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의 안배
후지산.
시간은 덧없이 흘렀다. 어느새 지구의 각성자는 천 명도 남지 않았다. 검은 구슬의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다. 전문 어딘가에 흘린 검은 구슬을 찾으러 전투 지역을 수색하는 직업도 생겼다.
A급 각성자의 대량 실종에는 몇 가지 루머가 돌았다. 가장 잘 알려진 소문은, 지구의 초월자를 소멸하기 위해 이들이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이다. 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초월자를 죽일 수 있는 무기를 얻어 해치웠다는 것이다.
은밀히 퍼지는 소문으로는, 신기가 자신의 왕위를 든든히 하려고 '개국공신'들을 모조리 처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히 일부 각성자를 제외하고 모두 스킬을 잃었던 사건 때문에 이 소문은 많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일부 남은 A급 각성자들 역시 스킬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진실에 가까운 소문으로는, 지구의 초월자가 다른 차원으로 도망갔고 A급 각성자들이 그 초월자를 소멸하러 다른 차원으로 원정을 하였다는 것이다. 신기가 지구에 남은 건 이들이 승리한 후 지구로 다시 소환하기 위해서라는 꽤 합리적인 해석까지 곁들였다.
그리고 30개에 달하는 국가가 땅을 신기에게 귀속시키고 왕으로 모셨다. 신기를 위해 커다란 왕궁을 많이 지었지만, 신기는 공식적으로 제주도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후지산 정상에서 혼자 멍하니 사고에 잠겨있던 신기는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했다. 가장 자주 떠올린 건 좀비 드래곤과의 대화다.
좀비 드래곤은 D가 두 번째로 두 세상을 구분하는 막을 찢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에 일부 초월자는 힘의 손실을 각오하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갔고, 일부 초월자는 남아서 구멍을 막은 후 D와 싸웠다. 그때 힘이 강하거나 격이 높은 초월자가 없었지만, D가 저지른 짓의 반동으로 어찌어찌 구멍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 D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결국 D가 승리했다. 그리고 최근에 D가 또 구멍을 뚫었을 때, 여덟 종족은 구멍을 틀어막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저쪽 세상의 환경은 점점 이들에게 불리하게 변했고, 반대쪽에서 뚫린 구멍을 봉합하는 건 불가능함을 인식했다.
그래서 이들은 여덟 구역으로 나누고, 가장 먼저 지구에 끌려간 초월자가 희생하여 구멍을 막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에 당첨한 것은 엘프 여왕이었다.
그러나 엘프 여왕은 오히려 D와 계약을 맺고 다른 초월자들을 처리하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음모를 꾸몄다. 신기가 초월자가 된 것을 감지한 엘프 여왕은 일부러 D와 계약을 하지 않은 것처럼 신기를 속였다. 추워 주고 깎아내리며 신기를 흔들어 자신의 목적에 이용했다.
D가 아닌 신기를 통해 다른 초월자들을 처리했지만, 히드라가 도망가면서 엘프 여왕이 불리하게 되었다. 뱀파이어 드래곤이 돌아간 건 엘프 여왕의 종족을 다른 종족들의 공격에서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생명과 죽음을 함께 버려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로 영생을 누리는 게 좀비 드래곤의 종족이다. 이들은 허신을 섬기는 강신사제의 종족과 상극이다. 강신사제의 종족은 죽어서 허신으로 돌아간 후 다시 태어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순환을 주장하는 종족과 변화를 거부하는 두 종족의 이념은 상극일 수밖에 없다. 엘프 역시 세계수로 순환하지만, 서로 섞이지 않고 개체의 존재를 존중하기에 좀비 드래곤 일족의 법칙과 가까운 편이다.
그래서 좀비 드래곤은 강신사제 종족의 약점을 신기에게 알려줬다. 신기가 좀비 드래곤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말대로 따랐으면 최영웅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수백 혹은 수십 명의 희생으로 강신사제를 해치웠을 수 있다.
그리고 좀비 드래곤은 초월자의 부활에 대해 알려줬다. 인류 기준으로는 매우 긴 시간이지만, 영생을 이룬 종족이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초월자는 그 몸에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태를 해결하려면 상대를 죽이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신기가 강해진다고 해도 다른 세상의 모든 종족을 남김없이 찾아내서 소멸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좀비 드래곤의 종족을 놓고 말하면, 시체 조종사 따위가 땅을 깊게 파고 들어가 그저 살아만 있어도 좀비 드래곤이 언젠가 부활할 수 있다. 좀비 드래곤은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라 두 세상의 연결을 끊고 D가 다시는 같은 짓을 반복하지 못하게 처리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신기에게 말했다.
그러나 좀비 드래곤의 말에 모순이 있다. 먼저 끌려간 초월자가 모든 구멍을 막기로 한 건 계약이 성립되지 않았다. 다른 초월자들도 그에 해당하는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 희생에 대한 대가를 누구도 치를 수 없다.
그래서 엘프 여왕과 D의 이중 계약을 좀비 드래곤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여전히 모순이다. 초월자 사이의 대화는 절대 다른 초월자들이 알지 못한다고 좀비 드래곤이 호언장담하면서 신기에게 신용을 잃었다.
다음으로 의문이 풀리지 않는 건 엘프 여왕이다. D와 어떤 계약을 했기에 큰 위험을 감수하고 D를 지키려 했는지 신기로서는 알 수 없다. 신기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신기와의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는 게 엘프 여왕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의문은, 구멍을 뚫을 때 이쪽 세상에 생긴 변화다. 뭔가 변화가 생겼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그게 뭔지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풀리지 않는 고민이 많다. 자신이 들었던 정보의 정확성을 검증할 수 없기에 확실하게 풀 수 없다. 그리고 인류를 종족으로 만들고 영생을 부여할지도 계속 고민되었다. 점점 흰머리가 늘어나는 부모님이 안타깝지만, 권속이 되어 자신을 우러러볼 부모님이 생각나서 거부감이 든다. 그렇게 고민만 거듭하다가 다른 날과 똑같이 제주도로 돌아갔다.
### DUAL SYSTEM ###
제주도.
별장에 돌아온 신기를 기다리는 건 2년 동안 똑같이 반복된 일상이 아니었다. 신기가 정기적으로 치료해주는 덕분에 여전히 건강한 김 비서가 무릎을 모은 공손한 자세로 앉아서 신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종되었던 A급 각성자가 나타났습니다."
신기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난 김 비서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영국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정체를 숨기려는 듯 몹시 조심하는 게 티가 났습니다. 현재 국정원이 소재지를 파악하고 엄중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별장 근처의 활주로를 이용해 전용기를 띄웠다. 달팽이처럼 나는 전용기를 타고 영국 런던에 도착하니 이미 공항에 차가 대기했다. 차를 타고 근교의 폐공장에 도착하니 국정원 정예 요원들이 숨어있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 천 명도 되지 않는 각성자 중 일부가 국정원에서 요원으로 뛰고 있다.
들킬까 봐 감시만 하고 있었다는 말에 신기는 요원들을 칭찬했다. 눈을 감고 폐공장의 구조를 감지한 후 은밀하게 움직여 지하로 들어갔다. 감시 카메라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장치와 트랩들을 간단히 무력화시키며 지하에 들어갔다.
지하의 벽과 천장은 밝은 푸른빛으로 칠했지만, 빛이 부족해 음울하게만 느껴졌다. 방 따위는 없고 한쪽 구석에 모니터 몇 개가 감시 카메라가 전송하는 화면을 방출하고 있었다. 전기는 어떻게 끌어왔는지 모르지만, 넉넉한 게 아닌지 조명 따위는 없었다.
중앙에 큼직한 석상 하나가 있다. 전문가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성은 들였지만 솜씨가 부족한 작품이다. 서양의 드래곤을 무척 닮았지만, 확연히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동상의 가슴에 예전에 맥과 에릭이 들고 신기를 찾아왔던 심장 조각이 박혀있었다.
신기는 작게 실망했다. 이계로 갔던 A급 각성자가 돌아온 줄 알았는데, 실상은 D의 종족이 되어 계속 숨어지내던 '배신자' 무리였다.
'열세 명이라. 13이라는 숫자가 부활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니면 그저 우연일 뿐일까?'
신기는 열세 명을 잠재워서 조용히 포박했다. 포박하는 과정에 신기는 큰 성과를 얻었다. 열셋 중에 에릭이 끼어있었다. 아는 게 많은 자라 조금 기대가 되었다.
"에릭, 깨어나."
동면하는 곰처럼 심장도 느리게 뛰고 피도 늦게 돌던 에릭이 신기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신기의 미소 짓는 얼굴을 본 에릭은 절망에 차서 눈물을 흘렸다.
"D의 종족이 되었구나. 왜 D가 너희를 종족으로 만들고 도망쳤는지 알아?"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돌리기 전의 에릭보다 아는 게 훨씬 적었고, 시간을 돌리기 전의 에릭이라도 D가 왜 자신들을 종족으로 만들고 영생을 부여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법칙이 변한 건 밝혀냈고.'
신기가 찜찜해 했던 고민 하나가 풀렸다. D가 세상의 법칙을 살짝 건드려서 종족을 만든 후 다른 세상으로 도망갔고, 심장 조각 하나를 남겨서 종족의 동력원으로 삼았다. 무작위로 사람을 각성하게 했던 각성자 시스템을 변형하여 자기 종족을 만든 듯하다.
'심장을 남겼는데도 각성자들이 스킬을 잃고 육체 능력도 서서히 약해지는 걸 보면, D가 시스템과 연결을 끊은 것 같구나. 잘하면 내가 헌터 시스템의 소유권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아냐. 이게 함정일 가능성도 있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어 답답했지만, 신기는 겉으로 느긋함을 가장했다.
"에릭. 초월자는 죽어도 부활할 수 있고 소멸해도 부활할 수 있어. 물론 소멸하면 부활할 가능성이 정말 희박해서 거의 못 한다고 보면 돼. 부활의 조건이 바로 자기 종족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거야. 살아남은 종족의 몸을 희생해 초월자가 부활하는 거지."
"그리고 너희는 D의 종족이 되었으니 몸이 점점 D처럼 변해갈 거야. 아직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사람 모습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징그러운 파충류가 될 거라고. 이마에 뿔이 날지도 몰라."
에릭은 자신을 제외한 열두 명의 여전히 잠자고 있는 동족들을 살폈다. 왠지 이들의 피부에 옅은 비늘 무늬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신기의 말에 담긴 강제성 때문이다. D의 권속이 되었기에 명령에 곧이곧대로 따르지는 않지만, 왠지 신기의 말을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살려주세요. 우리는 D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겁니다. 엘프 여왕과 D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존재를 걸고 맹세했거든요."
그때 신기는 다른 세상에 있었으니, 둘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도 아니지. 뭔 놈의 법칙이 초월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약자를 위한 법은 초월자의 세계에도 없는 것인가? 서민을 등쳐먹는 대기업이랑 다를 게 뭐람?'
"D가 뭐라고 했는지 자세히 말해.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하지만 에릭도 아는 게 제대로 없었다. 신기가 사라졌고 인류는 언젠가 멸망한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급이 낮은 각성자들의 스킬이 사라진다는 뉴스가 채널과 포털을 점령했다. 이를 승리의 신호라고 대부분 긍정적으로 해석했지만, D와 엘프 여왕의 존재를 확인한 에릭은 둘의 거짓말에 넘어갔다.
"D의 종족이 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원래 D는 종족을 거느릴 수 없지만, 엘프 여왕과 둘이 뭔가를 했습니다. 어디에서 힘을 빌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제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에릭을 다시 재우고, 남은 자들을 하나씩 깨워 질문했지만, 남은 자들은 에릭의 설득에 넘어갔을 뿐이었다. 결국, 다시 에릭을 깨운 신기는, 엘프 여왕과 D에게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거듭 질문했다.
"D의 모습이 약간 변하기는 했습니다."
신기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때 스쳐 지나갔던 D의 모습을 회상했다. 사진처럼 뇌리에 박힌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린 후 모든 정신을 거기에 집중했다. 확실하게 뭔가 발견한 건 아니지만, D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달라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을 못 하는 에릭을 다시 재운 후 신기는 고민에 잠겼다. 생각 같으면 이 열셋을 다 죽이고 싶지만, 이것 역시 함정이 아닌지 고민되었다. 엘프 여왕에게 한 번 데이고 나니 무척 소심해졌다. 각성자들의 힘이 건재하다면 과감히 행동할 수도 있는데, D나 엘프 여왕에 대항할만한 사람이 자신밖에 없어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
'둘이 싸우다 양패구상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영광이 형이나 맥이 둘을 죽여도 좋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신기는, 사고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세 개의 의문점 중 하나는 D와 엘프 여왕의 수작임을 알아차렸다. 남은 건 좀비 드래곤이 D와 엘프 여왕의 계약을 알아냈다는 것과 엘프 여왕이 D를 큰 부담을 감수하고 보호했다는 것이다.
'셋 모두 D와 엘프 여왕의 소행. D와 엘프 여왕의 관계를 밝혀내야 해. 그리고 좀비 드래곤이 중간에 어떻게 끼어들었는지 확인해야 하고. 드래곤과 엘프의 모든 신화와 설화를 뒤져봐야 하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지만,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엉뚱한 곳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기는 드래곤과 엘프의 상관관계를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 작가의말
비축분이 없는 관계로 한 편만 올리겠습니다.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억지로 글을 썼는데 티가 나더군요. 이번에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비축분 2편 남았습니다. 화요일까지 분량은 걱정 없습니다. 그사이 마음 다잡고 마무리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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