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
제주도.
신기는 강 회장의 집으로 향하는 차에서 에릭의 전화를 받았다. 아프리카의 중요한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그리고 강 회장의 연회에 참석하고 1시간 정도 지난 후 에릭이 다시 전화했다. 조각품을 훔쳐 간 놈을 잡았는데, 망치로 조각품을 깨뜨려서 주먹 정도 크기의 작은 조각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 조각을 아무리 만져도 D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했다.
'D를 끄집어내는 열쇠가 그 심장 조각이었을까? 내가 자신을 끄집어내서 죽일까 봐 심장 조각을 파괴한 건가?'
신기는 번잡한 연회장을 벗어나 조용한 방을 찾았다. 손에는 여전히 포도 주스가 들려 있다. 시간을 돌리고 나서 왠지 술이 반갑지 않아 되도록 차나 주스를 마셨다.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전화한다고 했는데, 전화기가 계속 잠잠하다. 평소 심심하면 문자질하던 동생도 문자 하나 보내지 않는다. 차라리 이미 요해를 알고 있는 아시아부터 처리하는 게 나았는지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중국이 무슨 꿍꿍이를 품을지 모른다.
'뱀파이어 드래곤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예전에 해골용과 시체용이 합체하여 대단한 괴물이 된다고 들었던 것 같다. 확신이었던지 추측이었던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만약 제때 처리하지 못해 두 초월자가 동시에 활동하거나 합체해버리면 수습이 힘들지도 모른다.
'아니지. 모든 종족의 초월자가 다 건너오면 D도 죽은 목숨이라고 했는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태산처럼 쌓여갔다. 조각품을 깨뜨린 게 자신을 경계해서인지 아프리카에서 나올 초월자를 경계해서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리고 뭔가 수작을 부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또각또각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왔다. 신기에게 추파를 던진 여인이 한둘이 아니지만, 신기는 지금까지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았다. 모두 개성 넘치고 아름다운 여성들이지만, 신기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저씨."
신기는 찌푸려지는 이맛살을 억지로 폈다. 태운 그룹의 소악녀가 나타났다. 강 회장도 어쩌지 못한다는 태운 그룹 최대의 배후 권력자다. 현 대한민국 대통령 강유성의 외동딸이고, 태운 정밀과 태운 유통의 상속녀이기도 하다.
"나랑 결혼하자."
"왜?"
몇 년의 투쟁을 거쳐 계모도 굴복시킨 효주다. 집안에서 여왕처럼 군림하기에 예전처럼 독립하고 싶은 건 아닐 거다.
"예전에 약속했잖아. 내가 어른이 되면 결혼하기로."
"언제?"
효주는 소파에 앉아 굽 높은 신발을 벗어 던졌다. 벗었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벗은 신발을 던져버렸다.
"몰라. 하여튼 약속했어."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너 아직 어른이 아니잖아."
"14세부터 결혼 할 수 있다고 법이 변했어."
"그건 일본이야. 거긴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거든. 한국은 법이 안 바뀌었어."
"우리 일본 국적으로 갈아타자."
"싫어."
"아저씨는 이런 반항적인 모습이 매력이야."
자신도 모르고 있던 새로운 매력 포인트를 발견한 신기는 기뻐해야 하는 일인지 잠깐 고민했다.
"아저씨 나랑 결혼하자. 거절하면 평생 후회할 거야."
"싫어."
차근차근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다가 이젠 포기했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강 회장의 모든 자식과 손주를 포함해 가장 강 회장을 닮은 아이다.
열린 창문으로 으스스한 바람이 들어왔다. 추위와 더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신기지만, 이상하게 싸늘한 바람에 몸서리가 쳐졌다. 신발까지 벗어 던진 효주가 걱정되어 고개를 돌려보니, 두 눈에 초점이 사라진 효주가 신기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봉인."
말을 마친 효주가 픽 쓰러졌다. 묵직한 무언가가 신기의 몸을 눌렀다. 코로 들락날락하는 공기가 갑자기 텁텁해졌다. 늘 휴대하는 짧은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미지의 불안이 신기를 덮쳐왔지만, 신기는 그 불안의 정체를 알고 싶지 않았다.
"운명의 대적자. 꼴 좋게 되었구나."
효주의 몸에서 연한 푸른 연기가 빠져나오더니, D의 모습으로 화했다. 바람에 하늘거려 무척 신기하고 보기 좋은 광경이었지만, 신기는 온몸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느라 감상할 겨를조차 없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남은 DPP를 이용해 남자 하나를 홀려서 내 심장 조각을 부수게 했다. 심장 조각이 부서지며 발생한 힘을 이용해 이 여자가 봉인 스킬을 발동하게 했지. 이 아이가 봉인 스킬을 얻은 걸 지금까지 몰랐던 네 탓이라고 생각해라."
"봉인 스킬을 나한테 사용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네 대적자의 운명을 봉인했다. 넌 이젠 각성자가 아니다. 모든 능력을 잃고 평범한 사람이 된 것이지. 운명의 대적자였던 자여, 절망하거라."
"다른 세상의 초월자 모두가 이 세상에 나타나면 너도 죽은 목숨이라고 들었다."
"멍청한 놈. 시간을 돌리기 전에 초월자 둘을 해치운 건 잊었느냐?"
"시간을 돌렸으니 그들도 살아있을걸. 그게 아니라면 왜 해골이나 좀비 따위가 계속 나올까?"
"다른 세상에서는 살아있겠지. 그러나 이 세상에 오는 순간 그들은 죽는다. 시간만 돌렸을 뿐, 다른 세상 초월자의 운명까지 바꾸지 않았거든."
"이 지역을 가장 마지막에 봉인하면 되겠구나. 그럼 둘이 도착하는 순간 넌 죽고, 둘이 죽어서 이곳이 인류의 영지가 되면 인류의 운명은 멸망이 아닌 생존이 되겠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운명이 멸망으로 바뀌면 다 죽지만, 멸망의 운명이 아니라도 인류가 전부 소멸할 수 있다. 다른 초월자들이 가장 만만한 너희를 가만둘 것 같아? 그리고 너희는 시스템 창조자인 나를 필사적으로 보호해야 할 거야. 혹시라도 내가 저들의 손에 죽으면 시스템이 사라지고 너희는 저들에게 대항할 아무런 힘도 남지 않을 거거든."
"너는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해서 믿을 수 없어."
"믿거나 말거나. 내가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하면 이 영지를 내 것으로 선포할 거야. 그러면 인류는 나를 수호신으로 모셔야 해. 그리고 나는 인류를 도와 다른 초월자들을 다 물리칠 거야. 그렇게 지구 전체가 내 영지가 된다면, 나는 아무런 제한도 없이 현세에 몸을 드러낼 수 있지. 그러면 DPP를 더욱 빠르게 모을 수 있고, 언젠가는 신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날 거야. 수호신이 떠난 세상은 멸망하겠지."
바람에 연기가 흩어지며 D의 모습은 점점 작고 희미하게 변했다. 신기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화를 억눌렀다.
"네 말은 대부분 거짓말이야. 예전에 했던 말과 모순되는 점들이 있거든."
머리가 어지러워 뭐가 모순인지 신기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D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신기가 생각하던 것과 뭔가 모순이 있다는 건 확실히 느꼈다.
"좋도록 생각해. 자기기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힘이 다해서 난 이만."
D가 사라지자, 기절했던 효주가 깨어났다. 신기를 바라보는 효주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삼촌, 미안해요."
효주의 울음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힘이 빠져서 끅끅거리며 울던 효주는 다시 기절했다. 신기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이 싫고, 텁텁하게 느껴지는 공기도 싫고, 귀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싫었다.
### DUAL SYSTEM ###
제주도.
신기와 박영광 그리고 에릭과 맥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둥그렇게 모여앉았다. 탁자 위에는 구슬 세 개가 놓여있다. 하나는 흡혈귀의 것, 하나는 삼두사의 것, 하나는 심장 조각이 부서지고 남은 주먹 크기의 조각이다.
"미스터 신. 큰 모험이라는 걸 알지만, 이것들을 복용하십시오. 힘을 되찾을지도 모릅니다."
"에릭, 탐구 스킬을 사용해 보세요."
탐구 스킬을 사용한 에릭의 얼굴이 거멓게 죽었다.
"먹으면 바로 목숨을 잃겠군요. 미스터 신은 현재 슈퍼맨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이제 이틀이 지났는데도 신기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다. 잠을 전혀 자지 못했고, 이젠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몸이기에 쉽게 피로가 쌓였다. 육체에 담겨있던 강한 힘이 사라지는 느낌은 무척 서글프다.
"형, 이 두 구슬 다 형이 먹어요."
박영광은 신기의 말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불러서 뭔가 시킬 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너무 상상 밖의 말을 들어버렸다.
"이유라도 알자. 아무리 그래도 내가 형인데 네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한 건 너무 체면이 안 서."
"삼두사처럼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거든요. 특히 내가 없으니 요해를 찾기도 힘들 거예요. 솔직히 나도 요해를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 어중간하게 강한 사람 몇보다 확실히 강한 사람 하나가 훨씬 나아요. 기력 각성자 중에서 공격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형이에요."
"이거 먹으면 무슨 능력을 얻지?"
"몰라요. 이젠 나도 몰라요."
"제길."
박영광은 구슬 두 개를 한꺼번에 꿀꺽 삼킨 후 소파에 가서 드러누웠다. 순식간에 잠이 든 박영광의 눈가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맥, 마법사들을 잘 조직해서 저기 미스터 팍을 도와 뱀파이어 드래곤을 잘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에릭. 내가 아는 정보를 최대한 알려줄 테니, 제이크를 도와 이후 괴물을 몰아내는 일을 맡아줬으면 해요."
신기가 온몸으로 발산하는 묵직한 기운에 맥과 에릭은 감히 거절할 생각을 못 했다.
"뱀파이어 드래곤을 반드시 빠르게 처리해야 해요. 뱀파이어 드래곤 다음으로 또 다른 초월자가 나올 겁니다. 둘 다 나오면 그 영역은 둘에게 빼앗길 확률이 100%에 가깝습니다.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꼭 둘을 처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규격 외 괴물이나 초월자를 처리하면 일정 확률로 구슬이 나옵니다. 방금 미스터 팍이 먹은 구슬과 같은 건데, 괴물에 따라 색이 다릅니다. 구슬은 하나의 스킬 혹은 능력을 줍니다. 미스터 최의 불멸의 안개 스킬이 바로 시체 조종사의 구슬을 먹고 얻은 겁니다. 그리고 같은 구슬을 먹으면 아무 효과도 없습니다. 미스터 팍은 미노타우로스와 삼두사 그리고 흡혈귀의 구슬을 먹었습니다. 이후 같은 구슬을 얻으면 다른 사람에게 먹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법사는 맥과 특별팀의 넷을 제외하면 구슬을 먹이지 마십시오. 마법사는 초월자를 상대할 때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맥이나 넷 정도 되어야 그나마 한 사람 몫을 겨우 할 겁니다. 초월자를 상대하려면 공격력이 강한 기력 각성자와 방어력이 강한 기력 각성자를 키워야 합니다. 미스터 최는 내가 기력을 모두 모아서 한 번에 쏟아내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만약 미스터 최가 그걸 해내면, 미스터 최에게도 많은 구슬을 복용시켜 강하게 만들어주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신기는 마른 목을 축이려 홍차 한 모금 마셨다. 예전과 달리 홍차의 맛이 쓰게 느껴졌다.
"그리고 제 처지는 비밀로 해주세요. 비록 아무 쓸모도 없는 몸이 되었지만."
울컥하며 말을 잇기 힘들었다. 그때 신기를 수행하던 각성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미스터 신. 종교 대통합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러 출발해야 합니다."
"메이크업을 도와줄 사람 두 명 섭외하세요. 밤을 새워서 몰골이 말이 아니네요. 그쪽에는 제가 금식을 시작했다고 말씀하시고요."
초췌해진 몰골은 종교 대통합을 위해 금식 기도를 하느라 이렇게 되었다고 에두를 생각이다. 힘은 잃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 생각이다. 육신의 강대한 힘이 사라지며 신기의 마음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 DUAL SYSTEM ###
제주도.
이스탄불로 가서 종교 대통합 회의에 참석한 후, 신기는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몰래 제주도로 돌아왔다.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강 회장의 별장 지하에 몸을 숨겼다.
"삼촌, 잘못했어요."
효주는 아직도 신기를 보면 눈물을 흘렸다.
"왜 갑자기 삼촌이라고 불러? 예전엔 아저씨라고 했잖아."
"나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네가 뭘 했는지 알아?"
"아니요. 뭔지 모르지만, 그저 미안해요."
"너 각성자 됐다며. 스킬 어떤 거 있어?"
"원래 봉인이라는 스킬 있었는데 이젠 없어졌어요. 이젠 아무 스킬도 없어요."
"삼촌 혼자서 생각할 게 있어. 효주 잘못한 거 없으니까 울지 말고."
- 작가의말
예전에 100화에 어떤 분이 효주가 봉인 스킬 얻는 거 아니냐고 댓글 달아주셨습니다. 그때 머리가 참 복잡했습니다. 그래도 그 용도까지는 짐작하지 못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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