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
제주도.
신기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였다. 대신교가 제주도에 지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에서 신기의 혼례식이 열리고 있다. 동생 신구가 빨리 결혼하고 싶다며 재촉하는 바람에 원치 않는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신부 입장."
신부가 어떤 남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왔다. 남자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쭉 뻗은 긴 다리, 너무 과하지 않게 적당히 넓은 골반, 잘롯한 허리, 분윳값 아낄 수 있을 것 같은 가슴, 완벽에 가까운 쇄골 라인, 시원한 곡선을 그리는 목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젖살이 포동포동한 효주의 얼굴이 있다.
"삼촌, 우리 결혼해요."
화들짝 놀라 깨어난 신기는, 땀에 푹 젖은 잠옷을 보며 기가 막혔다. 초월자 주제에 '악몽'을 꾸지 않나, 거기에 식은땀까지 흘렸다.
'제길, 이래선 힘만 센 꼬맹이랑 뭐가 달라. 난 그저 D의 열화판에 불과해.'
하루의 아침을 자기 비하로 시작한 신기는 찬물에 샤워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신구가 사귀는 여자친구와 결혼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부모님의 은근한 압박이 계속되었다. 많은 나라의 미인들이 제주도에 상주하고 있고, 유럽 여러 왕실의 공주들도 대부분 제주도에서 살았다. 그리고 일부 왕자들까지. 제길 할이다.
'스트레스가 심해도 그렇지. 하필 왜 효주냐고.'
D를 쫓아내고 5년이 지났다. 이미 효주가 20살이니 말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효주를 떠올린 신기는 자기 뺨을 힘껏 때렸다.
'정신 차리자. 일단 일과부터 끝내자.'
런던의 폐공장 지하는 감옥으로 변했다. 카메라로 24시간 감시하고, 일반인과 각성자가 정기적으로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한 달에 한 번씩 신기가 직접 가서 살펴보기도 했다. 방금 다녀왔기에 컴퓨터로 영상을 확인하고, 감시자들의 보고서를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일과를 끝냈다.
런던에 갈 때마다 D의 심장 조각에 손을 얹었고, 그때마다 D가 살아있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엘프 여왕과 D는 뭐가 그렇게 끈끈할까 생각했지만, 답을 알 리가 없다.
가족들과 불편한 아침을 챙겨 먹었다. 동생은 곧 결혼할 예비신부와 화상통화를 하며 밥을 먹었고, 부모님은 손주 타령을 하며 은근히 신기에게도 압박을 가했다.
'신화를 보면 제우스를 비롯한 초월자의 자식은 초월자 혹은 반신으로 불리는 힘만 강한 초월자였지. 차라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이 짐을 넘겨줄까?'
그러나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신화에서 보다시피 신들 사이의 다툼이 무척 심했다. 그건 동양이나 서양 신화 가리지 않는다. 괜히 자식들끼리 혹은 자식과 반목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법칙을 주장하며 무력충돌을 할 가능성이 있다.
아침을 먹고 넋 놓고 있는데 김 비서의 아들이 찾아왔다.
"회의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신기는 그제야 오늘이 정기 회의를 하는 날임을 깨달았다. 밖으로 나가 차에 탑승한 신기는 차창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의미한 풍경을 음미했다. 초월자라면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의문을 마음에 품고 계속 노력했지만, 아직 아무 성과도 없다.
회의는 다소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각자 찾아낸 자료들을 갖고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모두 함께 토론했다. 이미 3년 동안 무수한 가설이 세워졌고 전부 반박당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초월자에 대한 정의와 정보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D가 각성자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정보가 확실하다면, D는 허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게 아닐까요?"
신기의 눈에 번쩍 빛이 들어왔다. D가 떠난 후 각성자들은 스킬이 사라지고 육체 능력이 약해졌다. 그러나 각성자 정보는 여전히 남아있다. 등급과 레벨은 그대로이고 그저 스킬과 강해졌던 육체 능력만 사라졌을 뿐이다. 중동에 나타났던 강신사제의 종족, 성령족의 허신은 종족이 원하면 힘을 무조건 빌려줘야 하는 허수아비 신이었다.
'허신이 사라지자 성령족은 철저히 무너졌다. 반면, D가 다른 세상에 넘어갔지만, 각성자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하고 각성자들도 스킬만 잃었을 뿐이다. 이는 두 세상이 서로 연결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건, D가 남긴 심장 조각이 각성자 시스템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신기는 회의를 중단하고 바로 런던으로 출발했다. 전용기보다 직접 날아가는 게 빠르지만, 그러면 세상은 또 신기의 뉴스로 도배된다. 조급한 마음을 달래며 신기는 비행기로 천천히 움직였다.
### DUAL SYSTEM ###
런던.
폐공장 지하에 도착한 신기는 다짜고짜로 에릭 일행에게 검은 구슬을 먹였다. 에릭 일행이 각성자가 되자 신기는 바로 이들을 파티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열셋에게 힘을 전해주던 D의 심장 조각이 파티 시스템의 작용으로 각성자 시스템에 힘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내 가설이 틀리지 않았다.'
힘의 소모가 갑자기 커지자 D의 심장 조각이 힘을 끌어오기 시작했다. 그 힘을 조심스럽게 역추적하니 세상과 세상을 가로막은 막이 나타났다. D의 심장 조각은 다른 세상에 있는 D로부터 힘을 보충받고 있었다.
"에릭, 너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곳에서 탈출하지만 않으면 원하는 걸 최대한 들어주겠다."
에릭을 비롯한 열세 명 전부 A급 각성자다. 각성자 시스템이 동력원을 찾았기에 이들도 힘을 회복한다. D의 심장 조각이 직접 각성자 시스템에 힘을 공급하게 할 방법을 연구해내기 전까지 에릭 등을 죽일 수도 없다.
폐공장 지하를 감옥에서 호텔로 바꾸고, 신기가 D의 심장을 각성자 시스템의 직접 동력원으로 만들 궁리를 할 때, 세상은 각성자들이 힘을 되찾고 있다는 뉴스로 들썩였다. 신기가 런던으로 향한 것과 연결하여, 혹시 또 다른 괴물의 침공이 발생하는 게 아닌지 사람들은 걱정했다.
### DUAL SYSTEM ###
제주도.
신기는 정기 회의 때마다 효주에게 시달렸다. 정기 회의가 아니면 효주가 찾아와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기에, 정기 회의는 신기에게 가장 싫은 시간이다.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범의 새끼를 잡으려면 범의 굴에 들어가라. 신기는 자발적으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한껏 치장한 효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타났다. 화장하는 효주를 기다리는 데 1시간이 들었다.
쭉 뻗은 다리, 적당한 골반, 잘록한 허리를 자랑하며 효주가 다가왔다. 얼굴의 통통하던 젖살이 다 가슴으로 간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이고, 얼굴은 꿈에서 본 앳된 얼굴이 아니라 여인의 향기를 풀풀 풍기는 성숙한 얼굴이다.
"안돼."
효주가 입을 열기 전에 신기가 선수를 쳤다.
"헐. 삼촌, 우리 그저 친구로만 남아요."
"라고 말하려 했는데, 삼촌이 거절했네요."
"친구가 안 된다는 말이었어. 나이 차이가 이렇게 큰데 친구 먹을 수 없지."
신기는 자신의 순발력을 칭찬했다. 아주 매우 칭찬해.
"프러포즈하러 온 게 아니었어요?"
"아냐. 너 혹시 스킬 생기지 않았나 해서 찾아왔어."
"아뇨. 그대로예요."
신기는 효주가 자꾸 귀찮게 하는 바람에 효주에 대한 생각을 피했다. 그런데 최근 여러 의문이 조금씩 풀리거나 풀릴 기미가 보이면서, 갑자기 효주가 봉인 스킬로 자신을 '해코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의문에는 D와 엘프 여왕이 중심에 있었고, 좀비 드래곤이 한 다리 걸쳤다. 그러나 효주는 엘프 여왕이 나타나기 전이었고, D하고만 연관이 있다. 그 연관을 파헤치면 뭔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진화 스킬 한 번 써볼까?"
"결혼 선물이에요?"
"응, 아니야."
"그럼 거절할게요."
"너에게 좋은 스킬이야. 왜 채권자처럼 행세하는 거야?"
"그럼 뽀뽀 한 번."
"안돼."
"키스 말고 뽀뽀. 볼에다 할게요."
신기의 마음속에서 양념통 선반이 쓰러지며 온갖 양념이 쏟아져나왔다. 짜고 시고 달고 시큼하고 맵고 쓰고.
"좋아. 그리고 3초 이내에 뽀뽀 끝내야 해. 종일 내 볼에 입술 붙이는 건 안 돼."
"헐."
효주의 동의를 얻어낸 신기는, 계약금을 선지급했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입술이 얼굴에서 떨어지자,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진화."
신기의 몸에서 기력이 쑥 빠져 효주에게로 향했다. 비록 기력의 양이 1/4로 줄었지만, 여전히 대단한 양이다. 웬만큼 기력을 써도 전혀 티가 안 나는데, 이번 진화 스킬은 티가 날 정도로 많은 양이 빠져나갔다.
"추방?"
신기는 이를 악물었다. 효주가 얻은 스킬은 추방. 초월자를 원래 세상으로 쫓아 보내는 스킬이다. 이 스킬을 일찍 얻어냈으면 많은 사람이 죽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날 봉인했던 건가? D는 엘프 여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봉인 당하기 전의 신기라면 D를 불러내서 처리하는 데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D를 불러낼 방법을 알아낼 생각보다 효주의 스킬로 초월자들을 추방할 생각을 먼저 했을 것이다.
효주와 D의 연관을 알아내면 뭔가 실마리가 보일 것 같았는데, D와 엘프 여왕의 만남을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자 시들해졌다. 그때 효주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신기는 자신이 실망한 티를 너무 냈나 싶어 자책했다.
### DUAL SYSTEM ###
제주도.
멋진 양복을 입은 신구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화장을 어찌 두껍게 했는지, 신기가 이계에서 진면목을 본 뱀파이어 드래곤보다 더 하얗다. 뱀파이어 드래곤은 말간 우유 느낌인데, 신구는 귀신 영화에서 나오는 하얀 분칠한 귀신 얼굴과 같았다.
"신부 입장."
어두운 금발에 까만 눈동자가 무척 매력적인 신부가 등장했다. 독일과 한국 혼혈인 신부는 한국어가 무척 능숙했다. 긴장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신구의 입이 헤 벌어졌다.
'잡혀 살겠구나.'
건장한 체구에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신구의 외모도 신부 못지않다. 주례는 강 회장이 맡았다. 하객 중에 강 회장보다 대단한 사람이 많지만, 강 회장이 똥개보다 못할 수는 없다. 제주도는 강 회장의 안방이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너나없이 신기와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려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동남아의 왕족이나 아프리카의 추장 정도는 한끝에 가서 서야 했다.
혼례 절차가 끝나고 부케 던지는 시간이 되었다. 신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부케를 높이 던졌다. 원래 핸드볼 선수였던 신부는 어마어마한 팔심을 자랑했고, 부케가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위치로 많은 여자가 몰려갔다.
그때 효주가 힐을 벗고 맨발로 달려가다가 힘껏 점프했다.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부케를 바라보며 팔을 뻗고 몸을 슬쩍슬쩍 띄우던 여자들이 닭 쫓던 개가 되었다. 부케를 받아들고 안전하게 착지한 효주가 왼손으로 V를 그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효주가 부케를 받자마자 신기는 빠르게 식장을 벗어났다. 무슨 폭탄 발언으로 신기를 괴롭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는 효주를 너무 얕잡아봤다. 아무도 모르게 백록담의 폐쇄된 등대에 가서 숨었지만, 효주는 헬기를 타고 쫓아왔다.
"삼촌, 나 부케 받았어요."
"축하해."
"자기 일인데도 너무 무관심한 거 아니에요?"
"여긴 어떻게 알아냈어?"
"비밀."
신기는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레스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효주도 신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삼촌은 내가 싫어요?"
"그런 거 아냐."
"그런데 왜 나랑 결혼 안 해요?"
"넌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면 결혼하냐?"
"혹시 내가 예전에 스킬 쓴 것 때문에 그래요?"
"그런 거 아냐?"
"그럼 어떤 건데요?"
"멈춰. 그 이상의 거리는 허락하지 않는다."
슬금슬금 몸을 붙여오던 효주가 멈췄다. 신기는 하늘을 바라보며 머리를 비웠다. 머릿속에서 서로 충돌하며 자신이 진실이라고 우기는 수많은 가설을 다 지웠다. D와 엘프 여왕이 무슨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마음도 지웠다. 인류를 하나의 종족으로 합치는 게 맞는지, 신기를 왕으로 모시는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게 맞는지, 새롭게 통합한 교리를 전파하며 덩치를 불려가는 대신교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게 맞는지. 이 모든 고민도 털어버리고 그저 푸른 하늘을 쳐다봤다.
효주도 신기에게 감화된 듯 조용히 있었다. 효주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가 신기를 유혹했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우니, 왜 효주를 거부했던지 의문이 들었다. 나이 차이는 14살로 핑곗거리도 안 되고, 예전의 꼬마가 아닌 신기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모습으로 자랐다.
시간을 돌리고 나서 이성과 전혀 접촉한 적이 없다. 큰 짐을 짊어지고 있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님을 신기는 잘 알고 있다. 그저 어떤 여자를 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다.
'시간을 돌린 후유증인가? 키스 한 번 해볼까?'
불쑥 치고 나오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신기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계속 자신을 주시하던 효주와 눈이 마주쳤다. 신기와 눈을 마주치자 효주가 배시시 웃었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눈빛을 아교로 붙이고 청실홍실로 꽉 동여맨 듯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신기와 효주의 눈에 점점 열기가 차올랐다.
- 시발.
- 작가의말
비축분 많이 썼습니다. 잘하면 화요일에 완결 낼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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