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시작
거제도 신기의 컴퓨터 방.
신기는 정보를 검색하다 우연히 가입한 카페에서 글을 읽었다. 월 이용료 2백만 원이나 되는 카페지만 신기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비용을 지급했다.
"한국 울릉도에서 걸어 다니는 해골 출현. 두개골을 부수거나 왼쪽 네 번째 갈비뼈를 부수면 움직임을 멈춘다."
키가 140 정도 되는 해골의 사진이 있었다. 요즘 초딩들도 고학년이 되면 140이 넘는다. 그래서 전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뼈만 남은 해골의 무게가 60킬로라는 말에 경시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칠레에 이족보행 하는 도마뱀을 닮은 괴물 발견. 키는 150에서 170까지 제각각이고 몸무게는 35킬로에서 45킬로까지. 심장이 두 개이며 약점은 뇌로 추정."
살아있을 때 비늘의 색이 변한다고 한다. 약점을 뇌로 추정하는 이유는 이들의 두개골이 단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청동로봇 발견. 금속의 성질이 지구의 청동과 대동소이함. 합금은 아닌 것으로 판단. 달걀 절반 정도 크기의 핵을 부수면 정지됨."
신기는 아직 회원 등급이 낮아서 높은 수준의 정보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새로 올라온 글도 바로 확인하지 못한다. 지금 신기가 확인하는 것은 최소 보름 전에 올라온 글들이다. 허황한 얘기뿐이지만 신기는 오히려 믿음이 갔다.
"저놈들을 전부 처리하면 되는 거겠지?"
- 일부 정확합니다.
거기에 정보 단말이 확신을 심어주었다. 왜 아직도 검술 스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냐고 물었더니 원시 정보 단말이 활동하지 않아 정보 패턴을 분석할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뭔가 사달이 난 후에야 검술 스킬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새로 뜬 글을 다 읽은 신기는 카페에 접속하기 위한 브라우저를 꺼버렸다. 특별한 브라우저를 켜면 주소를 입력할 필요도 없이 접속한다. 17개 언어를 지원하는 카페로 회원이 얼마인지 서버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외출복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서 공교롭게 효주네 가족과 마주쳤다. 거제도를 떠났다 두 달 만에 돌아온 효주의 어머니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 어디 아프다고 하던데 치료가 잘 된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가족끼리 놀러 가시나 봐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신기가 먼저 인사했다.
"삼촌 안녕하세요. 우리 유치원 가요."
유치원 다니는 아들을 데리러 가는 모양이다. 효주 아버지가 신기의 행적을 물었고 신기는 슈퍼로 간다고 대답했다. 소고기가 많이 남지 않아 미리 사들여 놓을 생각이다. 매주 엿새를 단련하고 그 엿새 동안 다섯 끼씩 먹는다. 고기 소모가 무척 빠르다.
"신기 씨 슈퍼까지 태워다 드릴까요?"
신기는 거절하지 않고 자전거를 길가에 세워놓았다. 자전거를 잠근 후 효주와 함께 뒷좌석에 탔다. 효주가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막막하고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 슈퍼는 약 2킬로 정도 거리에 있다.
"엄마, 아빠, 나 삼촌이랑 슈퍼에서 놀면 안 돼?"
차를 멈추자 효주가 갑자기 응석을 부렸다. 효주 아버지가 미안한 얼굴로 신기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괜찮으시다면 효주 좀 데리고 있을 수 있습니까? 할아버지 닮아 고집이 장난 아니라서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에게도 즐거운 일입니다."
신기는 효주를 데리고 차에서 내린 후 슈퍼로 향했다. 근처에 대학도 있고 커다란 아파트 단지도 있어 슈퍼의 규모가 작지 않았다. 효주의 애교에 넘어가 신기는 먼저 아이스크림 가게부터 찾았다. 다음 슈퍼를 천천히 구경하며 효주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줬다.
"삼촌, 저 안대는 왜 저렇게 커요?"
브래지어를 궁금해하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때마침 울린 경보 소리가 아니었으면 신기는 대답이 궁해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태풍인가? 문자가 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매장 곳곳에 걸려있던 대형 TV의 일부가 화면이 변했다. 화장이 덜 된 것 같은 아나운서가 다급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전국 모든 해안선에서 정체불명의 괴물이 대량으로 상륙했습니다. 지금 이 화면을 보고 계시는 모든 분은 밖에 돌아다니지 마시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여 아나운서는 똑같은 말을 거듭 반복했다. 신기는 핸드폰에 온 문자를 확인했다. 아나운서의 말과 똑같은 내용의 문자가 핸드폰에 도착했다. 하와이의 미사일 경보가 생각났지만, 장난이나 실수라면 그럴듯한 내용이어야 한다.
'제길, 정보 단말 너 알고 있었지? 그래서 오늘 쉬라고 했던 거지?'
아침에 갑자기 육체의 피로도가 높다며 운동을 쉬라는 권고를 뜬금없이 했다. 신기는 몸이 무척 가볍게 느껴졌지만, 정보 단말이 허튼소리를 하는 걸 보지 못했기에 그 말에 따랐다.
- 여러 가지 제한으로 명확한 정보의 전달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멍청했다는 말이야?'
정보 단말은 신기에게 오늘 괴물이 출현하니 준비하라고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기에게는 몸의 피로도가 높으니 하루 휴식하라는 식으로 전달되었다. 뭔가 제한이 있어 중간에 정보의 왜곡이 발생한 것이다.
- 거의 진실에 근접했습니다.
신기는 지갑을 꺼내 효주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확인한 후 전화를 걸었다. 해변과 가까운 지역이라 효주를 데리고 2킬로가 되는 거리를 뛸 자신이 없다. 괴물의 정체도 아직 모르는 형편이라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다.
효주 아버지의 전화는 통화 중이었다. 신기는 일단 무기가 될만한 것을 찾았다. 효주는 영문을 몰랐지만 갑자기 변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얌전해졌다. 일 미터가 조금 넘는 아령봉을 찾은 신기는 청테이프를 두껍게 감아 손잡이를 만들었다. 슈퍼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데 제지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두 번째 아령봉에 청테이프를 감는데 전화가 울렸다. 효주 아버지는 사람과 차를 보냈으니 슈퍼에서 기다리라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신기는 청테이프를 마저 감아 무기를 완성했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 마중 온다고 효주를 안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슈퍼 직원들이 손님들을 불렀다. 창고에 함께 숨자고 소리 질렀다. 신기는 갈등하다 효주 아버지가 보낸 사람을 기다리기로 했다. 신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지인에게 전화해서 차 가지고 와달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신기는 핸드폰 시계를 주시하며 빨리 전화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일분일초 평소와 똑같은 속도로 무척 느리고 무척 빠르게 흘렀다.
### DUAL SYSTEM ###
태운 그룹 강 회장 개인 미술관 지하.
강 회장은 지진과 핵폭발에도 끄떡없는 안전한 지하실에서 수많은 대형 TV를 통해 난리가 난 세상을 굽어보았다. 박영광의 허황한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다만 박영광이 제시한 근거들이 그럴듯하기는 했다.
이성적으로는 무시하라고 하는 데 감이 예리하게 움직였다. 결국, 강 회장은 본인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박영광의 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작은 계획을 끼원 넣었다.
"김 비서, 거제도 상황 좀 알려줘."
"교통사고를 내서 길을 막아 도련님이 유치원에 도착하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경보가 울린 후 경호원들이 신속히 도련님과 사모님을 데리고 대피했습니다. 곧 구조 헬기가 도착해서 도련님을 모셔올 겁니다."
계획은 조금 어긋났다. 바람난 여자는 원래 별장에서 마사지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변덕을 부려 마사지사를 돌려보냈다. 효주는 원래 함께 구출하기로 했는데 중간에 슈퍼에 내렸다고 한다.
"도련님이 슈퍼로 가서 효주 아기씨를 구하라고 차량을 보냈다고 합니다."
강 회장은 거친 손으로 턱을 만졌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결정했다.
"구할 필요 없다. 바로 돌아서라고 해."
김 비서는 강 회장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감히 토를 달지 못하고 그대로 명령을 전달했다. 효주만큼은 무척이나 아끼던 강 회장이라 궁금증이 컸지만, 젊은 시절 말투로 변한 강 회장에게 감히 질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이 크게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지. 내 마음에 남은 마지막 나약함을 도려내는 거다."
정보도 느리고 인맥도 없고 무식하기만 하던 강 회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독심이다. 늘 남들보다 느리게 시작했지만 남다른 독심으로 선발주자들을 전부 제쳐버렸다.
"바람난 여자는 정신병원에 가둬. 약해빠진 아들은 내가 직접 교육하마."
바람난 마누라를 용서하고 자기 핏줄도 아닌 자식을 제 새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강 회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누그러들어 억지로 참았지만, 수천만이 넘는 해골이 해변을 덮는 광경을 목도하고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장생불로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이십 년 정도만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내 손으로 대단한 것을 이루고 싶구나."
현대의 의료기술로 이십 년 정도 더 사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앞에 건강하다는 수식어가 붙으면 무척 어려워진다.
"치유 능력자를 최대한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박영광의 자료 덕분에 우리가 한발 앞서고 있습니다."
"그거 각성자에게만 효과가 있다고 하던데, 각성자가 어떻게 되는지도 자세히 알아봐."
강 회장은 거침이 없었다. 에둘러 부드럽게 말하던 습관을 버리고 젊은 시절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바뀌었다. 김 비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살짝 굽은 등을 쭉 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회장님 곁을 지키지 못하고 멀리 내팽개쳐질 것 같았다.
"박영광 그 아이 곁에도 사람을 붙여봐. 믿음직한 아이지만, 세상이 바뀌면 너무 많은 게 바뀌더라고. 예전에 친일파가 애국 투사로 바뀌는 것도 봤어. 모든 계획을 진행하는 아이이니 특별히 조심해서 살피도록 해."
김 비서는 수첩을 꺼내 강 회장의 지시를 적었다. 한글은 아니고 닭발에 고양이 손에 개발에 곰 발바닥도 그려져 있다. 글을 배운 적 없는 김 비서가 예전부터 강 회장의 지시를 적기 위해 나름대로 만들어낸 본인만의 암호다. 이제는 글을 알지만 중요한 일은 항상 암호를 사용했다.
### DUAL SYSTEM ###
인천 강화도.
김태풍은 새까맣게 몰려오는 새하얀 해골 무리를 보며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박영광은 김태풍의 정보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사거리가 120미터다. 군 생활을 오래 하면 눈이 잣대랑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대충 해골들이 사거리로 들어오자 박영광은 김태풍에게 명령했다.
"각성자 김태풍, 전방 120미터에 칼바람 마법을 사용해라."
"칼바람."
김태풍은 떨리는 목소리로 칼바람 세 글자를 힘겹게 내뱉었다. 다소 무기력하기까지 한 김태풍의 목소리와 달리 칼바람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용오름을 연상케 하는 바람집이 소환되었다. 바람집은 김태풍의 마력을 바람의 칼날로 바꾸어 해골을 향해 쏘아냈다. 허수아비나 일반인에게는 무력하던 것과 달리 칼날 하나에 최소 해골 하나씩 쓰러졌다. 운이 좋으면 셋씩 쓰러지기도 했다.
자신의 마법에 해골이 무더기로 쓰러졌지만, 김태풍의 손발은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군인이 곁에 있고 든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겁이 났다.
"마력이 바닥났습니다."
김태풍은 가늠되지 않았지만, 박영광은 김태풍이 대충 이천 정도 쓰러뜨렸음을 짐작했다. 마력이 전부 회복하는 데 27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총알 하나 허비하지 않고 27분마다 2천 정도의 해골을 없앨 수 있으니 각성자가 사태를 해결하는 열쇠임을 확신했다.
"전원 삼점사, 자기 정면의 해골을 처리한다. 대가리가 약점이니 조준 똑바로 해라."
개별 사격으로 해골을 처리하다 30미터 가까이 다가오자 기관총과 중화기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빼곡하게 이루어진 사격에 해골들은 하나둘 두개골이 깨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사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해골들의 사체가 높이 쌓이자 군인들은 미련 없이 진지를 버리고 뒤로 후퇴했다. 수십 미터 뒤에 새로운 진지가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 작가의말
주인공 위주는 아니지만, 좀 더 입체적인 지금의 글이 저는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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