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거제도 대형 슈퍼 일 층.
다리가 풀려 쓰러진 여자는 구슬피 흐느끼며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애원했다. 해골들은 느릿느릿 걸어서 여자에게 다가간 후 두 팔을 움직여 여자를 공격했다. 아픔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 여자는 째는듯한 비명을 질렀다.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신기는 급히 진열대 가장 위에 상품들을 치우고 효주를 올렸다. 다리가 풀린 여자를 해체하다시피 살해한 해골들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
살집이 넉넉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온 해골에게 발길질을 했다. 예상 밖으로 해골은 버티는 힘이 무척 강했다. 가벼울 것 같던 해골이 쓰러지지 않자 남자는 당황했다. 해골은 미처 거두지 못한 남자의 다리에 손가락뼈를 박았다.
여자의 비명보다 높지는 않지만 훨씬 묵직한 억눌린 비명이 퍼졌다. 남자는 통증을 이기지 못해 쓰러졌다. 성한 발과 두 팔로 해골을 마구잡이로 타격했지만 해골은 무척 튼튼했다. 밟으면 바스러지는 삭은 뼈들과 달랐다.
신기는 남자와 씨름하는 해골의 뒤로 다가가 아령봉으로 두개골을 내리쳤다. 두개골이 쉽게 부서졌다. 남자를 살피니 흰자위만 보이며 기절해 있었다. 해골이 그대로 쓰러지자 신기는 고함을 질렀다.
"두개골이 약점입니다. 머리를 부수면 처리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신기의 외침은 허망했다. 모두 도망치고 숨는데 정신이 팔려 신기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이 몇 없었다. 겁에 질린 효주와 눈을 마주치자 신기는 재빨리 효주 곁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도 아이는 혼자가 되면 두려움에 떤다.
"삼촌이 효주 지켜줄게요."
효주는 신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여자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고 일부 남자처럼 숨어서 울먹이지도 않았다. 원래 담대한 아이인지 신기를 믿는 마음이 그만큼 큰지 모르지만, 신기는 모든 힘을 다해서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해골 한 마리가 입으로 딱딱 소리 내며 걸어왔다. 신기는 그간 연습했던 검술 동작의 내려치기를 상상했다. 그러나 정작 펼친 내려치기는 속도도 느렸고 힘도 충분히 실리지 못했다. 아령봉 무게 자체도 가벼운 편이라 머리 위로 올린 해골의 두 손을 부수지 못했다.
신기는 앞차기로 왼쪽 네 번째 갈비뼈를 노렸다. 해골은 걸음이 느렸지만 두 팔의 움직임은 느리지 않았다. 해골의 두 손이 밑으로 내려오자 신기는 발을 도로 걷고 다시 내려치기로 두개골을 노렸다.
멍청한 해골은 내리던 두 손을 바로 올리지 못했다. 손이 왼쪽 가슴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신기가 아령봉으로 해골의 두개골을 부술 충분한 시간이다. 미처 손이 목 위치로 올라오기 전에 해골의 움직임이 멈췄다.
바닥에 쓰러진 해골을 뒤집은 후 신기는 척추를 잡고 들어 올렸다. 정확하게 가늠되지 않지만 무게가 60킬로는 나올 것 같았다. 카페에서 본 정보가 정확하다는 걸 확인한 신기는 연이어 다가오는 해골을 손쉽게 처리했다. 가슴의 갈비뼈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머리를 내려치면 반응이 느린 해골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도망 다니고 숨어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신기의 주변으로 몰렸다. 근처의 해골을 전부 처리한 신기는 숨을 몰아쉬며 긴장을 풀었다. 근육을 단련할 때 쉽게 땀이 나지 않았는데 벌써 등이 흥건하게 젖었다.
"다들 대걸레 하나씩 드세요. 해골이 다가오면 대걸레로 가슴을 미세요. 처리는 제가 할게요."
스물 가까이 모이자 사람들은 조금 안정됐다. 대부분 사람은 신기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몇몇은 전화기를 붙잡고 통화하는 데 급급했다. 가족 혹은 친구에게 데리러 오라고 부탁하고 상대가 들어주지 않으면 욕설을 퍼부었다.
평일 오후 2시 정도라 슈퍼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일부 손님은 직원들을 따라 창고로 숨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전부 신기 주변에 몰린 셈이다. 누군가 창고에 가서 숨자는 의견을 냈지만 곧 묵살당했다. 아무리 애원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말에 모두 신기를 쳐다봤다.
"저기 화장실이 있는 곳에 가면 숨기 편할 것 같습니다."
가까운 곳에 화장실이 있다.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 문이 마주하고 있는 복도만 지키면 안쪽은 전부 안전해진다. 사람들은 주변을 살피며 신기를 따라 느릿느릿 화장실로 움직였다.
옮길 수 있는 무거운 물건들을 최대한 많이 가져다가 쌓았다. 진열장들도 눕혀서 해골의 움직임을 최대한 방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야는 방해하지 않지만 키가 140이고 다소 멍청하기까지 한 해골은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저지선을 만들었다.
"뭐야, 왜 핸드폰이 안 돼?"
몇몇은 복도에 자리 잡았지만 대부분은 화장실 안에 들어가 숨었다. 톡이나 전화로 구원을 청하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 신기도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통화권 이탈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 DUAL SYSTEM ###
인천 강화도.
탱크들이 부르릉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탱크에 맞서던 해골들은 당랑거철이라는 사자성어를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탱크 밑에 깔린 해골은 두개골이 부서지며 버둥질을 멈췄다.
탱크에 깔렸는데도 대부분 뼈는 멀쩡했다. 뼈의 강도가 무척이나 높다. 혹시나 해서 자석을 갖다 댔지만 반응이 없었다. 뼈에 철 성분이 섞인 게 아닌가 했는데 철이 아닌 다른 금속이 섞인 것 같다.
박영광은 상부의 급작스러운 호출에 강화도를 떠났다. 별 무리를 마주한 박영광은 긴장한 척 연기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강경운 회장에 대해 감탄했다. 대기업 중에서 유일하게 친일파와 아무 관련이 없는, 박영광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다. 미친놈 소리를 들을 걸 각오하고 허황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계획을 터놓았다. 그리고 강 회장은 군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노장군을 움직였다.
"현재 여섯 부대가 철수 명령을 거부할 것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부대들에 긴급히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거부한 부대는 여섯이지만 견해를 밝히지 않은 부대들 가운데 같은 선택을 할 부대가 적지 않을 것이다. 노장군은 박영광을 바라보았다.
"박 대위, 자넨 어찌 생각하는가?"
"저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국가를 위한 결단과 국민을 위한 결단, 어느 하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선택에 따라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일부는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고 일부는 고개를 끄덕여 동조를 표했다. 박영광이 이 자리에 낄 군번이 아니지만, 높은 분들이 상스럽게 직접 말다툼할 수 없으니 직급이 낮은 자들을 불러다 자기 입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 대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켜야 할 지역과 버려야 할 지역을 빨리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방어선을 세워야 합니다."
못마땅한 얼굴이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고개를 끄덕였던 사람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원론적인 말을 한 최 대위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무척 크게 움직였다.
"제가 삼 년 전부터 작성한 수비 방안입니다. 북한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을 포위하고 동시에 상륙작전을 펼친다는 가정하에 만들었습니다."
박영광은 미리 준비한 작전 방안을 올렸다. 반드시 지켜야 할 1급 지역, 여건이 허락하면 지키는 게 이득인 2급 지역, 지키면 좋지만 버려도 상관이 없는 3급 지역, 지키는 것보다 버리는 게 이득인 4급 지역, 아예 포격이나 폭격으로 지워버리는 게 이득인 5급 지역.
"먼저 참고용으로 보십시오. 지금 전라도와 경상도를 버린 상황에서 등급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괴물을 육군 보병으로 상정하고 수비 라인을 최대한 빨리 짜내겠습니다."
박영광을 내세운 자들은 웃음꽃이 피었고 최 대위 편을 들던 자들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군인은 결국 무공으로 말한다. 정치질이나 단합은 평화 시기에나 가능하고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공을 많이 세운 놈이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박 대위, 내가 이제껏 밥버러지들만 키우고 이런 유능한 군인은 밑에 처박아뒀구먼. 쯧쯧."
노장군이 혀를 차자 모두 움츠러들었다. 노장군의 비위를 거스를 용기가 있는 자가 이 자리에 하나도 없다. 강 회장이 박영광을 좀 도와주라고 할 때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대화를 나눠보니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요즘 젊은이 같지 않았다.
"부족한 대로 우선 이 자료를 가지고 부대 배치를 해. 현재 모든 부대의 위치와 전투력 평가, 탄약 재고 등을 파악해서 박 대위에게 전해. 박 대위는 최대한 빠르게 작전 계획을 만들어서 올려."
박영광은 힘차게 군례를 올린 후 지휘부에서 빠져나왔다. 작전 계획은 이미 만들어두었다. 전투력 평가와 탄약 재고 등을 통해 마지막 확인만 하면 된다. 정리된 자료가 도착하기 전에 박영광은 또 다른 작전을 지휘했다.
[올빼미가 둥지를 떠났습니다.]
사달이 벌어지자마자 중요한 각성자와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 구조 헬기를 파견했다. 해변 도시의 경우 미리 배정한 군인들이 헌터 협회의 소속이라 신분을 속이고 각성자와 가족을 보호했다.
[뻐꾸기가 날았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대부분 지역의 이동통신망을 잠재웠다. 핵심 설비가 고장 나면 백업이 존재하여 망이 완전히 죽지 않는다. 내부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수많은 기지국의 전원을 전부 차단했다.
[백두산에서 비둘기가 날아왔습니다.]
강 회장이 헌터 협회를 국방부 밑으로 넣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원래 지금 받아야 할 소식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사달이 난 이때 소식이 들어왔다. 박영광이 생각했던 퍼즐들이 지금까지는 잘 맞춰졌다.
'친일파의 피가 흐르지 않는 강 회장님처럼 훌륭한 분이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까마귀의 마지막 깃털이 떨어졌습니다.]
까마귀는 중국이다. 박영광은 강 회장의 도움으로 중국으로부터 식량과 의복을 대량으로 들여왔다. 중국은 시간을 지키는 계약 개념이 약하다. 이틀 전에 들어왔어야 할 마지막 화물이 뒤늦게 항구에 도착했다.
박영광은 미리 작성한 작전 계획서를 보며 갈등했다. 수비 범위를 조금 더 넓히면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 약간의 모험만 더 하면 수십만에서 수백만까지의 목숨을 더 구할 수도 있다. 연필로 책상을 콩콩 내리찍던 박영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시발, 대한민국을 위해 내가 지옥으로 간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버리고 친일파를 청산한다. 지역감정이 없고 친일파가 없는, 깨끗하고 단결된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어 동북아시아뿐 아니라 세계를 호령할 것이다.
'각성자를 빨리 키워야 한다. 김태풍처럼 쓸모있는 각성자들로 부대를 만들어서 돌파구를 찾는다.'
정보의 수집과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한국을 제외한 주변 상황은 박영광의 생각과 비슷하게 진행될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 최대한 빠르게 괴물을 물리치고 안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소모의 겨룸이다. 사람의 목숨을 갈아 넣고 식량을 갈아 넣고 철을 비롯한 귀한 자원을 갈아 넣는다. 그리고 승리한 자가 위협을 덜 받으면서 생존할 권리를 챙긴다. 현대로 와서 전쟁의 양상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그대로다.
전쟁에 필요한 자원이 누가 먼저 소모되냐가 관건이다. 해골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나 각성자가 성장할수록 자원의 소모는 줄어든다. 그걸 얼마나 빠르게 이루느냐가 계획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리고 해골 뒤에는 좀비라 이름 붙인 푸른색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자원의 소모를 능가하는 자원 수급으로 일단 버텨내고 각성자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 자원의 소모를 줄인다. 여유 자원을 이용해 더욱 든든한 수비선을 만든다.
지금 쓸데없이 낭비되는 수많은 식량과 전기와 석유, 모든 걸 합법적으로 통제하고 강한 대한민국을 만든다. 세계적인 강국이 된 후에 사치를 누려도 늦지 않다. 물론 그때 박영광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친일파를 전부 죽인 후 자기 목숨도 끊어 친일파의 피가 더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자료를 받아든 박영광은 미리 만들어둔 작전 계획을 일부 수정했다. 수정한 작전 계획을 새로 베껴 옮긴 후 지휘부를 찾았다. 박영광의 걸음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 작가의말
미리 밝힙니다. 박영광의 생각이 제 생각은 아닙니다. 미친놈이 신념을 가지면 얼마나 무서운지 상상하며 박영광 캐릭터를 잡았습니다.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건 박영광이 극단적인 놈이라는 겁니다. 괜히 친일파 혹은 지역감정이라는 단어 때문에 열 받는 분은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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