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
아프리카.
괴물 생산량이 높은 화산들을 다 점검한 후, 화산 출력을 점검하는 팀은 총 3팀으로 나눴다. 신기가 이끄는 팀 하나에 박영광이 포함된 팀 하나, 그리고 맥이 포함된 팀 하나. 총 3개의 팀으로 나눠 점검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석 달 만에 출력 점검을 끝냈다.
데이터가 모이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세밀한 계획을 짰다. 먼저 소각장을 충분히 세운 후 화산섬과 해저 화산부터 봉인하여 변수를 줄였다. 봉인 하나 할 때마다 사흘씩 지켜보며 변수를 체크하느라, 예상보다 봉인에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미스터 신. 동부 소각장이 무너졌습니다."
"원인은?"
"규격 외 괴물이 뛰쳐나왔는데, 각성자를 제외한 일반인이 전부 죽었습니다."
신기는 급하게 아파치 헬기에 탑승했다. 헬기에서 현장 각성자들이 다급하게 올린 보고를 확인했다. '흡혈귀'라는 이름을 얻은 괴물은 그저 엘프처럼 생겼다. 덩치가 클 뿐 일반 엘프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런데 이 흡혈귀는 사람의 체액을 말려버리는 능력이 있다. 스킬이 아닌 능력이라고 여기는 것은, 마나의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체 조종사가 등급이 낮은 각성자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흡혈귀는 일정 범위 안의 사람의 체액을 말려버리는 능력을 갖춘 것이다.
"일반인은 일정 거리만 가면 미라가 되어 죽습니다. 각성자는 등급 불문하고 이 능력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각성자는 기력 혹은 마력이 다 떨어지는 타이밍이 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어서, 아무리 많은 훈련과 실전을 거쳤다 해도 괴물의 숫자와 비율에 따라 각성자들의 마나와 기력이 전부 떨어지는 때가 생긴다. 그럴 때마다 군인들이 화기로 시간을 벌어주는데, 그런 군인이 대량으로 말라 죽었다.
"전문가들의 계산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지금 일부 화산은 24시간 괴물을 쏟아내지만 일부는 원래와 똑같습니다. 24시간 괴물을 쏟아내는 화산에서 결국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전문가를 탓할 건 아니다. 그들도 누적된 데이터로 유추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번 사고는 아무 조짐도 없이 터졌다.
빠르게 날던 헬기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조금씩 방향을 틀며 날았고 얼마 후 신기는 흡혈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원근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확한 시력을 보유한 신기는, 흡혈귀의 키가 4미터에 조금 못 미친다는 걸 확인했다. 몸에는 비늘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이상한 무늬가 나 있는데, 엘프의 것처럼 보는 사람을 거북하게 하지는 않았다.
'듀라한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몸통 위에 머리가 없는 흡혈귀가 지프 한 대를 꾸준히 쫓고 있었다. 달리는 속도가 무척 빨라서 곧 따라잡을 것 같았지만, 뒤에서 따르는 각성자들이 밧줄 따위로 묶어버리거나 강한 공격으로 멈추게 했다.
"문을 열어주세요."
예전에 급한 마음에 실수로 헬기 문짝을 뜯어낸 적이 있다. 그래서 신기의 호위 겸 비서로 따라다니는 각성자가 대신 문을 열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신기가 사용할 검을 들고 다니는 것이다. 전투마다 최소 수십 자루씩 검을 망가뜨리는 신기여서, 늘 백 자루 정도의 검을 갖고 다녀야 한다.
등에 멘 화살집처럼 생긴 커다란 통에는 검이 열 자루가 들어있다. 신기는 헬기 문이 열리자 바로 밖으로 뛰어내렸다. 지프와 흡혈귀 사이에 떨어진 신기는 바로 검에 태풍을 둘렀다. 흡혈귀의 속도가 너무 빨라 조준 할 겨를도 없이 태풍을 앞으로 쏘아냈다.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신기는 새로운 검을 뽑았다. 하도 자주 뽑아서 동작이 숨 쉬듯 자연스럽다. 태풍에 옆구리가 날아간 흡혈귀가 빠르게 재생하고 있었다. 고급 9레벨에 이른 간파가 흡혈귀의 요해를 단번에 알아냈다.
왼손으로도 검을 하나 뽑은 신기는 두 자루의 검에 태풍을 담았다. 태풍을 흡혈귀의 왼쪽 심장과 오른쪽 심장으로 날린 신기는, 곧바로 검 하나 뽑아 명치 부위를 향해 강한 공격을 날렸다. 흡혈귀는 세 개의 심장을 동시에 파괴해야 죽음에 이른다.
안타깝게 세 공격이 동시에 들어가지 않아 흡혈귀를 죽이지는 못했다. 태풍으로 파괴한 심장이 아주 짧은 순간에 재생해버렸다. 명치 부위의 공격이 조금 느렸다. 그때 박철과 최영웅 그리고 박영광이 도착했다.
"내가 멈출게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 곧 스물이 되는 박철마저 백전노장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최영웅이 심장을 회복하느라 힘을 제대로 못 쓰는 흡혈귀를 농락했다. 불멸의 안개에 거부감을 느끼는 듯, 흡혈귀는 최영웅을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신기는 흡혈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검 한 자루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태풍은 나팔꽃 모양으로 공격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 세 심장을 동시에 태풍의 공격권에 넣으려는 것이다.
"멈춰!"
흡혈귀가 멈추자 최영웅이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고급에 이른 강화 스킬 덕분에 우사인 볼트가 울고 갈 정도의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검에 꽁꽁 압축했던 태풍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검에서 풀려 난 태풍은 점점 덩치를 불리더니 흡혈귀의 상체를 지워버렸다. 한꺼번에 70%의 기력을 쏟아부은 신기는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지 오래된 육체도 많은 기력을 한꺼번에 운용하자 힘겨워했다.
"죽었어요."
신기도 괴물의 생사를 알아낼 수 있지만, 박철처럼 확실하지는 않다. 괴물이 죽었다는 말에 신기는 시름을 놓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박영광이 무전을 몇 번 주고받더니 역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기력이 바닥날 때까지 소환 스킬을 사용했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뭐 바뀐 거 없어?"
규격 외라고 부르는 괴물들을 죽이면 늘 뭔가 보상이 있다. 신기의 말에 셋 다 눈을 감고 내면에 집중했다. 너무 강대한 힘을 품은 신기는 작은 변화에 민감하지 않아 변화를 확실히 눈치채지 못한다.
"회복 속도가 빨라졌어."
신기가 신의 사자로 밝혀진 후부터 박영광은 변태라고 부르지 않았다.
"저도 회복이 빨라진 것 같아요. 기력이 차는 데 13분 정도 걸리네요."
최영웅은 굳이 허리에 매달고 다니던 무기를 뽑아서 번쩍 들고 세리머니를 했다. 자루보다 머리가 훨씬 큰 망치 비슷한 무기로, 타격하는 머리가 달걀을 닮았다. 한쪽은 조금 더 뾰족하고 다른 한쪽은 살짝 뭉그러졌는데, 무게 중심을 절묘하게 잡아 어느 쪽으로 타격해도 불편하지 않다.
"일반 괴물을 상대로는 휴식이 필요 없겠는데."
그때 도망가던 지프가 털털거리며 돌아왔다. 뒤에 밧줄로 매단 흡혈귀의 머리를 본 신기는 그제야 영문을 알았다. 흡혈귀는 머리가 잘렸고, 잘린 머리를 지프로 끌고 다니며 흡혈귀를 유인했다.
"빨리 부숴요."
지프를 운전하던 제이크가 흙 거인을 소환해 흡혈귀의 머리를 때렸다. 살아있을 때는 흙 거인의 공격이 거의 먹히지 않았는데, 흡혈귀의 머리는 쉽게 으깨졌다.
"아우, 나 마력 회복이 빨라졌어."
머리와 가까이 있어서 역시 회복 속도가 빨라진 듯하다. 사대천왕의 남은 셋은 안타깝게도 맥의 팀에 포함되었다. 그래서 화력을 2배로 늘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무색투명한 맑은 구슬이 나오자 신기가 보관했다. 탐구 스킬 사용자들이 이 구슬이 어떤 능력 혹은 스킬을 줄지 알아낼 것이고, 가장 적합한 각성자에게 복용하도록 할 것이다. 중국에서 네 괴물을 처리한 후 규격 외 괴물이 거의 안 나왔다. 거의라고 한 것은 알래스카에서 딱 한 번 규격 외로 의심되는 괴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의심으로 그친 건, 괴물을 죽인 각성자들에게 딱히 변화가 없고 특별한 구슬도 드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는 어떻게 베냈어요?"
"박철이 흡혈귀를 멈추고 장군님이 쓱싹했지. 제이크의 흙 거인이 머리를 들고 도망쳤고 남은 사람들이 흡혈귀를 공격했어. 그러다 제이크가 머리를 지프에 매달고 도망쳤고 흡혈귀가 머리를 찾으려고 쫓은 거야. 우리는 지프 혹은 오토바이로 쫓으면서 방해했고. 네가 5분만 늦게 왔으면 누군가 죽었을지도 몰라."
평소에는 괴물의 구성에 따라 정해진 전투 교본대로 움직이면 된다. 지휘관이 구령도 외쳐주고 하기에 실수할 가능성이 적고, 한둘이 실수를 범해도 전황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흡혈귀를 처음 상대하면서 모두 과하게 기력과 마력을 쏟았다. 박영광도 기력이 다 떨어졌지만 이를 악물고 운전했고, 최영웅과 박철이 그나마 기력이 있어 가끔 흡혈귀의 몸에 밧줄을 묶어 방해하고 명령으로 멈추게 하며 제이크를 도운 것이다.
"제길, 이게 다 미국 탓이야."
미국 공민 제이크가 큰 불만을 토했다. 아프리카의 봉인이 생각보다 늦어지자 미국이 멕시코의 몇몇 화산을 봉인하여 괴물의 이동 패턴을 바꾸자고 제의했다. 미국이 어떻게 로비를 했는지 대부분 나라가 거기에 동의했다.
그 프로젝트의 진행을 위해 아프리카 소각장의 인원을 일부 빼갔다. 만약 그 인원들이 남아 있었고, 소각장으로 오는 괴물 숫자가 많아질 때 바로 지원했다면 흡혈귀가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멕시코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었지?"
"이미 세 개의 화산을 봉인했어. 미군이 화력을 아끼지 않아 아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있어."
초반부터 소각장을 운영하며 괴물 밀도를 낮췄고, 미국 군인이 괴물을 상대한 경험도 세계에서 으뜸이다.
"가문을 통해 알아봤는데, 북미 대륙을 가장 나중에 '해방'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번 멕시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고 해."
유럽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는 저 조건으로 설득한 것 같다. 신의 사자 열기가 많이 식은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미국이 슬슬 신기의 계획과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 차릴까나."
괴물 밀도가 고등급 괴물이 나오는 유일한 조건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마나 밀도가 높아지고 있기에, 고등급 괴물이 나오는 데 필요한 괴물 밀도는 해가 바뀜에 따라 점점 낮아진다. 마치 이번에 흡혈귀가 튀어나온 것처럼 말이다.
'의도적으로 보낼 수도 있고.'
해골용도 그렇고 시체용도 그렇고 매우 멍청해 보였지만, D의 심상에 있을 때 정보 단말로부터 얻은 정보로 실상은 그게 아님을 안다. 적대적인 환경에서 마나가 부족해 가진 힘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마치 뇌에 산소가 부족한 인간과 같은 상태였다.
D 혼자서 다른 세상과 구멍을 뚫을 수 있는데, 다른 세상의 초월자가 자기 부하를 이쪽으로 보내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규격 외 괴물이 이쪽으로 오면 마나가 부족해 모든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초반에는 그저 영양식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남미나 북미 쪽에 고등급 괴물이 나오면 지원을 거절해야겠다. 좀 튕겨줘야 이것들이 정신 차리지. 아직 아프리카가 성공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딴 주머니 찰 생각부터 하다니.'
물론 홧김에 떠올린 생각뿐이다. 그러나 거절하지는 않지만, 쓴소리 몇 마디는 할 생각이다.
소각장에 도착하니 체액이 사라져서 볼품없이 쪼그라든 시체들이 잔뜩 있다. 어느새 지원 부대가 도착해 이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몸을 뒤져 신분을 확인한 후, 화장터에서 시체를 태웠다. 가족은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과 골분 상자 하나를 받게 된다. 시체 조종사가 시체를 괴물로 바꾼다는 것이 증명된 이후 시체를 화장하는 풍토가 널리 퍼졌다.
이번 사태에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아프리카로 각성자를 지원했다. 군인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되도록 각성자 만으로 소각장을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세계 각지의 소각장에 군인 비율을 늘리고, 아프리카의 소각장은 각성자 비율을 늘렸다.
그리고 멕시코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미국과 남미에 더 여유가 생겼다. 괴물의 이동 경로가 더 단순화되어 수비선이 많이 짧아졌다. 그 여유를 아프리카에 쏟아 소각장이 더욱 안정적으로 운영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신기가 예언한 현상이 발생했다. 아프리카 곳곳의 괴물들이 미친 듯이 콩고의 니아무라지라 화산을 향해 뛰어갔다. 소각장으로도 다 소멸하지 못한 괴물들과 어딘가에 숨어있던 괴물들이 화산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거리가 먼 화산부터 서서히 괴물이 나오지 않으며 봉인된 것과 같은 상태로 변해갔다.
예측 각성자들이 흡혈용, 즉 뱀파이어 드래곤의 출현을 한 달 뒤로 예측했을 때 남미에서 사달이 났다. 칠레의 비야리카 화산에서 삼두사가 기어 나왔다. 수많은 괴물을 거느리고 멕시코를 향해 움직이는 삼두사에, 전 세계가 패닉에 빠졌다. 길이 300미터의 삼두사가 초월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아프리카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제가 작년 8월 26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26일 전에 완결 내려 합니다.
다음 글 역시 도전이 되겠습니다. 훌륭한 글을 쓰려면 당연히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글을 더 잘 쓰지 못해 괴로울 때도 있지만, 노력과 경험과 시간이 해결하리라 믿습니다.
저는 처음에 연참에 집착했습니다. 하루에 2편 3편씩 쓰고, 연속 며칠 4편씩 쓴 적도 있습니다. 집착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병인 듯합니다. 이번에 동시 연재로 연참에 대한 집착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미리 약속한 일일 연재에 집착하며 컨디션이 안 좋은 때에도 글을 썼습니다. 천마 쓸 때도 그런 편이 몇 편 있었는데, 댓글에서 귀신같이 알아내시더군요. 다음 목표는 일일 연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겁니다. 컨디션이 무척 좋을 때 비축분을 마련하고, 컨디션이 나쁘지 않을 때 비축분을 다듬어 올리겠습니다. 컨디션이 나쁘면 연재를 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완결한 글 중에 아쉬움이 거의 남지 않은 건 절세신응밖에 없습니다. 다음 글은 최소한 저에게 아쉬움 없는 글이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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