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시코쿠.
사방에서 구울이 미친놈처럼 앞장서서 달려오고 그 뒤로 좀비와 해골도 까맣게 몰려있다. 평소에 묵직하게 움직이던 구울이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달려왔고 멍청하던 해골이 갑자기 뇌가 생겨난 것처럼 헤매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뛰었다. 좀비는 마치 관절에 윤활유라도 바른 것처럼 부드러운 동작으로 움직였다.
박철이 거의 전력을 다해서 미끼 스킬을 사용했는데 생각보다 적은 2만 정도의 괴물만 몰려왔다. 슬금슬금 도망을 치던 자들은 갑자기 몰려오는 괴물에 아우성치며 도로 신기 쪽으로 달려왔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놈들을 한 사람에게 대여섯씩 달려들어 아주 쉽게 제압했다. 박철이 식별 스킬로 전부 각성자임을 확인했고 손을 뒤로 묶은 후 허튼짓을 못 하게 칼과 총구를 겨눴다.
누군가가 격하게 항의하다가 도시바에게 뺨을 세게 얻어맞았다. 아까 총에 맞은 아이가 다가가서 잡힌 녀석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옷에 총알구멍이 있는데 사람은 멀쩡한 것을 확인한 포로들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꼬리에 불붙은 소처럼 달려오던 괴물들이 갑자기 느려지고 수백의 눈사람이 뛰쳐나갔다. 최영웅이 괴물 무리에 뛰어들어가 미친놈처럼 기다란 검을 휘둘렀고 마법 스킬 사용자들이 사방으로 스킬을 난사했다. 포로로 잡힌 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응에 입을 크게 벌렸다.
갑자기 2만에 달하는 괴물들이 우수수 쓰러지며 순식간에 전투가 끝났다. 곰과 개들이 부지런히 달아 다니며 구슬을 주워왔고 수백 명이 함께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순식간에 끝난 전투와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어안이 벙벙하던 포로들이 눈물 콧물 흘리면서 끊임없이 애원했다.
"심문해."
절망에 오래 담겨있다가 희망을 맛보고 광신에 빠진 자들이 포로를 안 보이는 곳에 끌고 가 모질게 고문했다. 든든한 등을 바라보며 키워가는 희망의 불꽃에 재를 뿌리는 자들을 향한 분노는 한여름 오후 두 시의 태양보다 더 뜨겁고 엄동설한의 눈바람보다 더 차갑게 포로들을 괴롭혔다. 육체의 고통보다 노골적으로 전해져오는 악의에 포로들은 너나없이 오줌을 지렸다.
자력으로 걸을 수 없는 포로들을 질질 끌고 삼십 분을 이동했다.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공장이 보였고 몇몇 각성자가 무기를 들고 달려 나왔다. 수백 명을 상대로도 기세등등하던 자들은 최영웅이 총 한 발 쏘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안을 정리하세요."
최영웅이 젊은 남자들을 이끌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크기가 만만치 않은 공장은 사무를 보는 건물이 있고 창고로 보이는 건물도 있었다. 한쪽 구석에 폐수처리장으로 보이는 곳에 목이 매달린 시체 세 구가 썩어가고 있다.
효주 대신 요코가 강아지들을 거느리고 안에 들어갔다. 요코의 강아지들은 사람을 곧잘 찾아냈다. 창고로 보이는 곳에서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멍이 잔뜩 든 여자들을 발견한 요코는 상냥한 어조로 여자들을 달래고 몸을 가릴 옷들을 가져다 나눠줬다. 여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울었다.
안에 남아있던 각성자 한 명이 반항하자 최영웅이 다가가서 머리를 걷어찼다. 강화 스킬을 사용해서 차인 자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최영웅을 따르는 남자들은 곧 공장 안의 각성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기준을 알았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뺨을 때리고 몽둥이로 팔다리를 후려쳤다. 간혹 바닥에 쓰러뜨리고 배를 사정없이 밟는 자들도 있다.
혼절한 자들은 머리채를 잡거나 팔다리 한 짝만 잡고 질질 끌어내 왔다. 의료소로 보이지만 감옥처럼 사용되는 곳에서 여기저기 온전하지 못한 남자들이 발견되었다. 다 모아놓은 후 신기는 박철에게 각성자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온전한 자들 대부분은 각성자이고 극히 일부만 각성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감옥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한 자 중에 각성자가 한 명 있었다. 그자를 통해 이들의 만행을 들은 신기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팰러딘, 이번 심판은 나에게 맡겨줄 수 있어?"
불이 뚝뚝 떨어지는 제이크의 눈을 보며 신기는 숨을 골랐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나서야 신기는 제이크의 요청에 답했다.
"살려두지 않는다고 약속해줘."
제이크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리고 곧 밖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불러들였다. 폐수장에 있는 시체들은 최영웅이 사람을 시켜 수습했다.
"내 말을 최대한 정확하게 저들에게 전달하도록."
제이크는 심호흡한 후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제이크라고 하는 봉인 마법을 익힌 B급 헌터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너희들의 왕은 괴물이 나타나자마자 국민을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의 가문에 손님으로 머무르고 있지."
이미 깊은 절망에 빠져서인지 제이크의 말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기 내 동료들을 소개하마. 테이머 강은 열한 살 소녀지만 세계 최고의 테이머이다. B급 헌터로 수십 마리의 펫을 거느리고 있지. 그리고 여기 샤먼 박, B급 미끼 헌터로서 세계 최고의 샤먼이다. 여기 나이트, C급 구슬 헌터고 근접전 최강이다. 구슬 헌터가 뭐냐고? 바로 지금 소개할 우리와 너희의 왕, 세계 최고의 헌터인 팰러딘이 각성자로 만들어준 사람을 말한다."
일반인을 각성자로 만들어준다는 말에 사람들은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검은 구슬이 보일 거다. 이 구슬을 먹고 팰러딘의 가호를 받으면 헌터가 된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 계속 살아갈 용기가 있는 자는 나와서 구슬을 삼켜라. 그러면 우리와 너희의 왕이 너에게 살아갈 힘을 줄 것이다."
"단, 너희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나오면 반대해라. 많은 사람이 반대하면 그자는 구슬을 먹지 못하고 헌터가 되지 못할 것이다."
말이 끝나기 바쁘게 왜소한 체격에 다리를 저는 여자아이가 불쑥 일어서서 절룩거리며 걸었다. 다리가 불편해 차라리 손으로 바닥을 짚고 기는 것이 훨씬 빠를 텐데 고집스럽게 걸었다. 앞으로 나오려고 몸을 일으키던 자들이 여자아이가 나서자 모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어라."
여자아이는 징그러운 구슬을 꾸역꾸역 삼켰다. 여자아이가 손을 멈추자 누군가가 방독면을 가져다 여자아이에게 씌웠다. 여자아이가 뭐라고 계속 말했지만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계속 나오라. 원하는 자들은 다 나오라. 너희는 정녕 살아갈 용기마저 없는 것이냐? 우리는 너희에게 기회와 힘만 줄 뿐 용기까지 주지 않는다."
희망을 버리지 않은 자들이 속속 나와서 구슬을 삼켰다. 그러나 뭐가 그리 두려운지 서른 명 정도 나서고 지원자가 사라졌다. 포박해서 한쪽에 무릎 꿇린 각성자만 46명이고 일반인은 2백 명이 조금 넘었다. 그 2백 명이 넘는 사람 중에서 앞으로 나선 사람이 서른밖에 안 된다.
"형, 쟤 각성했어요."
무거운 침묵 속에서도 시간은 평소대로 흘렀고 가장 먼저 나선 여자아이가 각성에 성공했다. 신기는 다가가서 아이의 방독면을 벗겨주자 도시바가 바로 다가와서 여자아이에게 다섯을 센 후 동의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떠올리라고 말했다.
바닥에 앉아있던 여자아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게 꿈이 아닐까 걱정되는지 움직일 엄두를 못 냈다. 도시바를 비롯한 열성 청년들의 응원에 여자아이는 용기를 내서 걸었다. 다리를 절지 않고 똑바로 걸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여자아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보라. 세상에 괴물이 나타나고 절망이 우리를 덮쳤지만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살아갈 용기를 가진 선량하고 핍박받던 자들이여, 너희에게 새롭게 태어날 기회가 왔다. 너는 살아갈 용기와 투쟁심만 있으면 된다. 우리가 너희에게 힘을 주겠다."
그때 옷도 깨끗하게 입고 얼굴도 멀쩡한 자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사태를 지켜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여자들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일본어를 어려워하는 신기마저 저들이 가장 많이 외치는 말이 '안돼'라는 걸 알아들었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나오는 남자의 앞을 가로막은 최영웅이 검 대신 나무 몽둥이로 후려쳤다. 최영웅을 우상으로 따르는 젊은 남자들이 가세해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찼다. 기절할 때까지 때린 후 포박해서 무릎 꿇린 각성자들 쪽으로 끌고 갔다.
여자아이의 기적적인 완치와 최영웅이 보여준 단호한 태도에 마음이 흔들린 사람들이 연신 앞으로 와서 구슬을 삼켰다. 오면서도 매일 두세 번씩 괴물을 불러다 처리했기에 구슬은 넉넉했다. 마지막에는 방독면이 모자라서 수건이나 천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시간은 느리지만 꾸준히 흘러 2백 명이 조금 넘는 자들이 모두 각성자가 되었다. 그리고 제이크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심판은 간단하다. 저기 있는 자들을 하나씩 끌어내 온다. 그럼 너희는 그저 둘 중에 하나만 외쳐라. 죽여와 살려. 너희가 모두 죽여를 외치거나 살려를 외칠 때까지 나는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한 사람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면 이 심판은 계속된다."
예외는 없었다. 각성자 모두와 몇몇 일반인은 살려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가장 처음 반항한 자는 최영웅이 총으로 머리를 쏴 즉사시켰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두드려 패는 것으로 겁을 줘야겠지만, 진짜로 다 죽일 생각이기에 깔끔하게 처리했다.
"나는 이들이 어떤 죄를 어떻게 지었는지 관심이 없다. 그저 이들이 죽어야 할 자인지 살아야 할 자인지만 궁금했을 뿐이다. 그리고 궁금증이 풀린 지금, 나는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제이크는 일본인이 자신의 말을 다 통역하기를 기다려서 말을 이었다.
"이들의 형을 집행할 용기 있는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다리를 절던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섰다. 최영웅에게 다가간 아이는 쑥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혼다의 도움으로 최영웅은 여자아이가 자신의 검을 빌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란 검을 받아든 여자아이는 다소곳이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올렸다.
본인 키보다 더 큰 검을 질질 끌고 간 여자아이는 그 검을 휘둘러 남자 하나를 후려쳤다. 괴물을 상대하는 용도로 만든 검이기에 날을 날카롭게 세우지 않아 힘이 약하고 휘두를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몽둥이나 다름없다.
퍽, 퍽, 퍽. 여자아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검으로 계속 후려쳤다. 자존심 때문에 꿋꿋하게 버티고 있던 남자가 결국 바닥에 쓰러지자 여자아이는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검을 추켜든 후 내리찍었다. 목을 견줬는데 힘이 부족하고 동작이 어설퍼서 머리를 쳤다. 퍼석 소리와 함께 머리가 깨지고 뇌수가 흘러나왔다.
"강화 스킬을 사용하면 힘이 세진다고 알려줘."
신기의 말을 전해 들은 여자아이는 강화 스킬을 사용하여 검을 휘둘렀다. 스킬 레벨이 낮아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더욱 수월하게 검을 다뤘다. 여자아이가 세 번째 남자에게 향할 때 누군가가 말렸다.
"아즈미, 내게도 기회를 줘."
아즈미의 손에서 검을 건네받은 여자는 아즈미가 목표로 하던 남자를 검으로 때려죽였다. 약 5분에 걸쳐 검으로 서른 번 정도 때려서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게 했다. 집요하게 노린 목에는 멍이 퍼렇게 들었다.
처형은 2시간 남짓이 지속하었다. 모든 사람이 처형 과정을 눈 돌리지 않고 똑똑히 지켜보았다. 신이 내린 심판이고 왕이 허락한 처형이다. 생명을 거두는 잔학한 장면이 아닌 정의를 세우고 신의 의지를 확인하는 숭고한 순간들이다.
처형이 끝나자 죽은 자들의 시체를 멀리 가져다가 쌓은 후 기름을 뿌리고 태웠다. 그냥 남겨두면 시체 조종사가 좀비나 해골 심지어 구울로 일으킬 것 같아 오는 길에 간혹 눈에 띄는 시체도 전부 불태웠다. 열흘의 이동으로 자동차가 있어도 다닐 수 있는 길이 변변치 않음을 확인했기에 힘들게 끌고 오던 휘발유를 처리해버렸다. 어차피 오래되면 사용하지도 못하게 되기에 크게 아깝지는 않다.
"팰러딘, 왕의 위엄을 보여야 할 때야."
새롭게 합류한 2백 명의 각성자들은 공장의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박철이 만이 넘는 괴물을 불러오고 신기가 순식간에 처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짧은 시간에 강렬한 충격을 거듭 받은 자들에게 제이크가 쐐기를 박았다.
"왕은 앞장서서 싸우고 너희를 지켜주는 존재다. 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하고 용기 있는 자들을 살아가게 하는 존재다. 의미 있게 살고 싶은 자, 의미 있게 죽고 싶은 자, 우리와 함께하고 왕을 따르라."
- 작가의말
왜 제이크가 주인공에게 향해야 할 포커스를 빼앗느냐고요? 왜냐면 주인공은 아직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서 빨리 중학교 2학년의 그 풋풋함을 되찾아야 하는데, 경지가 많이 부족합니다. 어쩔 수 없이 제이크가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 수위면 19금 안 달아도 되죠? 묘사를 많이 자제했습니다. 각성자들이 저지른 악행도 굳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고, 처형하는 장면도 간략하게만 서술했습니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