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각성자
강남 모 사교클럽.
"강 회장, 자네랑 나랑 이렇게 술잔을 앞에 놓고 만날 사이였는가?"
제운(制雲) 그룹은 태운 그룹과 앙숙이다. 이름부터 강경운의 태운 그룹을 제압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다. 일부러 그렇게 지은 건 아니지만, 건설과 군수 두 곳에서 심하게 부딪쳤다. 지금에 와서는 태운 그룹을 저격하여 이름을 제운으로 지었다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
"김 회장, 오래 살고 싶지 않은가?"
"나도 그 말이 궁금해서 나왔네. 도대체 뭔 말인지 빨리 말하게. 우리 둘이 만났다는 사실이 들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네."
수많은 분야에서 부딪치는 두 그룹의 총수가 단독으로 만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주식시장이 출렁이며 온갖 루머들이 양산된다.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 나쁜 결과로 이어질지 누구도 모른다. 특히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놓여 있는 김 회장은, 더더욱 반기지 않았다. 안 오면 오래 살기 힘들 거라는 말에, 자신을 무척 아끼는 김 회장이 모험한 것이다.
"사람 하나 소개하지. 내 협력자네."
검은색 슈트로 위아래를 깔끔하게 맞췄고, 구두는 우유색으로 신었다. 행거칩과 나비넥타이는 빨간색으로 선택한 신기가 들어와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김 회장님. 오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 사정해서 말씀 전합니다."
"뭔 개소리야?"
"오 년 전 7월 7일 돌아가신 분. 가장 아끼시지 않았습니까?"
김 회장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마누라가 해코지할까 봐 걱정하여 무척 조심스럽게 만났던 여인이었고, 사정을 아는 자가 셋뿐이다.
"강 회장. 한번 해보자는 거요?"
'제길. 내가 배후 흑막이야. 저기가 꼭두각시고.'
진실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원망을 쏟아낸 신기는, 콜라로 목을 자극해 깨운 후 말을 이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병원에 가서 뇌종양을 검사해 보십시오. 아주 작은 뇌종양이 나올 것이고, 아마 의사는 크기도 작고 양성이어서 괜찮다고 할 겁니다. 수술로 어찌할 수 없는 위치라는 말은 해줄지 의문이네요. 그리고 약 3년 뒤에는 그 종양이 무럭무럭 자라서 회장님의 건강을 위협할 겁니다. 뇌가 눌려서 바보가 된 후, 오래 못 살고 사랑하던 그분 만나러 가겠죠."
김 회장은 뇌종양이라는 말에 침묵을 지켰다. 친족 중에 뇌종양으로 죽은 사람이 둘이나 있고, 둘 다 외가 쪽이다. 자신을 무척 아끼는 김 회장은, 상대의 거짓을 의심하기보다 정밀검사를 한 번 제대로 받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지금 작업 중인 그 여배우, 손 떼십시오. 조금 더 건드리면 유서 남기고 자살할 겁니다. 아직 어린 제가 드릴 충고는 아니지만, 여자는 가슴보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물론 가슴이 크면 애 키울 때 분윳값 아낄 수 있지요."
콜라를 원샷 때린 신기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신비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갑자기 트림이 올라와서 밖으로 피한 것이다. 온갖 폼을 다 잡아놓고, 트림으로 분위기를 해칠 수는 없다. 콜라를 대체할만한 음료를 고민하며, 신기는 옷을 갈아입었다.
### DUAL SYSTEM ###
태운 그룹 인사실.
"저, 과장님."
"왜 또?"
인사과장은 부하 직원의 말에 짜증부터 냈다. 최근 시작한 도깨비놀음에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지만, 회장님의 지시라는 한마디에 그 한계를 돌파하지 못했다. 그러나 온갖 상황이 그 한계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이번에 특채한 자 중 세 명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뇌파 결과가 조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뇌파 검사하기 전에 밤새 공포 영화를 보고 가서 검사하면, 조건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온다고 합니다."
"제길. 그렇게 똑똑한 놈들이 왜 여태껏 백수로 살았냐고!"
인사과장 자리는 무척 대단한 자리다. 실책 없이 적당히 버티면 위로 올라가기 좋고, 그룹 안에서 공식적으로 인맥이 가장 넓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나 갑자기 내려온 회장님의 지시 때문에 앞길에 먹구름이 드리우게 생겼다.
"잘해도 보탬이 되지 않고, 실수하면 상사에게 찍히는 최악의 일을 맡았구나. 이게 다 마누라 때문이야."
원래 작년에 다른 부서의 부장으로 옮겨 갈 기회가 있었는데, 마누라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직급이 낮은 직원들은 물론, 부장을 단 자들도 은근히 마누라를 통해 뇌물을 찔러온다. 그 맛에 중독된 마누라가 일 년만 더 하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밤에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뭐라 안 하겠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갔다.
"그래서 뇌파 검사 없이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낸다고 합니다. 오후 2시부터 3시 사이에 여기 와서 업무를 본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야? 직급은?"
"직급은 차장인데, 상무급으로 대우하랍니다. 회장님 줄을 타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제길. 여직원들 전부 가서 이쁘게 화장을 고치고 오라고 해. 저녁에 소고기 살 테니까, 오후에 애교 많이 부리라고 지시해."
그러나, 인사과장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감색 슈트에 검은 구두를 깔 맞춤한 뱀파이어 백작을 닮은 차장은, 나이가 방년 스물이라고 한다. 물론 배운 사람인 인사과장은, 방년이 여자에게 쓰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거기에 키가 크고 체형도 균형 잡혔고, 애티 나는 얼굴은 눈부실 정도다. 연예인처럼 정교한 얼굴이 아니지만, 성형도 필요 없이 조금만 화장하면 어디에 내놔도 관심을 끌 수 있을 것 같다.
이십 대 후반이 가장 어린 나이인 인사실 여자들은, 감히 범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이만 어리거나 회장님 줄만 아니었으면 도전해 볼만도 한데, 둘이 결합하니 괜히 기분 나빠할까 봐 곁에 다가가기도 주저되었다.
"자, 속으로 다섯 세시고, 매우 강하게 동의한다고 떠올리세요. 박력 있게 외치셔도 되고요."
"동의! 동의합니다!"
우렁찬 소리가 면접실 밖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신기는 파티에 들어온 자의 스킬을 확인하고 속으로 미소지었다. 드디어 치유 각성자가 나타난 것이다.
"조상필 씨. 축하드립니다. 직급과 대우는 계약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름과 나이만 말하고, 시키는 대로 동의라고 외친 것만으로 태운 그룹 정직원 모집에 합격한 조상필은 어안이 벙벙해서 일어섰다.
"면접 과정은 비밀 지켜주시고요. 뭐 말해도 믿는 사람이 없겠죠. 계약할 때 부가 조항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년 정도 해외로 파견 가야 하거든요. 가족과 연락도 힘들 겁니다. 프로젝트 끝나면 몇억씩 상여금이 떨어지니, 잘 가늠하고 결정하세요."
"감사합니다. 십 년이라도 버틸 자신 있습니다."
조상필이 나가자 신기는 헛웃음을 뱉었다. 처음으로 만난 치유 각성자가 산적을 닮은 건장한 남자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옆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인사과장과 눈을 맞추고 웃어준 후,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다음 분 안으로 들이세요."
### DUAL SYSTEM ###
서울 모 사교 클럽.
"회장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움만 주시고 부르질 않으셔서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모릅니다. 잊지 않고 불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야 서로 안 보면 좋은 사이 아니겠소. 나는 사업이 잘된다는 뜻이고, 자넨 정치 자금이 마르지 않았다는 뜻이니 말일세."
국회의원치고 멍청한 자가 없다. 돈만 건네주고 시키는 일이 없으면, 알아서 돈 좋아하는 인간들을 주선해준다. 그런 인간들에게 돈을 찔러주다 보면, 아무것도 안 시켜도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태운 그룹을 위해 힘쓴다.
한두 명만 적절히 컨트롤하면, 돈 받아먹은 자들이 모두 태운 그룹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기본적으로 똑똑하고 영리한 자들이지만, 돈은 귀신에게 맷돌을 돌리게 할 수도 있고 똑똑한 사람을 적당히 멍청하게 만들 수도 있다.
"안녕하십니까. 강 의원님. 태운 그룹 신 상무입니다."
회사 내부에서는 차장이지만, '높으신 분'을 만날 때는 상무다. 자기 아들 또래의 청년이 상무라고 말하자, 직급이 상무인지 이름이 상무인지 강 의원은 엄청나게 헷갈렸다.
"젊은 인재를 얻으셨군요. 인물도 훤하고 인상도 좋고, 이쪽으로 와도 무조건 성공할 인재입니다."
"의원님. 불미한 일이 있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 사진들을 보시죠."
사진을 본 강 의원은 가슴이 철렁했다. 몇천 원에서 몇만 원 하는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 사진으로 찍혔다. 그리고 멍청하지 않은 강 의원은, 이게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을 캡처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회장님, 살려주십시오. 제가 회장님께 잘못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진을 보자마자 강 회장을 향해 무릎을 꿇는 신속한 판단력과 행동력에, 신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슬슬 눈치를 보다가,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자 말을 이었다.
"강 의원님.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강 의원님이 태운 그룹 라인이라고 소문났는지, 이거 찍은 사람이 이쪽으로 사진을 보낸 겁니다. 큰 거 열 장 요구하더군요."
'십억? 백억? 시발, 큰 거라고 하지 말고 액수를 말해.'
본인이 후원자들 만날 때 늘 큰 거라고 말했지만, 듣는 처지가 되니 기분이 잡쳤다. 사람에 따라 큰 거가 천만이 될 수도 있고 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태운 그룹 스케일이라면 큰 거 한 장이 십억일 가능성이 크다.
'가만, 내가 백억 가치가 있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국회의원을 대단한 악의 축으로 묘사하지만, 그건 극소수 금수저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강 의원 역시 일에 치여서 사는 고급 공무원 신세나 다름없다. 물론 양심을 벌초하지 않아서 적당히 놀기도 하지만, 아무 일도 안 하고 국회의원 자리를 지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강 의원님을 모신 이유는, 최근 누구랑 척을 졌는지 알아내려는 겁니다. 그래야 넝쿨을 더듬어 뿌리까지 뽑아버리죠."
"감사합니다. 저는 둥글게 둥글게가 가훈이라서, 누구에게도 밉보인 적이 없습니다. 의원 중에서 발이 가장 넓고, 야당 여당 가라지 않고 다 친하게 지냅니다."
'그래서 당신을 부른 거야. 도벽이라는 약점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도 당신을 같은 편으로 만들었을 거야.'
"그럼 이후 사람 만날 때 유의해주시고, 취미 생활은 잠시 접어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일은 태운 그룹에서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코가 꿰었고, 태운 그룹이 코뚜레를 잡아끌고 있다. 그러나 태운 그룹이 코뚜레를 끼운 자가 따로 있다고 하니, 태운 그룹을 탓하기도 모호하다. 강 의원은 자신이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함정은 젖과 꿀이 가득한 함정이다. 시키는 대로 잘하기만 하면, 평생 꿀 빨 수 있다.
"감사드립니다. 회장님께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개처럼 짖으라면, 몇 달이고 연습해서 똑같이 짖도록 하겠습니다."
"강 의원, 같은 식구끼리 너무 겸손한 것도 안 좋아. 이후 연락은 김 비서를 통해서 하겠네.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지."
"분부만 내리십시오."
신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강 의원이 떠났다. 강 의원이 떠나자 강 회장이 껄껄 웃었다.
"저놈이 맨날 내 먼 친척이라고 헛소리하며 다녀서 꼴 보기 싫었는데, 오늘 속이 참 시원하네. 그나저나 요즘 무슨 일을 꾸미는 게요?"
"김 비서님을 통해 울릉도를 매입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질조사단을 파견했고, 곧 울릉도 화산이 분출한다는 뉴스가 뜰 겁니다. TV 뉴스에도 나오도록 손을 썼으니, 울릉도 땅값이 폭락할 겁니다. 그때 태운 그룹이 나서서 울릉도 주민들에게 삶의 새 터전을 마련해주고, 울릉도를 얻으면 됩니다."
"그러다 화산이 안 터지면 내가 못 죽을지도 모르겠네."
나름대로 농담을 한 강 회장이 즐겁게 웃었다.
"화산이 안 터지면, 그대로 돌려준다고 계약에 쓰면 됩니다. 삼 년 뒤에 화산이 안 터졌으니 돌아가라고 하면 저 앞에서 시위할지도 모릅니다."
"치유 각성자가 나타났다며?"
"네, 현재 열심히 스킬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각성자가 많이 모일수록 스킬 수련이 빨라집니다. 공명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중급이 되면 그때부터 치료받으실 수 있습니다."
"나보다는 일 많은 김 비서를 먼저 치료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회장님이 건강하면 상대가 더 겁먹습니다. 그럼 일 진행하는 게 더 쉬워지죠. 자꾸 절 시험하지 마십시오. 애송이는 맞지만, 알 건 다 아는 애송입니다."
- 작가의말
회귀하니 참 좋네요. 저는 회귀하면 한국 2:0 독일에 몰빵하겠습니다.
치유 각성자의 스킬이 일반인에게 먹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기는 특별하죠.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방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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