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다
거제도 신기의 별장.
새벽에 일어난 신기는 아스팔트용 운동화를 신고 달리기부터 시작했다. 모든 운동의 기본이 균형이고 균형에 가장 좋은 건 걷기와 달리기다. 매일 다른 코스로 달리며 주변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적당히 지칠 정도로 달린 후 대충 씻고 아침을 먹었다. 단백질 섭취와 열량 섭취를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 정보 단말 덕분에 자신에게 맞는 식단을 빠르게 찾아냈다.
아침을 먹고 근육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본인에게 딱 알맞은 운동법과 식단을 찾아내서 근육이 붙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보기에만 좋은 근육이 아니라 실전에 유용한 근육들 위주로 단련했다.
운동을 멈출 시기는 항상 정보 단말이 알려줬다. 땀을 씻어낸 후 짧게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면 책을 들고 공부했다. 역사와 철학 그리고 신화 위주로 공부했다. 세상을 구하려면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는지 궁금해서 역사를 공부했고 철학은 역사를 배우다 보니 필요했다.
신화는 두 가지 이유로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하나는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궁금해서였고 또 하나는 미지의 특성을 깨우기 위해서다. 미지의 특성이 세상을 구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신기는 추측했다.
역사책과 철학책을 함께 넘기면서 번갈아 읽었다. 그 시대의 철학가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고민하면서 역사를 읽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왜 저런 멍청한 짓을 하는지 현대인의 관점에서 의아했던 것을 그 당시의 시대상과 주류 철학과 사상을 알게 되면 나름 합리적인 결정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미 창고는 에너지 바와 전투식량 그리고 통조림으로 꽉 채웠다. 물은 대부분 정수시설을 통해 얻은 물로 대체할 수 있다. 신기 혼자라서 물을 많이 쓰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는 태양광 발전기로 얻는 거로는 부족했다. 흐린 날이 많아 기대치보다 얻는 전기가 적었다.
역사를 공부하며 신기는 식량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중국이 줄곧 동북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먹을 게 많았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 인구가 1억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약한 왕조라는 송나라가 동시대 유럽 모든 국가의 GDP와 맞먹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금융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정신적 소비, 즉 서비스업의 가치가 무척 높아졌다. 정신적 만족을 위한 재화의 소모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화폐와 실물의 가치가 크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만약 금융 시스템이 무너진다면 다시 실물경제가 대두할 것이다. 그때는 식량이 가장 중요한 전략 자원이다.
'30억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처음에는 너무 큰돈이라 믿기지 않았는데.'
30억으로 식량을 비축해봤자 얼마 되지 않는다. 왜 옛날에는 상인보다 지주의 힘이 훨씬 센 것인지 알 수 있다. 땅과 식량을 가진 지주는 어떤 세상이 오든 힘을 가진다. 땅 가진 사람보다 장사꾼이 더 힘이 센 지금이 비정상적인 것이다.
신기가 나름대로 세상을 평가하고 있는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십중팔구는 효주가 놀러 온 것이고 남은 하나는 택배차 아저씨가 심심해서 들렸을 가능성이 조금 있다. 그러나 오늘은 둘 다 아니었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깔끔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신기는 문을 열어 안으로 청했다. 자신을 효주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남자는 효주를 돌봐줘서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왜 여기에서 혼자 사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젊은 분이 택할 생활양식은 아닌 것 같아서요."
효주의 아버지는 커피를 음미하며 질문했다. 신기는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효주의 아버지도 더 깊이 캐묻지 않았다.
"초면에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저는 신기 씨를 스카웃하려는 생각을 품고 이곳에 왔습니다. 태운 정밀 비서실에 자리 하나 났거든요. 구체적인 업무는 제 스카웃에 응하면 알게 될 겁니다. 연봉은 최저 2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제의에 신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원래부터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고 운동을 시작한 후에는 더욱 멀리했다. 녹차도 최대한 연하게 우려서 마셨다. 맹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녹차를 마시다 소주처럼 강한 제의를 받은 신기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생면부지인 저를 뭘 믿고 스카웃하시는 겁니까? 사람 됨됨이는 빼고라도 저는 이제 겨우 고졸인데요."
신기는 순수하게 궁금을 담아 물었다. 효주의 아버지는 보는 사람도 편해지는 미소를 지었다.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최소 10%의 사람이 저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저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환경이 무척 중요하죠. 태운 정밀에 취직하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면 웬만한 사람은 많은 이가 부러워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멍청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죠. 제가 특별한 사람이라서 신기 씨의 특별함을 발견한 건 아닙니다. 우리 딸이 신기 씨를 무척 따르고 마침 자리 하나가 비어서 제안을 한 겁니다."
상대가 장난으로 한 얘기가 아님을 알았다. 말투도 태도도 진지하다. 가족을 잃기 전의 신기라면 앞뒤 안 가리고 덥석 응했을 것이다. 태운 정밀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수위를 다투는 태운 그룹의 계열사다. 비록 그룹의 핵심은 아니지만 이윤 창출은 으뜸이다. 거기에 비서실이라면 직위 이상의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제안은 무척 고맙습니다만, 제가 지금 응할 형편이 안 됩니다. 거절할 엄두는 나지 않으니, 일단 보류해 주시겠습니까?"
신기는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했다. 휴학생을 비서실에 꽂아줄 정도라면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하긴 별장에 가정부까지 둔 것을 보면 일반인은 절대 아니다. 혹시 이후 도움받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좋게 인상을 남기려 애썼다.
"하하, 중학교 때 첫사랑에게 고백했다 차인 후 두 번째로 거절당했군요.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제 명함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이름과 전화번호만 찍힌 명함, 이런 명함을 사용하는 사람은 백수이거나 명함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명품으로 차려입고 행동과 말투에 격식을 갖춘 것을 보면 분명히 백수는 아니다. 신기는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 한 번 훑어본 후 지갑 속에 넣었다.
효주의 아버지가 떠난 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효주가 놀러 왔다. 아픈 어머니랑 놀아주느라 늦었다며 핑계를 댔다. 신기는 역사와 철학에 관한 책을 책장에 다시 모신 후 효주에게 동화책을 읽어줬다.
효주의 순수한 눈동자를 바라보니 그간 가슴에 쌓였던 설움이 사르르 녹았다. 효주가 화장실에 간 사이 신기는 의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 나은 것 같아서 당분간 찾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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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외교 태운 그룹 강 회장의 별장.
강 회장은 탈곡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래된 탈곡기는 조금 센 바람이 불면 삐걱대며 소리 냈다. 탈곡기에 다칠뻔한 아씨를 구하며 팔자가 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씨는 자신의 첫 마누라가 되었다.
"회장님, 마지막 확인하러 왔습니다."
"뭐 굳이 확인하나. 하던 대로 처리해."
강 회장의 말에 유일하게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김 비서다. 이는 김 비서가 강 회장보다 더 강 회장을 위하기 때문이다. 김 비서는 조금 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막내 도련님이 사모님을 용서했습니다."
강 회장은 작게 탄식했다. 강 회장은 자식 복이 있어 아들을 여섯이나 봤다. 첫 마누라와 낳은 첫째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마누라도 자식이 죽자 시름시름 앓다가 자식을 따라갔다.
둘째 마누라는 아들 둘 낳고 죽었다. 셋째 마누라는 아들 하나 낳았는데 사고로 아들과 함께 죽었다. 넷째 마누라는 첫 마누라의 친동생이다. 넷째 마누라는 아들 둘 낳고 암으로 죽었다.
넷째 마누라를 잊지 못해 강 회장은 더는 여자를 들이지 않았다. 둘째 강재성이 첫 손자를 안겨주자 곧바로 그룹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5년 전에 그 손자가 자신의 피를 물려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재성의 마누라가 바람 나서 낳은 자식이었다.
애지중지하던 아이를 마약으로 엮어서 감옥에 넣었다. 그룹의 횡령과 뇌물죄 몇 개를 뒤집어쓰게 했다. 둘째는 아직도 자기 자식으로 알고 있다. 강 회장은 둘째 대신 막내 강유성을 후계자로 내세웠다. 그때 공교롭게 강유성이 득남했다. 강 회장은 직접 손자에게 효천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김 비서가 일전에 강유성이 비서실의 직원 한 명을 몰래 처리한 일을 알아냈다. 조사해보니 유일한 손자로 알고 있던 강효천도 남의 씨였다.
"바람난 마누라를 어떻게 용서해? 그건 회사 기밀 가지고 다른 회사로 도망간 놈을 용서하는 거랑 다를 바 없는 일이네."
배신에 유독 민감한 강 회장이다. 반대로 충성하는 자들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준다. 효율을 따지고 이익을 따지는 지금에는 맞지 않지만, 강 회장의 주변에는 아직도 강 회장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후계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판단합니다. 아들 있다는 이유로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 아들이 남의 씨라는 게 들키면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김 비서는 강 회장의 성격을 잘 안다. 강 회장은 이미 바람을 핀 막내 사모님을 해치울 생각이다. 5년 전에 사고를 가장해서 둘째 사모님도 처리했다. 손자로 알고 있던 청년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마약으로 엮어서 감옥에 넣었다. 감옥에 들어가며 그룹의 죄 몇 개를 덤으로 짊어지게 했다.
"바람난 년이랑 그 자식을 처리하면 막내가 무너질까 걱정하는 건가?"
강 회장은 넷째 마누라가 낳은 자식들을 유독 총애했다. 다섯째가 부자 관계를 끊고 미국으로 간 후 막내 강유성에 대한 총애가 더욱 대단했다. 딸이나 손녀는 혈육 취급을 하지도 않았는데 유독 효주만은 귀여워했다.
"도련님도 그렇고 효주 아기씨도 걱정입니다. 지금 막내 사모님이 거제도에 내려갔습니다."
강 회장은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둘째 며느리는 외가의 세력이 강하다. 처음부터 강재성을 후계로 생각했기에 좋은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그래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유성의 처가는 재계 50위에도 들지 못한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
"무조건 처리할 필요는 없네. 다만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가 그룹의 후계가 되는 건 절대 안 돼. 김 비서가 알아서 잘 처리해."
말을 마친 강 회장은 방으로 돌아갔다. 김 비서는 자신이 강 회장에게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무척 송구했다. 일이 더 어렵고 복잡하게 되었지만, 잘 처리해서 회장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DUAL SYSTEM ###
거제도 신기의 별장.
신기는 작은 조각을 또 반으로 쪼갰다. 먹기 싫어서 고기를 쪼개고 쪼갰지만, 더는 미루지 못하고 고기를 입안에 쓸어 넣었다. 정보 단말을 통해 찾아낸 최고의 식단은 맛까지 보장하지 않았다.
아까 효주 아버지의 제안이 또 생각났다. 아마 그 제안에 응하면 회사로 출근하는 게 아니라 효주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개인 비서가 될 가능성이 크다. 효주네 가족이 며칠 뒤면 거제도를 떠난다고 하는데 차라리 함께 서울로 가고 싶기도 하다.
소원이고 뭐고 상관하지 않고 태운 정밀의 비서실에 들어가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보잘것없는 자신이 세상을 구한다는 보장도 없다. 지금처럼 억지로 고기를 삼키면서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다.
요새는 잠도 무척 달게 자고 꿈에 가족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돌아가서 대학을 다녀도 된다. 젊은 청춘들과 부대끼며 삶을 즐기고 싶다. 괜찮은 얼굴 덕분에 가끔 거리에 나가면 여자들이 먼저 전화번호를 물어오기도 한다. 지금처럼 힘겨운 삶을 억지로 살 필요가 있을까?
신기는 자신의 뺨을 소리 나게 때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약해지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은 신기는 다시 수련에 몰두했다. 힘든 운동은 며칠에 한 번씩 하는 거라고 했지만 신기는 하루에 두 번씩 했다.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신기는 이를 악물고 무거운 운동 기구를 들어 올렸다.
- 작가의말
다가오는 월드컵이 걱정입니다. 월드컵 관람과 수면 보장 그리고 일일 연재를 동시에 해낼 수 있을까 걱정되네요. 컨디션이 좋을 때 비축분을 좀 만들어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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