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것들
태운 호텔.
일의 진행은 신기의 구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글로벌 회사의 설립은 암초에 걸렸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신기는 자신의 신용등급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신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을 것이고, 신기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 목적이나 의도에 대해 의심하였을 수 있다.
미국은 유럽까지 끌어들여 MOU를 체결했다. 불가사의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서로 도와주고, 각성자를 대상으로 과도한 경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양해각서다. 신기는 어쩔 수 없이 각국 대표들 앞에서 선지자 연기를 한 번 또 해야 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까지 뛰어들자, 신기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흐름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래도 막막하던 예전과는 달리, 자신만 알고 있는 정보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쓸 수 있을지 명확하게 알고 있어 그렇게 심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 강 회장의 생일 축하연에 초대받았다. 많은 사람과 가볍게 인사만 나눈 후, 신기는 박영광과 함께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 신기가 강 회장이 내세운 허수아비 혹은 어릿광대 정도로 짐작하고 있어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용자가 존재했으니,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박영광의 얼굴 수비를 뚫고 신기의 허벅지를 콕콕 찌르는 존재가 나타났다.
"아저씨, 이름이 뭐야?"
양 볼에 심술이 가득 찬 효주도 무척 귀여웠다. 신기는 볼을 콕콕 찌르고 싶은 충동을 참고 정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름 묻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해야지."
"아저씨 나 몰라? 아저씨 나쁜 사람이야?"
나 모르는 사람은 낯선 사람, 낯선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되는 나쁜 사람. 재벌 집 아이도 낯선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는 교육을 생략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저씨는 신기라고 해. 신기하지?"
효주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놓고 비웃었다. 살짝 상처를 받은 신기는, 혹시나 하여 준비했던 선물을 꺼냈다. 손가락 길이의 곰 인형은 가죽을 기워 만들고 안에 탄성 솜인지 뭔지를 넣어 촉감이 무척 좋았다.
"효주 곰 인형 좋아하지? 아저씨가 선물로 하나 줄게."
곰 인형을 받아 들고 찬찬히 살피던 효주는, 곧바로 흥미를 잃고 바닥에 팽개쳤다.
"난 호랑이가 좋아. 곰은 뚱뚱해서 싫어."
'이건 뭐지? 애들은 취향이 마구 바뀌는 건가?'
효주가 관심을 박영광에게 돌리고 있을 때,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왔다. 화장은 전문가의 솜씨로 보였지만, 뛰어난 용모는 아니었다. 화려하게 덕지덕지 치장은 하지 않아 소박한 듯 보였지만, 몸에 걸친 옷이나 장신구 하나하나가 수백만은 가볍게 호가하는 귀물이었다.
"효주야, 엄마랑 저쪽에 가자."
"꺼져."
효주의 폭언에도 여자는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심계가 대단한 여자거나, 자주 들어 이미 습관 된 것이 분명하다.
"말 안 들으면 유치원 안 보내줄 거야."
눈물을 글썽이며 여자 손을 잡고 떠나는 효주를 보며, 신기는 자책했다.
'나 때문에 효주 엄마가 바람피운 게 일찍 들켰구나. 후계자가 된 지 오래지 않은 강 사장은 강 회장 말을 거역하지 못했을 거고, 재혼도 강 회장의 뜻에 따라 바로 했겠지.'
"저 여자 김 회장 숨겨둔 딸이야."
신기는 불현듯 하현주가 생각났다. 하현주는 괴물 사태가 발생했을 때 가족을 전부 잃었다. 그리고 D등급이 되며 마법 스킬이 봉인으로 바뀌었다. 만약 하현주의 가족이 살아남는다면 봉인 스킬을 얻지 못하는 게 아닐까?
"형, 하현주라는 여자 찾아주세요.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스물다섯 혹은 스물여섯입니다."
"야, 너 차라리 국정원 먹어버려."
"수고해 주세요."
상명하복에 어느 정도 길든 박영광이 아니었다면, 신기의 과한 요구에 몇 번은 반발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둘은, 적당한 시기에 호텔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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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있고, 신기는 동생과 함께 침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부모님과 달리, 신구는 한국의 각성자를 공개하는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있다.
"형, 그 팅커벨 봤어?"
신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구는 배를 잡았다. 며칠 전, 미국은 전 세계를 향해 각성자를 공개했다. 그리고 공개된 각성자는 신기 덕분에 각성한 존이었다.
"아니, 오십이 넘은 흑인 아저씨가 팅커벨을 소환한다니. 스물만 넘어도 팅커벨 따위는 안 믿는 거 아니었어?"
존이 소환한 팅커벨은 사람을 잠재우는 능력이 있다. 일반인에게 위협이 되는 스킬은 강화와 소환 그리고 훈육이다. 각성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팅커벨로 각성자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나쁘지 않은 인식을 심어주려는 목적으로 존이 공개 대상자가 되었다. 적당한 경각심과 적당한 친근감을 보여주기에는, 존이 적격이었다.
"나도 슈퍼맨 됐으면 좋겠다. 그럼 바로 대그룹에 입사할 수 있단 말이야."
미국은 각성자를 슈퍼맨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했다. 각성자가 레벨을 올리고 등급을 올릴 수 있다는 말에, 누구라도 신기처럼 될 수 있다고 오해한 것이다. 여러 나라가 각성자를 양성하는 열정을 불태우기를 바라면서, 신기는 굳이 그 오해를 풀어주지 않았다.
"왜? 너 프로 선수 된다며?"
"감독한테 돈 안 찔러주니까 선발 안 시켜줘. 교체로 올라가도 공격수가 아닌 풀백이나 수미 시키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렸어?"
"말도 마.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래. 꼼수로 출전하면 언젠가는 나쁜 결과로 돌아올 거래. 엄마는 왜 감독님한테 돈 줘야 하는지 이해도 못 하는 것 같고."
다시 한번 진화 스킬을 신구에게 사용했지만, 역시 효과가 없다. 부모님도 신구도 각성자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 하긴, 신기 역시 F급으로 시작했었다. 아마 D랑은 잘 안 맞는 혈통인가 보다.
지루한 광고가 끝나고, 프로그램이 시작되며 화면에 공우진의 어색한 얼굴이 나타났다.
"뭐야? 강남 제비잖아."
꽤 순수한 이미지의 공우진인데, 화장을 어떻게 했는지 사모님 홀리는 제비를 연상케 하는 얼굴로 변했다. 사회자의 질문에 공우진은 떠듬거리며 자신이 각성할 때 느꼈던 감상들을 말했다.
"히야. 죽여주는구나."
공우진의 외모를 비웃던 신구는, 질답이 끝나고 공우진이 불바다 마법을 펼치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 감탄도 오래가지 않았다.
"뭐야? 왜 온도가 저렇게 낮아?"
온도계에 표시된 수치는 40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수십 개나 되는 온도계는, 다소 차이가 있어도 40도를 넘은 건 하나도 없다. 공우진이 소환한 불에 종이나 화장 솜 혹은 라이터 기름 따위를 접시에 담아 올렸지만, 어느 하나 연소하지 않았다.
"뭐야. 허우대뿐이잖아."
가장 절정은 용감한 지원자가 공우진이 소환한 불에 손을 넣는 것이었다. 지원자가 불에 손을 넣는 순간, 고 데시벨의 비명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불에 손을 넣은 지원자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형, 방금 불에 손 넣은 지원자 인적사항 확보해줘요. 이름은 최영웅입니다.]
한 번 관종은 영원한 관종이라는 위대한 어록이 있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수많은 관종이 몸소 증명하여 불변의 진리가 되었다. 의도치 않게 최영웅을 발견하게 된 신기는, 최영웅이 이번에도 철벽과 강화 스킬을 얻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 DUAL SYSTEM ###
서울 모 공원.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상대가 어려 보였지만, 직급이 차장이다. 태운 그룹 산하의 경호 회사에서 아직 대리도 달지 못한 최영웅은, 깍듯하게 구십 도 인사를 올렸다.
"최영웅 씨를 뵙고자 한 건, 지난번 방송에서 불에 손을 넣는 모습을 봐서입니다. 혹시 불에 손을 넣었을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았나요?"
"그거 조작 아닙니다. 제작진과 짠 것도 없고요. 진짜 안 뜨거운 불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자친구랑 헤어지기까지 했는데."
'이유는 달라도 헤어질 사람은 어떻게든 헤어지게 되었구나.'
방송 이후, 많은 지인이 최영웅에게 진짜냐고 질문했다. 제작진이랑 짠 게 아니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고, 거짓말 말고 진실을 알려달라는 사람들과 대판 싸우기도 했다. 많은 사람과 사이가 소원해졌는데, 그 소원해진 사람들 명단에 여자친구도 끼어있었다. 결국, 대판 싸우고 나서 헤어져 버렸다.
"그게 아니고, 최영웅 씨가 각성자가 될 자질이 엿보여서요. 태운 그룹에서 각성자를 정직원으로 특채하는 건 아시죠?"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럼 저도 막 불을 피우고 그럴 수 있는 건가요?"
"각성자마다 스킬이 다릅니다. 전투형과 비 전투형으로 나뉘거든요. 그리고 각성자가 어떤 스킬을 얻을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각성자가 될 수 있습니까?"
"태운 그룹이 각성자를 만드는 기술을 확보했습니다. 다만 각성자가 될 자질을 갖춘 사람만 각성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저를 각성자로 만들어주시면, 평생 회사에 충성하겠습니다."
'역시, 이 형은 영락없는 관종이었어.'
최영웅에게 돌아서라고 한 후, 신기는 진화 스킬을 사용했다. 파티에 가입시키니, 지난번과 다르게 철벽과 강화 스킬을 동시에 얻었다. 그리고 등급도 D등급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검은 구슬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본 것이었구나.'
"최영웅 대리, 열심히 해서 A등급 되어 부장 직함까지 달아봅시다."
"감사합니다. 차장님. 영원히 충성하겠습니다."
최영웅을 태운 그룹으로 계약하러 떠나보낸 후, 신기는 박영광이 모는 차에 앉아 하현주를 만나러 출발했다. 박영광이 건네주는 하현주의 자료를 꼼꼼히 살핀 신기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현주가 봉인 스킬을 얻지 못한다면?'
지금 신기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신기가 성휘를 펼친 상황에서 스킬을 얻은 사람들이 이번에도 똑같은 스킬을 얻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최영웅과 박영광은 같은 스킬을 얻었지만, 달라진 효주의 모습에 걱정이 생겼다.
하현주와 제이크도 신기가 성휘를 펼친 상황에서 스킬을 얻었다. 재수 없으면 둘 다 봉인 스킬을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봉인 각성자를 보유한 중국과 영국이 큰소리를 낼 수도 있다.
'어? 하현주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신기는 옛날 기억을 더듬었으나,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쪽으로는 관심을 준 적이 없어서 남아있는 기억이 없었다.
'미남계는 물 건너갔군.'
속으로 혼자 농담을 하고 혼자 웃는 신기를, 박영광이 미친놈 보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야, 내려. 차 세운 지 언제라고 혼자 실실 쪼개고 있어?"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하현주를 만난 신기는, 단도직입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혹시 태운 그룹에 입사할 생각 있습니까?"
"뭐 하는 분이세요?"
신기는 차장 직함이 박힌 명함을 꺼내 하현주에게 건넸다.
"태운 그룹에서 각성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래서 각성자가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을 찾아 스카우트하고 있습니다. 하현주 씨도 각성자가 될 자질이 있네요. 태운 그룹과 계약할 의향이 있으시다면, 각성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가족들과 상의해도 되나요?"
"그러셔도 됩니다만, 이미 성인이시니 혼자서도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커피와 과일 주스를 시킨 둘은 느긋하게 앉아 하현주의 대답을 기다렸다.
"야, 이런 거 소문 퍼져도 괜찮아?"
"일부러 퍼뜨리는 거예요. 미국이나 중국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이것들이 사람을 너무 깔아보는 것 같아요."
미국은 신기가 각성을 도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무제한'으로 마구 찍어낼 수 있다는 건 확신하지 못한다. 신기와 가깝게 지내는 게 더 많은 각성자를 확보하는 길임을 제대로 각인시켜 줘야, 신기가 목에 힘을 더 줄 수 있다.
"한 번 해볼게요."
하현주가 다가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의사를 표현했다. 대기하고 있던 인사실 직원이 하현주와 계약을 체결했다. 각성해야만 효력이 발생하는 조건부 계약서다.
CCTV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는 직원 휴게실로 가서 신기는 스킬을 사용했다. 나지막하게 동의라고 말한 하현주가 파티의 일원이 되었다. 신기는 정신을 가다듬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현주의 스킬을 느끼려 애썼다.
- 작가의말
한 번 회귀하고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은, 미리 회귀할 것을 알고 준비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저를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놔도, 아주 대단한 인물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저 경제적으로 조금 더 풍족하게 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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