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미끼
거제도.
열 척이 넘는 거대한 배가 부두로 들어섰다. 부두의 크기가 작아 한 번에 한 척만 댈 수 있어 삼천이 넘는 사람들이 다 내리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다.
"여기가 바로 왕의 땅인가?"
신기와 제이크 그리고 효주는 대마도에서 헬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박철과 최영웅이 거제도에 일행을 안치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박철은 거제도 지리를 잘 알고 있고 최영웅은 일본인들에게 위신이 신기와 제이크 다음으로 높기 때문이다.
"비가 많은 걸 제외하면 정말 좋은 곳이죠."
거제도는 신기가 태운 그룹으로부터 받은 사유지다. 물론 면적이 정부에서 정한 자치 기준에 부합하지는 않아 태운 영지에 소속되어 있다. 남해안의 안정화가 가장 늦게 진행되었기에 거제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는 아직 입주한 사람이 없다.
"샤먼, 나는 왕의 별장에 가보고 싶은데."
사람이 변하기 시작하면 참으로 무섭다. 방구석에만 박혀있던 가가와는 신기 일행을 따라 움직이면서 무척이나 활동적으로 변했다. 하루의 시간을 침대와 모니터 앞에서 소모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얌전히 있지 못했다.
"우선 짐을 다 옮기고요."
여자나 아이들도 무거운 짐을 들고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구슬 각성자들도 최소 F급이고 일찍 각성한 자들은 E급이다. 레벨업이 다소 느린 건 바닷가와 먼 곳들을 주로 돌아다녀서 괴물이 적은 것도 있고 파티 등급이 낮아서 경험치 손실이 높은 이유도 있다.
태운 그룹이 미리 사람을 보내 정리해 놓아서 짐만 풀면 되었다. 가가와가 왕의 별장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흥분해 있을 때 별안간 연락이 왔다. 헬기를 보냈으니 최영웅과 가가와 그리고 박철에게 바로 제주도로 오라는 지시가 신기로부터 도착했다. 중국이 전혀 저항하지 않는 바람에 시체 조종사들이 벌써 바다에 들어갔다는 정보도 전해왔다.
### DUAL SYSTEM ###
제주도.
강 회장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모니터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너무 살벌하여 견딜 수 없었다. 잠깐 느꼈던 숨 막히는 기분이 모니터로 들여다보는 지금도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거제도에서 불러온 세 사람과 저하고 제이크 그리고 강효주 양이 처리하겠습니다. 태운 그룹에서는 함정 설치와 생방송에 신경 써주시면 됩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네 일이나 잘하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물론 신기가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지만, 신기로부터 전해져오는 묵직한 무언가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좌불안석하게 했다. 자신들이 뭔가 잘못해서 신기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럼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고생해 주세요. 저는 전투할 곳에 가서 지형을 살피도록 하죠."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신기와 제이크는 회의장을 벗어났다. 밖에 나가니 바지 엉덩이에는 곰 얼굴이 그려졌고 상의에는 효천 얼굴이 커다랗게 새겨진 전투복을 입은 효주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프로메테우스 로고가 있던 자리에 효천의 얼굴을 넣은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와의 협력 계약은 계속 거절해?"
"의향서만 체결하고, 일이 있을 때마다 단기 계약을 맺는 것으로 하자. 왕의 말이 곧 법이어야 해. 왕의 권위를 제한할 수 있는 모든 행위는 자제하기로 하지."
"팰러딘, 원래부터 멋있었지만 지금은 더 멋있어. 성전환 수술을 고민하는 중이야."
"애 앞에서 말 가려서 해."
제이크는 여전히 전투복을 입고 있지만 신기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얼음 갑옷으로 막을 수 없으면 전투복도 소용없다.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왕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제이크의 의견에 따라 할 말만 짧게 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회의장에 있는 내내 검술 스킬의 중검과 둔검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압박을 가했는데 대부분 구슬 각성자여서 효과가 무척 좋았다.
밖으로 나가니 이미 시동이 걸린 차가 대기하고 있는데 엔진 소리를 들어보니 휘발유를 태우는 귀한 몸이 틀림없다. 과연 차가 움직이자 힘이 느껴졌다.
제주도의 서쪽에 있는 비양도가 시체 조종사를 처리할 전장이다. 서쪽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비양도로 가서 다시 차를 타고 둘러보았다. 전장을 둘러보다 시간이 되어 다시 제주도로 돌아갔다. 미국 정부와 프로메테우스와의 전화 회의 일정이 안배되어 있다.
### DUAL SYSTEM ###
제주도와 미국.
"화산의 봉인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소각장을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괴물의 밀도가 일정 이상이 되면 고등급의 괴물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괴물의 밀도를 일정 수준 이하로 컨트롤할 수 있어야 화산의 봉인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신기가 태운 그룹에 소속되어 있을 때도 소각장의 건설을 강력히 요구했다. 사실 그건 신기의 생각이라기보다 일본 수복을 원하는 태운 그룹의 의지가 더 많이 깃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던 모두는 중국의 사태를 통해 신기의 정보 능력을 더욱 과대평가하게 되었다.
예전에 태운 그룹 주제에 소각장이라는 인력 투입과 물자 소모가 무척 큰 국가급 프로젝트를 요구할 수 있었던 건 하현주 덕분이었고, 지금 신기도 다르지 않다. 세계 유일의 봉인 각성자인 미국 공민 제이크는 현재 미국 편이 아니다. 화산의 봉인을 원하는 미국에 신기는 자기 계획을 설명했다.
"소각장을 해상에 운영할 뿐 아니라 화산 주변에 운영할 수 있습니다. 화산구가 너무 많은 곳은 봉인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수비선을 구성해서 괴물을 처리해야 합니다. 이번에 중국에서 발생한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일본의 화산을 전부 봉인하면 시체 조종사와 같은 고등급 괴물들이 전부 일본으로 향할 것으로 추측한다. 신기는 일본을 고등급 괴물을 끌어오는 거대한 미끼로 만들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시체 조종사의 대응만 보아도, 일본에서 출발해 우선 중국으로 향했다. 가까운 한국에 봉인된 화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 향했고, 앞을 막지 않으면 굳이 공격하지도 않았다. 아마 수많은 고등급 괴물들이 다른 곳의 적당히 봉인한 화산은 무시하고 일본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고등급 괴물들도 시체 조종사처럼 부하를 거느리기 좋아한다면 수많은 괴물이 일본으로 몰려올 것이다. 신기는 여러 국가와 협력하여 이러한 괴물들을 처리하는 한편, 세계 각지에 소각장의 운영을 보급할 생각이다. 즉 일본 전체가 거대한 박철이 되어 전 세계의 괴물을 빨아들이고, 그사이 압박이 줄어들어 여유가 생긴 곳부터 소각장을 운영하는 것이다.
일본이 등대이자 미끼이자 소각장이 되어 다른 곳의 괴물 밀도를 가능한 만큼 낮춰버린다. 그다음 계획적으로 화산을 봉인하면서 안전한 땅을 늘려가며 괴물을 완전히 몰아낼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봉인이 유일한 대책이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새로운 해결책이 나타날 수도 있다.
아직 이 계획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건, 신기가 모은 힘이 몹시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계획을 진행하면 결국 신기는 자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상황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다. 단순히 힘만 센 장기 말이 되지 않으려고 신기와 제이크는 우선 힘부터 키울 생각이다.
"미스터 신, 현재 우리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이 2년을 버티지 못합니다. 중국이 무너지는 순간 한국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당장 우리와 손잡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됩니다."
칼만 안 겨눴지 이건 협박이다. 물론 미국 정도면 이런 협박을 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신기 역시 이 협박에 받아칠 자격을 갖추고 있다.
"혹시 미국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계산해 보았습니까? 갑자기 궁금하군요."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국민을 포기한다면 수십 년은 걱정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 모르겠네."
신기는 혼잣말 하듯이 가볍게 읊조렸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너희가 망하는 모습을 즐겁게 구경해 줄게. 비록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지만, 회의에 참석한 자 중 멍청이는 하나도 없어서 신기의 뜻은 오롯이 전달되었다.
"미스터 신, 계획이 있다면 말해보시오. 경청할 준비가 되었소."
꼬리를 말았지만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머리를 흔들고 있다.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기에 굳이 열심히 흔드는 머리를 무시하고 바짝 만 꼬리를 가리키며 비웃을 필요가 없다. 신기는 자신의 의지가 상대에게 전달된 것 같다는 생각에 날카롭게 세웠던 대립각을 살짝 줄였다.
"나는 내 계획대로 움직입니다. 그 과정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손잡고 서로 도우며 살아갈 생각이죠. 한 가지 확실한 건, 주고받는 문제에 있어서 나는 미국 사람과 같은 스타일이라는 겁니다."
"우선 시체 조종사가 도착하는 대로 가볍게 처리하도록 하죠. 물론 전 세계에 우리의 복귀를 화려하게 알리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 구역을 만들고 이곳 한국을 아시아를 수복하는 기지로 만들 생각입니다. 북한 땅은 버리고 남쪽에 수비선을 만들고 해안가의 등대를 운영하도록 하죠. 그 과정에서 북한을 설득해서 남쪽으로 움직이는 것과 사람과 물자의 이동에 필요한 석유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물론 남아도는 식량도 조금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의 계획에 우리 미국의 이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가 안정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2단계 계획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기에 섣불리 발표하지 않겠습니다. 예전에 등대와 소각장이 그러했듯이, 2단계는 희망의 불씨가 다시 거세게 타오르게 할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대표는 신기의 말에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미스터 신, 비즈니스를 하려면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이익을 고려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 협상은 너무 일방적인 것 같습니다."
"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당신들은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힘이 아무리 세도 열쇠가 없으면 문을 열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들에 비교해 힘이 부족할 뿐, 당신들 도움이 없어도 언젠가는 문에 다가가서 열쇠를 꽂을 수 있습니다. 출발선이 평등하지 않은데 어찌 평등한 위치에서 협상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이익이라고 했는데, 나는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류를 위해 괴물을 전부 몰아낼 생각뿐이죠. 내가 원하는 이익이 없는데 나한테서 뭘 가져가려고 합니까?"
"나는 지금 당신들과 인류의 운명을 논하고 있습니다. 결코 당신들과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나와 달리 당신들은 비즈니스를 해야겠죠. 그래서 앞서 말했습니다. 주고받는 건 정확히 하겠다고요. 벤처 투자라고 생각하고 신중히 고민하기 바랍니다.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신기는 일방적으로 회의를 종료했다. 통신이 끊어지고 화면이 꺼지자 신기는 두 손을 빠르게 비빈 후 얼굴에 갖다 댔다. 제이크가 만들어준 이미지를 연기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제이크가 엄지손가락을 빼 들고 있었다.
"내가 나선 것보다 훨씬 나았어. 나는 날카롭고 팰러딘은 묵직해. 약한 상대에게는 날카로운 게 먹히겠지만 미국에게는 묵직한 게 효과가 좋지."
"자주 하지는 못하겠어. 그리고 영어 하느라 혀가 다 굳은 느낌이야. 혀 근육이 휴식을 시켜달라고 아우성이거든. 구체적인 사안은 제이크가 알아서 처리해. 초상권 문제에서 조금 양보하는 것으로 가문의 도움도 좀 받고."
"걱정하지 마. 첫 실전이기는 하지만, 서당 개 삼 년이면 랩도 한다는 한국 속담이 있잖아."
발음을 제외하고 한국어가 점점 완벽에 가까워지는 제이크지만, 그의 곁에는 박철과 최영웅이라는 '훌륭한' 선생이 둘이나 있다. 그래서 가끔 십 년 전에 인터넷에서 유행했을 법한 이상한 말들을 뱉어낸다.
"그래. 가서 야식이나 먹으면서 전투 계획을 상의하자. 한 마리면 아무 위험도 없겠지만 둘이어서 조심할 필요가 있어. 내일 가서 도망 다니는 연습을 많이 하도록 해."
태운 그룹의 도움이 있으니 일본에 있을 때보다 더 자신이 넘친다. 그때는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서도 시체 조종사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었다. 지금은 원하는 도구들도 척척 만들어 낼 수 있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줄어들었다. 한꺼번에 두 마리를 처리해야 한다는 변수만 제외하면 말이다.
- 작가의말
궁금한 점들을 적어봅니다.
1. 김신욱은 왜 선발 출전인가. 저는 김신욱 대신 수비형 미드필더 한 명을 더 올려서 체력을 아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거리 패스로 이득을 취한 것보다 중원이 제압당해 본 손해가 훨씬 큰 것 같습니다.
2. 이승우와 황희찬, 둘이 동시에 경기장에 있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경험이 부족한 선수가 두 명이나 공격선에 있는 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왼쪽 윙과 오른쪽 풀백처럼 서로 상관이 없다면 몰라도 둘이 서로 공을 주고받아야 하는 선수들인데, 재능이 출중해도 월드컵에서는 경험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3. 손흥민을 해방해서 개인 능력을 발휘하게 할지, 손흥민을 희생해서 다른 선수들을 살릴지, 전술 의도가 명확하였는가? 저는 왠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세계 축구의 발전 속도에 뒤처진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특히 유럽의 선진 축구가 변화를 꾀하고 있는 지금, 상대적으로 낙후한 아시아 팀이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객관적인 격차임을 인정합니다. 그저 예전과 달리 투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 아쉬울 뿐입니다. 빨리 정신 차리고 유럽 축구의 변화에 대책을 세웠으면 합니다. 지금 축구의 발전 추세가 아시아 팀들에 아주 불리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농으로 한마디 하자면, 설마 내년 병역면제컵을 위해 전술 훈련을 겸해 신인들을 단련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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