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망명
부산.
결국, 신기는 부산 지휘부에 눌러앉았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자는 생각이다. 그리고 가끔 전투에 참여하여 해골과 좀비를 때려잡기도 했다. 혹시나 모를 암살을 걱정하여, 신기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더운 날씨에도 복면하고 전장에 나섰다.
9월 21일 저녁 8시, 상황이 안정되었다. 첫날 출현한 괴물과 이튿날 출현한 괴물을 대부분 처리했다. 난잡한 가운데 일말의 질서를 찾아냈고, 특별팀과 지원팀을 적절하게 안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휘부는 여전히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사망자는 1397명입니다. 서해안에는 사망자 세 명이 발생했고, 동해안에 429명, 남은 사망자는 남해안과 제주도에서 발생했습니다. 그중 좀비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삼백 명에 육박합니다. 울릉도는 사망자가 없습니다."
보고를 듣는 사람도, 보고를 올리는 사람도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죽은 사람 중에 군인이나 각성자는 천 명 정도이고, 남은 사람은 민간인이다. 민간인의 피해는 대피 명령을 어기고 생방송을 하거나 호기심에 기웃거리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부상자들은 몇 곳에 모아놓고 치료하고 있습니다. 코드 네임 '등불'이 완치시켜도 정신적 충격으로 전장으로 복귀하기 힘듭니다."
함께 모아 놓으면 서로 동조 의식이 생겨서 치료가 더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각자 고향 혹은 희망하는 지역으로 가서 심리치료를 받도록 했다. 물론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전투에 참여한 사람도 소수지만 존재했다.
"총기와 탄약을 보충하고 충원도 넉넉히 한다. 이틀 동안 모인 자료를 토대로 배치를 적당히 조절하도록."
자료를 취합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 보고서를 토대로 후속 조치를 상의하고, 지시사항을 각 지휘부와 전방에 전달하고 나니 새벽 3시가 되었다. 9월 19일부터 벌써 사흘째 뜬눈으로 보냈다.
부하들이 나가고, 군의 핵심 인물들만 남았다.
"다음 대통령은 강 회장이 찍는 사람이 되겠군. 아니면 강 회장 본인이 하든가. 건강하기가 장년 못지않은걸 보면, 본인이 대선에 나설 가능성이 크겠네."
"허수아비를 내세우지 않을까요? 아들이 갓 부총리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김 소령, 태운 그룹이 비축한 식량과 의복류와 생필품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귀가 어두워 얻어듣지 못했습니다."
"유통기한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십 년 동안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정도가 된다더군."
"가능한 일입니까?"
"코드 네임 '등불'이 세계 유수의 대부호들을 치료해주며 얻어낸 자원들이라네. 미리 알았는지 삼 년 전부터 자원을 비축하기 시작했지. 지금 우리가 쓰는 총과 총알도 다 태운 그룹이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것이네."
"그럼 이후 한국은 태운 공화국이 되는 거군요."
"최소 십 년은 태운 그룹의 천하라고 봐야지."
"대령 각하, 혹시 태운 그룹에 선이 있으면 대주십시오. 진급은 안 바라도 자리는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반대파'에 속하는 장성들은 둘의 대화에 마음이 흔들렸다. 나눠야 할 파이가 작아 편을 가르고 싸워야 했었는데, 계속 반대편에 서 있다가는 부스러기도 못 얻을 처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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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쿵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벽이 무너졌다. 철벽 각성자의 강화를 받지 못했고, 철근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콘크리트 벽은 좀비의 돌진을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지휘관은 무전기를 들고 상부에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마지막 방어선이 돌파당했습니다."
무전기를 버린 지휘관은, 핸드폰을 꺼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통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좀비의 돌진이 지휘관에게 죽음에 이르는 충격을 전달했다.
제방 뚝은 작은 개미구멍으로도 무너진다. 수비선 역시 마찬가지로, 한 곳이 돌파당하자 그 여파가 다른 곳으로 미쳤다. 수백의 화산에서 쏟아져나오는 괴물과 해안에서 새까맣게 몰려오는 괴물을 막지 못한 일본 자위대는 급격히 무너졌다. 천천히 걸어오는 괴물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고, 총을 버리고 도망치는 자들도 부지기수다.
수비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재빨리 천황궁에 전해졌다. 일본은 곧바로 미국에 핫라인을 연결했다.
"망명을 요청합니다."
미국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한국으로 가는 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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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지하.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인 신기지만, 특별히 짬을 냈다. 화질이 그렇게 좋지 않은 화면은, 한국과 일본의 망명 관련 비밀회의를 생중계로 보여주고 있다.
"세 개의 필수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와 상입니다. 둘째는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입니다. 셋째는 대마도를 일본과 한국 공동 소유의 땅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조건이 있지만, 한국이 절대 양보하려 하지 않는 세 가지 조건이 협상의 쟁점이 되었다.
미국의 거절 아닌 거절로, 일본은 한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봤다. 그리고 사망자가 삼천 명도 안 된다는 한국 정부의 발표에 무척 놀랐다. 사실 삼천 명 중에 절반 정도는, 괴물이 아닌 사람 손에 죽은 사망자다. 혼란을 틈타 살인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경찰 인력의 부족으로 사건 해결에 애먹고 있다. 사회적 안정을 고려해, 살인 사건 사망자들도 괴물에게 죽은 것으로 일단 발표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는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상 조건이 너무 과합니다. 삼 년 전에 한국 정부가 제출했던 보상의 18배가 됩니다."
"일본 정부는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문제는 일단 제쳐두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협의가 이루어진다면, 그때 다시 보상을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넘어가면, 독도는 어차피 한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성명이 꼭 필요한지 의문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오래된 우방입니다. 한국이 어려울 때 일본이 경제적 원조도 많이 해줬고요. 그리고 침략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일본은 그때 진심으로 조선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서구 열강들에 수탈당하는 아시아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극단적인 결책을 내린 것입니다. 그때 일본만 잘 되자는 게 아니었고, 대동아 공영을 구호로 삼지 않았습니까. 일본 덕분에 아시아 사람들이 서구의 선진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세계의 중심이 점점 아시아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일본 대표의 말을 듣던 강 회장이 껄껄 웃었다.
"신 상무, 저자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쪽으로는 견식이 짧아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린 나이라 그런지, 일본에 악감정은 없습니다."
"저 세 조건은, 신 상무가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신기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시간을 돌리고 나서 가족도 구했고, 천만이 넘는 사람도 구했다. 물론 노력해서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신기는 이미 자신이 갖춘 능력 이상의 성과를 냈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D를 어찌 처리할지 걱정되지만, 그래도 여유를 꽤 갖출 수 있다.
"희생양이라는 말을 잘 아시죠?"
"맹수를 맞닥뜨릴 때, 동료를 내주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연약한 동물들의 생존법이지."
"지금 한국은 괴물의 침공에 아주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사망 인구만 천만 명에 육박합니다. 중국 정부는 사망 통계를 낼 때, 실종 인원은 포함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죠. 만약 실종 인원까지 합치면 오천만은 될 겁니다."
강 회장은 신기의 말을 듣기만 했다.
"지금 정부가 나서서 잘 막아내고 있다고 말해도, 태운 그룹이 나서서 안전하다고 말해도, 국민은 불신으로 차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미국에 엄청난 정보를 건네줬죠."
이 사태의 원인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을 미국에 흘렸다. 안 그래도 괴물의 상륙 날짜를 정확히 알아내어 사람들의 의심을 산 영국이었다. 탐구 스킬로 많은 정보를 알아내고 자신감이 팽창한 에릭이, 다른 국가들이 앞서나가자 급한 마음에 자충수를 둔 것이다.
"미국이 일본에 한국으로 망명하라고 말했다고?"
"그렇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은 미국의 의사를 쉽게 거절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것이죠."
"일본이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에서 양보하는 것으로, 국민의 사기를 끌어 올리려는 것이죠. 한국 정부와 언론에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믿지 않겠지만, 일본 정부가 성명을 발표하여 독도와 위안부 문제에서 확실한 양보를 한다면 믿겠죠. 일본 정부가 망명해 온다는 것까지 밝혀지면, 국민은 대한민국이 안전한 나라라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마도를 공동 소유로 하려는 것은, 대마도를 중간 보급기지로 사용하려는 목적입니다. 우리는 당연한 걸 요구한 것일 수 있지만, 어쨌든 일본은 희생양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일본을 도와도 큰 이득은 없을 것 같네."
"일본의 괴물 출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셨을 겁니다. 한국은 운 좋게도 북에서는 북한이 백두산에서 쏟아져나오는 괴물을 막아주고 있고, 서쪽에서는 중국이 분담하고 있습니다. 동쪽과 남쪽을 일본에서 확실하게 분담해 준다면, 이번에 새로 얻은 땅을 빠르게 안정화할 수 있습니다. 대경에서 석유가 나고, 흑룡강이 중국에서 농산물 생산량 1위라고 하더군요. 길림은 강냉이 생산량이 세계에서도 손꼽히고요."
"그 큰 땅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
"당장은 아닙니다. 우선 북한을 통일해야죠. 미국 농장처럼 기계화하고, 농사지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몇 개만 지키고, 화산 근처에 소각장을 만들어 괴물 밀도를 적당히 조절해야 합니다. 괴물 밀도를 너무 낮춰버리면, 밀도가 높은 곳의 괴물들이 또 건너오거든요."
"그러니까, 거주하지 않고 농지와 유전으로만 이용하자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훈춘이라는 곳에 항구를 만들고 배로 실어오면 됩니다. 도로는 적당히 관리해주면 되고요."
"이러한 계획을 발표해봤자, 국민은 안 믿어주겠지?"
"그럼요. 그러니 일본의 사과와 망명, 북한 통일 등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기회가 되면 중국이 동북공정에 대해 사과하게 하고, 고구려 역사의 귀속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자네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군. 내 사위 될 생각은 없는가? 물론 손녀사위 말하는 거네."
"죄송합니다. 손녀분들 모두 회장님 닮으셔서."
강 회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미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에서는 항복한 일본 대표는, 한국 정부의 대표와 대마도 문제를 두고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 회장도 신기도 결과는 이미 정해졌고, 일본 대표는 그저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직감했다.
"제가 사용하는 복면의 태운 그룹 로고, 좀 더 이쁘게 디자인 해주십시오. 인터넷에 복면이 후지다는 댓글이 많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이런 사소한 일은 김 비서에게 말하게. 내가 명색이 바지 회장인데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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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해안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동해안은 아직도 들쑥날쑥하고, 남해안은 정도가 훨씬 심했다. 일본이 지난번보다 좀 더 버티면서, 매일 건너오는 괴물의 숫자가 일정치 않은 것이다.
"형, 혹시 그 복면이 형이야?"
오랜만에 동생과 통화했는데, 깜짝 놀랄 소리가 들려왔다.
"복면이라니? 무슨 소리야?"
"형 지금 이 난리에 집 안 들어오면, 이상한 거 알지?"
'제길, 입대한다고 할걸.'
사실 입대로 위장하는 걸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부모님이나 동생이 부대에 불쑥 찾아올 수도 있어 포기했다. 학교 다니면서 창업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밖을 나돌았고, 대다수 부모님이 그렇듯 신기의 부모님도 순순히 믿어줬다.
'일 터지기 전에 입대한다고 할걸. 그때는 너무 바빠서 생각 못 했구나.'
"오오. 변태 가면이 진짜 형이었어? 걷는 모양이나 뒤로 돌 때 왼쪽 발꿈치로 도는 거 보고 눈치챘는데."
신기가 침묵하자 신구는 자신의 눈썰미가 나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변태 가면이라니?"
"복면을 하고도 모자이크하는 걸 보고, 다들 변태가 틀림없다고 그래. 바바리 변태랑 반대되게, 꽁꽁 싸매는 베일 변태."
"아버지랑 엄마한테 비밀이야."
"형, 내 친구들 다 노트북 하나씩 있는데."
"네 스무 살 생일 선물로 차 한 대 뽑아주려 했는데, 소원이 노트북이라면 할 수 없지 뭐."
"아냐. 축구 선수가 노트북 쓸 시간이 어디 있어. 그냥 못 들은 거로 해줘."
통화를 마친 신기는 갑자기 화가 났다.
"이 새끼는 내가 걱정되지도 않아? 괜찮냐는 안부 한 마디도 없네?"
- 작가의말
신기의 곁에는 박영광이 있습니다. 또라이여서 그렇지, 머리는 꽤 돌아갑니다. 물론 아주 똑똑한 건 아닙니다.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아이디어를 내는 스타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신기도 머리가 좋습니다. 관심 분야가 좁고 경험이 부족해서 좋은 머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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