, 그저 듣기 싫었다.
"우선 D는 D야. 인간의 언어로 바꾸면 무수한 이름이 나올 것이지만, 가장 객관적인 이름은 D. 물론 D도 D의 의미를 모두 함축시키진 못했지만 말이야."
맥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에릭이 다음 말을 이어갈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공룡이 왜 멸종했는지 알아? D가 그랬어."
D는 초월자다. 불멸에 닿지 못했지만, 영생은 이루었다. 사고가 아닌 자연적인 노화로 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초월자들이 많았어. 그런데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 거야. 초월자들은 세상을 떠나거나 서로 싸워서 초월자의 숫자를 줄이는 것으로 생존을 꾀했어. 그리고 결국 D가 홀로 남게 되었지. 죽은 초월자를 전부 흡수해서 D는 D가 되었고 D가 아니게 되었어."
맥은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솔직히 뭔 개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에릭은 마지막에 알아듣기 쉽게 요약해 줄 것이다.
"D는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며 해결책을 찾았어. 왜냐면 세상은 D마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갔거든. 결국, 시간이 촉박한 나머지 D는 도박하는 심정으로 모험했어. 마나가 사라져가는 지구와 마나가 풍부한 세상 사이에 구멍을 뚫어 마나를 가져오려 했던 거야."
D의 시도는 두 세계에 재앙이 되었다. 마나가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며 두 세계가 뒤죽박죽되었다. 그 과정에 지구의 생명체는 다 사라졌고 다른 세상의 생명체들도 이쪽 세계로 빨려와서 죽으며 흔적을 남겼다.
"두 세계에 뚫린 구멍은 빠르게 사라졌어. 그게 우주의 법칙이고 세상의 법칙이거든. 그리고 생명이 사라진 세계는 마나를 소비하는 자가 없어 D가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
그러나 법칙에 따라 세상은 새로운 생명체를 배출했다. 그리고 D는 그때마다 화산을 터뜨리고 지진을 불러오고 홍수나 가뭄을 내려 생명체들을 말살했다. 그러다 드디어 마나를 소비하지 않는 생명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인류야. 개체로는 존재할 수 없고 인류라는 이름으로 집합을 이루어 구성원을 갈아치우며 생존하는 저급한 집합체."
D는 인류의 진화와 성장을 관찰하며 때로 간섭도 했다. 그러다 인류와 세상의 운명을 변화시키면 DPP가 쌓인다는 걸 발견했다. 드래곤 파워 포인트, 운명에 유일하게 간섭할 수 있는 초월자인 용의 힘이다.
"D는 이 DPP라는 걸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로 했어. 잘하면 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예전에 뚫었던 구멍을 다시 비집었어. 그리고 뒤죽박죽이 된 저쪽 세상에서 괴물들을 불러온 거야."
D는 다른 세상의 괴물들을 불러오면서 아주 원시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일부 인간에게 힘과 스킬을 부여했다. 초월자라고 해도 법칙을 거스를 수 없기에 이미 각성한 자들로부터 힘을 다시 빼앗는 건 불가능하고, 구슬 각성자와 같이 시스템에 부하를 주는 자들도 어찌할 수 없다.
"D의 생각은 간단해. 괴물을 불러옴으로 인류의 운명을 멸망으로 바꿔버리는 거야. 그러면 괴물을 불러온 D는 무척 많은 DPP를 얻게 되지. 그리고 인류의 운명이 멸망으로 바뀌는 순간, D는 인류를 구원할 생각이야. 멸망의 운명으로부터 인류를 건져내며 더 많은 DPP를 또 얻게 되는 것이지."
세상의 운명을 두 번 바꾸어 얻는 DPP로 신이 될 수도 있다고 D는 생각했다. 만약 신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DPP로 자신의 격을 높일 수 있다. 초월자가 공무원처럼 등급이 딱딱 나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격이 나뉜다. 실패하더라도 인류 멸망의 DPP는 얻을 수 있기에 D는 잃을 것이 없다.
"하지만 D는 구멍을 뚫은 후, 괴물들이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 발견했어. 괴물들은 성급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동시에 나타났어. 실수나 미끼 스킬로 미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괴물이 있지만,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라 사람들은 누군가의 장난으로만 치부했지."
그대로 흐르면 인류를 구원할 시간도 없이 멸망으로 끝난다. 그래서 D는 미리 맥을 통해 영국의 각성자들을 키워주었다. 맥이 유일한 A급 각성자여서 영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여덟 종족 최강의 존재들이 모두 현신하면 D도 위험해. 그들이 힘을 합치면 D를 소멸시킬 수도 있어. 그러면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질 거야. 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건 무척 끔찍한 일이라고 느꼈어."
영국을 키워 괴물에 대해 어느 정도 대항력을 키웠다. 그리고 지구의 군대도 D의 예상보다 잘 싸워줬다. 그런데 신기가 나타나서 화산을 봉인하며 고등급 괴물의 출현을 앞당겨버린 것이다.
비록 예상과 달리 신기가 고등급 괴물을 쉽게 해치웠으나, 대부분 감정이 사라져서 인내나 끈기 같은 미덕은 전혀 없는 D는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흐름에 참을성이 바닥났다. 그래서 현신하여 이 사태를 해결하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D는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D가 우리를 직접 죽이면 DPP가 생성되지 않아. 그건 모든 인간을 살해한 것이지 인류를 멸망시킨 게 아니야. 세상이 인류가 생존할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어야 인류의 운명이 다한 것으로 치거든."
현신하기 위해 D는 백두산 천지에서 몰려오는 시체 조종사를 통해 마나를 보충했다. 그러다 신기가 자신의 힘에 회의를 느끼고 레벨업을 하느라 괴물 밀도를 확 낮춰버리자 다시 고등급 괴물을 찾아 천지를 떠나버린 것이다.
"에릭, 네 말대로라면 D는 지금 남미에 있겠네.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고등급 괴물은 없잖아."
"맥, 넌 천재야."
다른 사람의 가슴에 박힌 대못보다 자기 손끝에 박힌 가시가 더 걸리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에릭은 지금까지 D가 아이슬란드에 뭔가 수작을 부리려 한다고만 생각했지, 미국이 쿠바와 멕시코의 화산을 봉인한 사실에 대해서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빨리 미국에 연락해."
"에릭, 팰러딘이 지금 멕시코에 있어. 아무래도 D의 위치를 짐작하고 우리 요청을 거절한 것 같아."
### DUAL SYSTEM ###
멕시코.
삼두사가 거느린 부하는 그새 늘어서 3백5십만이 되었다. 신기는 삼두사가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월급을 줄 필요도 없고 먹여주고 입혀줄 필요도 없다. 지시를 내릴 일도 없이 그저 앞장서면 부하들이 충성스럽게 따른다. 그러나 신기는 삼두사가 부럽다는 생각을 몇 분 만에 접어야 했다.
삼두사의 몸길이는 300미터 정도로, 생물학자들이 해부하고 싶어 미칠 지경으로 불가사의한 모습을 보였다. 머리가 세 개나 달려있고 하나하나가 화물트럭보다 크다. 비록 자주 보아오던 뱀처럼 자연스럽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기다란 몸을 꿈틀거리며 잘도 기어 다녔다.
그때 몸길이가 100미터 정도로 보이는 괴물이 나타났다. 신기의 눈에는 날개 넉 장이 달린 뱀으로 보였지만, 누구의 눈에는 기린으로 보였고 누구의 눈에는 박쥐로 보였으며 누구의 눈에는 처음 보는 기괴한 생물로 보였다.
유일한 공통점은 괴물의 크기와 푸른색 비늘로 덮였다는 것뿐이다. 허공을 날던 괴물이 급하게 하강하더니 삼두사의 몸통을 물고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 300미터 길이에 몸무게 1만8천 톤으로 추측하는 거대한 삼두사가 전조도 없이 나타난 괴물의 입에 물려 축 늘어진 채로 하늘을 날았다.
현실성 없는 장면에 모두 멍을 때리고 있을 때, 3백50만이나 되는 괴물들이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군인과 각성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신기는 성휘를 펼치고 앞으로 나서면서도 눈길을 새로 나타난 괴물에게서 떼지 않았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삼두사의 몸통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안 되어 삼두사를 문 괴물은 바다로 입수해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파티를 맺지 않아서 혼자구나.'
신기 혼자 왔고 미국 각성자들의 파티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박철과 둘이서 근래 많이 움직였기에 스킬의 위력과 범위에 대해 익숙하여 당혹스럽지는 않다.
'경험치 독식이네.'
- 작가의말
D의 정체는 에릭이 탐구 스킬로 알아낸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을지 몰라도 틀리지는 않죠.
요즘 연독률을 보면 글이 좀 지루해진 것 같네요. 안타까운 건, 지금까지 마련한 비축분이 비슷한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설정을 풀기 시작해서 정보량은 많습니다. 흥미로운 설정일 거라 장담 할 수 있습니다만, 재미는 큰소리 못 치겠네요.
그래도 이번 글까지 완성하면 하나의 설정이 틀을 잡습니다. 언젠가 이 설정으로 재밌는 글을 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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