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조짐
콜롬비아.
정부는 이미 무너지고 마약 범죄자들이 장악한 나라. 그러나 예상외로 이들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 능력과 실적 위주로 운영되던 조직이어서 부정부패 따위가 아직 자리를 잡지 않았다. 실력자들을 우대하는 것만으로도 기존 정부보다 더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때 마약왕이라 불렸던 콜롬비아 통령은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미군과 합동 지휘부를 구성했다. 백만이 넘는 부하를 거느리고 멕시코로 향하는 삼두사를 저지할 작전 지역으로 콜롬비아가 선택되었다.
신의 사자라고 불리는 동양인을 힐끗 바라보니,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등에 열 자루의 검을 메고 있었고, 수행원들은 수십 자루의 검을 메고 있다. 모두 B급에 이른 철벽과 강화 각성자라고 들었다.
'수천 명을 순식간에 죽인 흡혈귀를 단숨에 처리했다고 그랬지. 해방 프로젝트의 최종 결정권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회유해서 아프리카 다음으로 우리 땅을 해방하도록 해야겠다.'
상대가 신의 사자라고 하지만, 마약왕이었던 통령의 눈에는 그저 유혹에 약한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비쳤다. 신기가 원래부터 아프리카 다음으로 남미를 생각하고 있지만, 신기의 속을 알 리 없는 통령은 남미 각국을 설득해 신기에게 줄 뇌물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아프리카의 성공 여부를 확인하고 건넬 생각이다.
땅이 조금씩 울렸다. 삼두사가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그 속도에 맞추느라 저급한 괴물들이 달리면서 땅이 울리는 것이다. 거리가 아직 30킬로미터나 되는데도 그 울림이 약하게나마 전해져왔다.
갑자기 리자드맨들이 통령의 왼편으로 빨려갔다. 박철이 미끼 스킬로 리자드맨만 부른 것이다. 김태풍과 맥이 힘을 합쳐 '드래곤 레어' 마법을 펼쳤다. 수많은 작은 화염에 휩싸인 드래곤들이 사방을 누볐다. 굳이 공격할 필요도 없이 드래곤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리자드맨들은 몸이 불타며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공우진의 불바다와 쥐불놀이를 합친 마법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했다. 비록 둘의 합체기보다 범위가 작지만, 그 위력은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다른 화염 마법사들도 각자 할당받은 구역에 마법을 사용하며 리자드맨을 빠르게 소각했다.
학교 운동장 몇 개 크기의 면적이 불바다가 되었지만, 전혀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각성자들의 화염 마법은 괴물들만 불태웠고, 괴물들 몸에 붙은 불도 나무나 풀 따위에 옮겨가지 않았다. 매우 비현실적인 상황이지만, 길이 300미터에 대가리 세 개인 뱀보다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다른 각성자가 미끼 스킬을 사용하여 2등급 악어들만 불러왔다. 드디어 박철을 제외하고 식별 스킬을 동시에 익힌 미끼 각성자가 나타난 것이다. 화산 속의 괴물을 끄집어낼 수 있는 각성자의 숫자도 점점 많아져서 소각장의 운영에 여유를 주었다. 괴물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미리 끄집어내 소멸하면, 주변 소각장들도 부담이 줄어든다.
다만 그 위력이 박철에 비교하면 무척 부족했다. 수만 마리의 악어들이 다가오자 화염이 아닌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각성자와 근접 각성자들이 나서서 해치웠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 시간에 화염 마법사들의 기력이 회복되었다.
다시 박철이 2등급 악어들을 불러오고 화염 마법사들이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리고 그사이 삼두사는 통령과 20킬로 거리로 접근했다. 삼두사는 대략 시속 30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였다.
10킬로 거리가 되었을 때 박철이 미끼로 1등급과 2등급 괴물을 불러왔다. 반대편, 그러니 통령의 오른편에서는 일반 미끼 각성자 수백 명이 동시에 미끼 스킬을 사용하여 3등급의 거대 악어와 4등급의 비늘소를 불러갔다.
불에 약한 건 마찬가지지만, 맷집이 훨씬 강하다. 차라리 리자드맨과 작은 악어를 소멸하는 데 화염 마법사들을 동원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고, 현재 상황으로 보았을 때 꽤 성공적이다.
미리 매설한 지뢰와 폭탄이 터지며 괴물들의 전진을 느리게 만들었다. 유독 삼두사만 미끼 각성자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지도 않고 전진했다. 그러나 아무 영향도 없는 건 아니어서, 전진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박철과 박영광 그리고 제이크와 최영웅이 차를 타고 빠르게 지휘부에 합류했다. 박철은 삼두사를 잠시라도 멈추는 역할, 박영광의 소환체와 제이크의 흙 거인은 삼두사의 두 머리를 상대하는 역할, 그리고 최영웅은 남은 머리 하나의 주의를 끄는 역할을 맡았다. 흡혈귀처럼 삼두사도 불멸의 안개 스킬을 싫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최영웅이 자원했다.
함정을 파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밧줄이나 철사 따위로 삼두사를 묶어둔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믿을 거라고는 박철의 스킬과 신기의 태풍밖에 없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전투를 펼치기 위해 경사가 좀 있는 곳을 전장으로 선택했다.
신기는 헬기에 매달려 출발했다. 최영웅이 왼쪽 머리를 책임지고, 박영광의 소환체가 중간 머리를 맡고, 제이크의 흙 거인은 오른쪽 머리를 담당했다. 박영광과 제이크는 공격하고 최영웅은 시선을 끄는 정도만 하기로 정했다. 12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석궁 하나를 들고 갔지만, 누구도 석궁 따위로 삼두사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석궁이 아무 소용도 없는 건 아니었다.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최영웅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삼두사는 섣불리 불멸의 안개를 두른 최영웅을 공격하지 않았다.
헬기를 통해 삼두사의 머리 위로 이동한 신기가 박철에게 신호를 주었다. 머리 하나는 최영웅과 대치하고 있고, 남은 둘은 흙 거인과 장군님과 혈투를 벌이고 있다. 장군님은 공방을 주고받지만, 흙 거인은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다.
"멈춰!"
박철의 외침이 이어폰으로 들려오자 신기는 곧바로 밑으로 뛰어내렸다. 마찬가지로 박철의 외침을 들은 제이크와 박영광도 소환체에게 맹공을 가하게 했다. 최영웅은 딱히 공격 수단이 없어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헬기에서 뛰어내리며 검에 태풍을 둘렀다. 삼두사의 목인지 등인지 구분하기 힘든 곳에 뛰어내린 후 곧바로 공격했다. 삼두사의 비늘이 깨지고 살점이 흩날렸다. 고급 9레벨에 이른 식별 스킬 덕분에 요해가 있는 곳이 확연히 느껴졌다. 신기는 검을 모조리 뽑아 옆구리에 낀 후, 삼두사의 살이 사라진 부분으로 뛰어들었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재생하며 살이 신기를 감싸려 했지만, 신기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왼팔과 옆구리 사이에 낀 검 하나를 빠르게 뽑아낸 후 태풍을 두르고 삼두사의 목뼈가 있는 방향을 향해 태풍을 쏘아냈다. 분쇄기처럼 삼두사의 살을 가루 낸 신기는 똑바로 전진하며 검 하나를 더 뽑았다.
빠르게 재생하는 삼두사의 살을 거듭 분쇄하며 목뼈 가까이에 도착한 신기는 검 하나를 삼두사의 살에 꽂고 다른 검 하나를 양손으로 잡은 후 50%의 기력을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70%를 사용하면 더 공격할 여력이 남지 않기에 우선 50%만으로 공격해 보기로 했다.
신기의 공격이 목뼈에 닿자, 삼두사의 몸이 크게 출렁였다. 꽂아두었던 검을 뽑아 들고 다시 내려치려고 준비하는데 이어폰으로 박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어요."
신기는 검에 맺힌 기력들을 태풍으로 바꾼 다음 위로 방출했다. 삼두사의 등이 터져나가며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구멍을 통해 밖으로 기어나간 신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신기가 뛰어내릴 때 검을 잔뜩 넣은 검통 몇 개를 밑으로 떨어뜨렸다.
검통 두 개를 찾은 신기는 간단히 '위치' 두 글자만 뱉었다. 박철은 식별 스킬을 모든 기력을 쏟아 사용한 후, '꼬리 쪽인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신기는 물론 최영웅과 박영광과 제이크도 바로 꼬리 쪽으로 달려갔다. 꼬리 쪽을 공격하며 넷은 조용히 속삭였다.
"엄청나게 큰 거 아냐?"
"아니길 바라야죠."
규격 외 괴물이 구슬을 드랍하고, 그 구슬을 먹으면 스킬 혹은 능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직접 얘기한 적은 없다. 아마 알만한 사람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발표하면 괜히 소각장 운영을 소극적으로 하며 규격 외 괴물을 불러내 처리하려는 작자들이 생길 수 있어서 여전히 비밀로 했다.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색이 별로 없는 맑은 구슬이 나왔다. 신기는 매우 자연스럽게 구슬을 전투복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도 삼두사의 시체를 계속 부쉈다. 덩치가 크니 혹시 구슬이 더 있을 수 있지 않겠냐는 아주 단순한 생각 때문이다.
전투를 마친 다른 각성자들도 몰려오자 신기는 시체를 부수는 걸 멈췄다. 다른 각성자들이 혹시 구슬을 찾아내지 않나 감시하려고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다른 각성자들은 그저 신기가 기력을 다 소모했나보다 생각하며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 DUAL SYSTEM ###
제주도.
신기가 삼두사를 처리하는 영상은 하루 만에 3억 뷰를 달성했다. 많은 국가가 인터넷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봤던 사람이 몇 번 혹은 수십 번씩 돌려봤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
그리고 신기는 아프리카로 가기 전에 제주도에 들려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신기가 신의 사자가 되는 바람에 가족들의 일상생활이 무척 불편하게 변했다. 제주도 별장에만 머무르며 외출할 때마다 수십 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나다녀야 했다.
"형, 나 노트북 사줘. 차 있어봤자 뭐해, 겨우 마당에서 뱅뱅 도는 것밖에 못 하는데."
약속대로 신구가 20살 되는 해에 신기는 차 한 대 뽑아주었다. 강 회장의 차고에 가서 대충 비싸 보이는 걸로 한 대 '뽑아서' 신구에게 주었다. 그러나 신기가 신의 사자인 게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신구는 함부로 외출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냥 김 비서 아저씨한테 말하라니까."
"나 그 아저씨 어려워. 옛날에 분명 조폭이었을 거야. 사람 손목도 막 자르고 그랬을 거란 말이지."
내친김에 신기는 김 비서에게 전화해서 노트북과 게임기 그리고 여러 가지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요청했다. 특히 운전 시뮬레이터는 어머니까지 무척 반가워했다. 겁이 많아 함부로 운전하지 않은 것이지, 어머니라고 운전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저녁에 뭐 먹고 싶어?"
"저녁에 회장님이랑 식사 약속 잡혔어요."
"며칠 집에 있을 거니?"
"사흘이요. 아프리카로 가서 미리 지형을 살피고 전투 시뮬레이션해야 되거든요. 위험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딱 보면 요해가 보이고, 딱 치면 쓰러지거든요. 쓰러진 괴물 계속 공격하는 거, 그거 다 쇼예요. 사실 첫 타격에 이미 죽여버린 거예요."
"형, 그래도 빨리 결혼해서 아이 낳아야 하는 거 아냐?"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동시에 등을 얻어맞은 신구는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
"불길하게 왜 이래. 빨리 부처님에게 잘못했다고 빌어."
"애한테 왜 그러세요. 아직 철이 덜 들어 그렇죠. 신구야, 괜찮으니까 빨리 와서 랍스터나 마저 먹어."
말리는 시누이 역할을 톡톡히 해낸 신구는 가족들과 즐거운 식사를 이어나갔다. 강 회장이 보낸 요리사가 입이 심심할 사이가 없도록 새로운 요리를 끊임없이 올렸다.
### DUAL SYSTEM ###
노팅엄.
"에릭, 이 조각품 다른 데로 숨겨야 할 것 같아. 누군가가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
"그거야 미스터 신과 만난 이후부터 늘 있었던 일이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느낌이 달라."
에릭은 맥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맥의 실없는 말이 현실로 되는 일이 무척 잦다.
"어디로 숨겨야 할까?"
"한국으로 가자. 차라리 이걸 미스터 신에게 맡겨버리는 거야."
"아프리카로 가지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미스터 신도 곧 아프리카로 갈 거잖아."
"알았어. 내가 아프리카로 갈 때 이걸 들고 가도록 할게."
그때 피슉 소리와 함께 맥이 쓰러졌다. 에릭은 재빠르게 엎드린 후 맥의 목에 손을 댔다. 맥박이 뛰지만 무척 약했다. 마치 마취 당한 것처럼. 그 생각을 끝으로 에릭도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맥도 부스스한 눈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억지로 정신을 깨웠다.
"맥, 조각품이 사라졌다."
"왠지 느낌이 안 좋더라니."
에릭은 곧바로 신기에게 전화하여 조각품이 사라졌음을 알렸다. 그리고 추적장치를 통해 조각품의 위치를 확인했다.
"서쪽으로 30킬로미터, 빨리 출발하자."
권총과 기관총을 차에 싣고 둘은 추적장치가 가리키는 위치로 향했다. 조각품에 붙여놓은 신호 발생기가 상대에게 걸리지 않은 모양이다. 차를 난폭하게 몰아 목적지로 달렸다. 괴물이 침입하며 수많은 공장이 파산했고 신호는 그중 한 공장에서 전해져왔다.
엉덩이 쪽에 권총 하나 꽂고, 신발에 하나 꽂았다. 방탄복을 챙겨 입고 손에는 경기관총을 들었다. 머리에 투구까지 쓰니 영락없는 액션 영화 주인공이 되었다. 대충 살펴보았는데 감시 카메라 따위가 보이지 않자 둘은 과감하게 안으로 진입했다.
"마취총을 사용한 걸 봐서 우리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는 것 같아."
"총을 구할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고, 소리가 날까 봐 일부러 마취총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어."
둘이 긴장하고 조심한 것이 무색하게, 매우 쉽게 범인의 모습을 확인했다. 뒷모습뿐이어서 정확히 짐작하기 어렵지만, 30 혹은 40대의 남성으로 보였다. 옷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걸 보면 하층민일 가능성이 크다.
생포할 생각으로 둘은 살금살금 접근했다. 그러나 뭐라 낮게 중얼거리던 남성이 갑자기 망치로 조각품을 내려치자, 급히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실전이 처음인 둘은 총의 안전장치를 미리 푸는 걸 잊어버렸다. 둘이 안전장치를 풀었을 때는 이미 조각품이 박살 나고 사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후였다.
조각품을 부수고 쓰러진 자를 첩보국에 넘겼다. 그러나 첩보국은 사내의 기억이 완벽하게 지워졌다는 결론만 얻어냈다.
- 작가의말
3일에도 비축분 4편 썼습니다. 연참으로 글 2개 올리면 비축분 6편 남네요. 당분간 연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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