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출발
눈을 뜨니 천장이 보였다. 원래는 동생이랑 같이 쓰던 방으로, 동생의 취향에 맞게 천장을 연한 노랑으로 칠했다. 눈동자를 굴려 벽지를 확인했다. 돈 아낀다고 객실만 사람을 쓰고, 침실은 직접 붙였다.
벽지를 물에 푹 담근 다음 붙여야 한다. 그러나 성격이 급한 아버지는, 설명서에 조금 담가도 괜찮다고 했다며 급히 꺼냈다. 그때는 아직 중학생이었던 신기와 초등학생인 동생도 일손을 돕는다고 나서서, 벽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이가 멀어진 게 이 방 때문이었을까?'
신기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동생은 작은 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객실에서 공간을 분리하여 서재처럼 만들었던 방인데, 동생은 차라리 주방이나 화장실이 낫다고 투정 부렸다. 형제 둘이 맨날 장난치며 늦잠을 자서, 둘을 분리하기로 했다.
'방 따로 쓴 다음부터 내가 공부를 잘하니까 섭섭했을 수도 있겠다.'
심장이 방망이질 친다. 이불을 젖히고 일어서니 조금 부자연스럽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예전의 호리호리한 몸매로 돌아왔다. 물론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이어서 운동 조금만 하면 곧 건장한 체격으로 변할 것이다.
허벅지까지 내린 손을 슬며시 옮겨서 엉덩이를 꼬집었다. 통증이 느껴지자 꿈은 배제했다. 지금 이 모든 게 환상이라면 통증도 느껴질 수 있기에, 다른 시도를 해봤다.
'정보 단말.'
대답이 없다.
'개인 정보.'
강하게 개인 정보를 보고 싶다고 떠올렸다. 그러면 눈에는 보이지만,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 문자열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신기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서 삼 년 살던 그 차가운 거실 대신,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닿은 아늑한 공간이 나타났다. 동생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축구부인지 야구부인지 들어가고 나서 아침마다 체력 단련하러 나간다. 헷갈리는 이유는, 동생이 축구부와 야구부에 모두 들어갔었기 때문이다. 어느 부에 먼저 들어갔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지금 축구부 소속인지 야구부 소속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신기야, 일어났어? 얼른 씻고 밥 먹자."
그리운 목소리가 고막을 어루만졌다. 예전에는 아마 흥분해서 아침도 거르고 혼자 학교로 향했던 것 같다. 혼자 출발한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 부모님과 동생에게 학교를 구경시킬 코스를 짜려는 목적이었던 것 같다.
이름 : 신기
등급 : 갑급
개인 등급 : 99
재주 : 검술, 간파 고급 3, 거력, 진화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럽다. 코로 온갖 냄새가 들어오고 속이 울렁거렸다. 귀에 삑 소리가 연신 울리더니, 신기는 그대로 쓰러졌다.
### DUAL SYSTEM ###
연한 노랑의 천장 대신, 눈부실 정도는 아니지만 꽤 하얀 천장이 신기를 반겼다. 사방의 벽도 흰색에 가까운 회색이어서 무척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정신을 차린 신기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신기의 무릎 근처에 머리를 놓고 엎드려 잠자고 있었다. 신기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꾹 누르고 몸을 슬며시 일으킨 다음, 손가락으로 어머니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 어머니의 말랑말랑한 어깨 살의 감촉이 신기의 심장 깊은 곳까지 전달되었다.
"엄마아."
부스스한 모습으로 고개를 드는 어머니를 와락 껴안고 신기는 펑펑 울었다. 어머니도 구슬피 우는 신기를 보듬어 안고 함께 울었다. 속이 후련할 때까지 실컷 울고 나니, 핸드폰을 들고 동영상을 열심히 찍는 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신구야."
핸드폰 화면을 통해 신기에게 발각된 것을 알고 도망치려던 동생은, 환자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신기의 품에 폭 안겼다.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마치 선수의 잠그기 기술에 걸린 것처럼 미동도 하기 힘들었다.
"보고 싶었어."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흘러나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울음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마음이 진정되자 동생의 어깨를 잡고 거리를 조금 벌렸다. 그립고 그리웠던 얼굴을 찬찬히 보고 싶었다.
"얼굴 왜 이래? 누구랑 싸웠어?"
"아냐. 계단에서 굴렀어. 험하게 구른 것치고는 멀쩡하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
고개를 퍼뜩 돌려보니, 어머니의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엄마 손은 왜?"
"실수로 냄비를 잘못 잡아서 손이 살짝 데었어. 연고를 바르고 소염제 먹고 있어."
"아빠는? 그리고 오늘 며칠이야?"
"아빠는 집에 계셔. 네가 쓰러졌다는 말에 운전 급히 하다가 가로등 박으셨어. 다행히 허리 조금 삐끗한 거 빼고는 아무 탈도 없어. 신구가 요새 너도 돌보고 아빠도 돌보느라 고생 많이 했어."
신기는 동생을 와락 그러안았다. 가족들이 다 무사하다는 말에 다시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형, 게임기 나한테 양보해주면 안 될까? 어차피 나는 축구로 대학 갈 거거든. 형은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하니까, 게임기는 나한테 줘. 게임기로 축구 경기 보면 경기에 대한 감각을 더 잘 키울 수 있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셨어."
'거짓말 못 하는 건 여전하구나.'
"가져. 방도 컴퓨터도 다 네가 가져. 난 작은 방에서 자면 돼."
신기는 병실 문의 유리를 통해, 동생이 손가락을 관자놀이 부근에 갖다 대고 빙빙 돌리는 모습을 확인했다. 숨이 막히도록 꽉 안아서 혼내준 신기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안돼. 너 뇌파 검사에서 이상한 게 나왔어.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할 때까지 병원에 있어야 해. 너 일주일이나 기절해 있었단 말이야."
평소에는 가족들이 하자는 대로 그저 따르기만 하는 어머니지만, 가끔 고집을 부리면 아버지도 두 손을 든다.
"학교 가야지. 곧 개강할 텐데."
"엄마가 신구 데리고 가서 휴학신청 했어. 학교 걱정하지 말고 푹 쉬면서 치료받아."
그래도 입원비랑 치료비랑 검사비가 걱정되었다. 하루에 피도 두 번씩 뽑아갔다고 하니, 피 같은 피가 너무 아깝다.
"그럼 집에서 다니면 되지. 아픈 데도 없는 데 쓸데없이 돈 쓰는 건 좀 그렇잖아."
돈 얘기에 잠시 약해졌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네가 대학 졸업하고 벌어서 갚으면 돼. 엄마랑 아빠 노후자금 다 털어 넣었으니 알아서 잘해."
신기에게 컴퓨터 비밀번호를 알아낸 동생이 아버지를 돌본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돌아갔다. 신기의 계정은 마스터 계정이고, 동생의 계정은 유저 계정이다. 동생의 계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많고, 게임도 그중 하나다.
어머니가 깎아주는 과일을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일주일이나 제대로 된 음식 섭취를 하지 못했기에, 신기의 위는 음식을 달라고 끊임없이 투정 부렸다. 맛있는 과일을 먹는 것보다, 어머니가 주는 것을 먹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 훨씬 컸다.
"오, 신기 학생 깨어났군요. 혹시 눈에 이상한 글씨가 보이거나 하지 않습니까?"
진찰을 돌다 들렀는지 일부러 찾아왔는지, 금테 안경을 쓴 인자한 인상의 의사 선생님이 신기에게 친절한 말투로 질문했다.
"안녕하세요. 눈은 정상인데요. 헛것이 보이거나 하지 않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최근 뇌파 검사에서 신기 학생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이상한 글씨가 보인다고 증언했어요. 국내에는 아직 없고 외국에만 수십 건의 사례가 있거든요. 혹시 신기 학생도 같은 증상이 아닌지 확인하는 겁니다. 뇌파 검사에서 알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난 걸 제외하면, 신기 학생은 무척 건강합니다."
"퇴원해도 되나요?"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검사를 받아야 해요. 위험하다는 근거도 없지만, 안전하다는 보장 역시 없거든요. 물론 제 경험에 비춰보면 일시적인 뇌파 이상일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문제는 없지만 만일을 대비하여 보험을 드는 거로 생각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뇌파 검사만 받으세요."
### DUAL SYSTEM ###
먼저 눈을 뜨고 천장을 확인한다. 다음 벽을 확인하고 이불을 확인한다. 잠자기 전에 일부러 낙서한 종이의 내용을 확인하며, 확실히 자신이 돌아왔다는 걸 인지한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화장실에 가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운동을 일부러 자제하여 여전히 호리호리한 몸매까지 확인한 후, 그제야 마음을 놓고 동생의 방으로 향한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삼 년 동안 신기가 사용했던 방은, 동생이 차지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었다. 신기는 얼굴만 알고 이름은 잘 모르는 축구 선수들의 브로마이드가 잔뜩 벽에 붙어있다. 누워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컴퓨터의 본체는 침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 운동하러 가자."
신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습관적으로 짜증을 냈다. 평소 신구가 일어나는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더 빨랐다. 하지만 함께 운동해주는 형이 싫지 않은지, 신구도 오래 투덜거리지 않고 옷을 챙겨입었다.
"야, 세수 안 해? 새벽에 마주치는 사람 놀래 죽일 일 있어?"
신기의 트집에 신구는 귀찮다는 듯 얼굴을 힘차게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눈곱 따위를 다 떼버린 후, 먼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고 신기도 곧바로 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까지 간 다음 매일 달리던 코스로 슬렁슬렁 뛰기 시작했다. 원래는 운동 삼아 계단으로 다녔는데, 신기가 기절한 날 신구도 계단을 구른 후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녔다. 불교를 믿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신기와 신구 방에 염주를 놓고 달마도를 걸기도 했다. 하루에 네 식구가 다 크게 작게 다친 건, 귀신의 농간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형, 핸드폰은 왜 갖고 나왔어? 전화가 하루에 한 통도 안 오잖아."
왕따는 아니지만, 누군가와 특별히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특히 기절해 있는 일주일 동안 본의 아니게 모든 전화를 씹었기에, 현재 연락이 더 뜸해졌다. 시계의 용도가 거의 전부인 핸드폰을 늘 갖고 다니는 건, 곧 드래곤 파워라는 게임 회사로부터 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 캐릭터의 능력도 전승받아야 하고, 30억 상금도 살림에 보태면 좋고.'
게임이 있다는 것과 게임 캐릭터 중 하나가 자신과 이름이 같았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게임 캐릭터가 성휘 스킬이 있었나 싶기도 했고, 조금 늦게 전승받은 마법들이 주 종목이었나 싶기도 하다.
'어제 아니면 오늘인데, 설마 나비 효과 어쩌고 하면서 문자가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집으로 돌아가니 어머니가 아침 준비로 분주했다. 신구는 다시 잠자러 침대로 기어들어 갔고, 신기는 어머니를 도와 아침 준비를 했다. 신기가 정교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다듬고 정리도 바로바로 해주고 설거지도 순식간에 해치우니, 어머니도 식사 준비가 무척 즐거운 듯 연신 웃음꽃을 피웠다.
허리가 다 나은 아버지는 다시 출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표정이 굳은 걸 보니, 회사 생활이 그다지 즐겁지 않은 것 같다. 나이가 어린 상사가 아버지를 무척 불편하게 여긴다는 소리를 언뜻 들었던 것 같고, 이번에 허리 부상으로 쉬는 사이 다른 사람이 아버지가 하던 업무 대부분을 가져갔다는 푸념을 듣기도 했다.
"신기야. 식사 시간에는 핸드폰 만지지 말자."
"네, 아버지."
"아버지, 형이 여자가 생긴 것 같아요. 어제부터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아요."
"콘돔은 꼭 사용하거라."
아버지를 제외한 세 식구가 동시에 사레 걸렸다.
"왜, 나는 농담하면 안 돼?"
특별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는 출근하고 동생은 학교로 뛰어갔다. 어머니는 혼자 가도 된다는 신기의 만류를 극구 거부하고, 함께 병원으로 갔다. 신기가 검사받는 동안, 다른 환자 가족들에게 아들 자랑하며 즐겁게 보냈다.
"엄마, 이젠 안 와도 된대. 외국에서도 그저 환각이 생기는 걸 제외하면 아무 문제도 없대. 그리고 난 환각도 없으니 더 걱정할 필요가 없어."
"잘 됐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휴학신청을 안 하는 건데."
신기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학비마저 아껴 병원비에 보태려고 휴학을 신청했다. 그러나 신기가 멀쩡하다고 하니, 괜히 휴학한 게 마음에 걸렸다.
"괜찮아. 일 년 쉰다고 해서 남들한테 뒤처지는 게 아니야.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한 몸 만들면 오히려 더 이득일걸."
"그래. 근데 졸업하고 판검사가 될 거니 공무원이 될 거니?"
"엄마, 경영학과 졸업하면 대기업 가야지. 나 태운 그룹에 가서 임원 될 거야."
어머니는 마치 신기가 이미 태운 그룹에 입사한 것처럼 기뻐하셨다. 어머니와 대화를 하며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신기는 몰래 핸드폰에 문자가 오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결국, 문자를 받지 못한 신기는 컴퓨터로 드래곤 파워를 검색했다. 어렵게 드래곤 파워라는 게임 회사의 홈페이지를 방문했지만, 이미지 한 장을 제외하고 어떠한 링크도 걸려있지 않았다.
'나비 효과? 그럼 내일부터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구나.'
- 작가의말
제 머릿속에 나비 한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지금 열심히 날갯짓하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글의 분위기가 아주 조금 변할 겁니다. 첫 파트는 조금 먼 시야라면, 이번에는 조금 가까운 시야입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느껴질지는 제 부족한 실력에 달렸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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