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신기
아프리카.
분쇄 각성자가 조각을 들고 다가갔다. 엘프 여왕은 입을 꾹 다물고 심장 조각을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고, 엘프 여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계약은 없던 일로 하겠다. D라는 작자는 초월자의 품격도 갖추지 못한 힘만 센 애송이구나. 운명의 대적자를 죽인 반동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고 수작질이야."
"우리는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일방적으로 무효를 선언합니까?"
"저자와 D는 운명의 대적자다. 대적자가 타인에게 죽으면 D도 힘을 잃는다. D가 힘을 잃으면 너희가 각성자라고 부르는 존재들도 힘을 다 잃는다. 그러면 협력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D와 너희를 도와 남은 일곱 종족과 싸워야겠지. 그건 나보고 소멸하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다."
"D가 직접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게 가능했으면 이미 죽였겠지. 운명의 뒤틀림 때문에 D는 저자를 죽이지 못한다. D는 자신이 목적했던 것을 이루는 것으로 저자를 패배시켜야 한다. 만약 D가 이걸 모르고 있다면 정말 멍청한 것이고, 알고 있다면 나는 D가 뭔가 음모를 감추고 있다 여길 수밖에 없다. 거짓말을 자주 하면 격이 떨어지는데, D는 힘만 추구하고 격은 걱정하지 않는가 보다. 격이 떨어지면 종족을 거느릴 수 없다. 그리고 D가 너희를 자신의 종족으로 편입하지 못하면, 나도 그 반동을 함께 나눠야 한다. 계약은 신성한 것이니까."
"빨리. 빨리 생명유지 장치가 있는 곳으로 옮겨. 미스터 신이 죽으면 큰일이야. 각성자들이 모두 힘을 잃는다고."
"걱정 안 해도 돼."
초췌한 몰골로 신기가 들것에서 몸을 일으켰다.
### DUAL SYSTEM ###
아프리카.
"다들 꺼져. 그 조각은 내게 맡기고. 여기 초월자랑 단둘이 조용히 얘기하고 싶다."
에릭을 비롯해 남아있던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쳤다.
"그리고 내 동료들을 감금했더군. 그들도 다 풀어줘라."
신기는 자신이 말만 하면 다 이뤄진다는 듯이 협박 따위는 날리지 않았다. 그리고 에릭 등도 신기의 지시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분쇄 각성자는 조각을 신기에게 넘겨준 후, 흠뻑 젖은 등을 자랑하며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초월자, 너는 등급이 어떻게 되지?"
"종족을 거느리면 무조건 A급이다. 이 지구의 존재는 힘은 A급을 초월했는데 격은 D급 밖에 안 되더군."
"지구의 존재는 힘이 너희 여덟 종족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다지?"
"싸움은 힘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너희가 사용하는 스킬처럼, 힘을 정확하고 효율 있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지구의 존재는 그저 힘만 센 멍청이다."
"그 멍청이랑 하려던 계약을 나와 하지.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 멍청이를 끌어낼 방법을 알려달라. 너는 격이 더 높으니까 분명히 방법을 알 것이다."
"내가 어떤 계약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
"다른 초월자를 이 세상으로 끌어온다. 그 초월자들을 다 죽인 후 네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다. 다음 두 세상의 연결을 끊는다."
"그건 내가 D와 하려던 계약이야. 넌 구멍을 막을 힘도 없고 기술도 없어."
"네가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아직도 멍청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군. 네 계획을 설명해 봐."
"다른 초월자들을 불러서 죽이면, 그 부분은 인류의 영지가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뚫린 구멍이 저절로 사라지지. 이 부분은 내 추측이 정확한 거지?"
"맞아."
"사실 난 너까지 다 죽이면 이 세상을 손쉽게 지켜낼 수 있어. 그러나 난 D를 죽이고 싶어 너에게 살길을 열어주는 거야."
"짜증 나지만, 인정. 힘도 형편없고 격도 낮지만, 죽이는 재주는 타고났구나."
"나는 무슨 급인데?"
"S급이야."
"높은 편이야?"
"19번째 등급이야. 총 71등급이 있으나, 19번째도 매우 낮다고 여기면 돼."
신기는 몸속에서 꿈틀대는 강대한 힘을 살살 달랬다.
"우선 모든 초월자를 소멸하는 거야. 해골용과 시체용은 건너오는 즉시 죽게 되어있어."
"그 둘의 운명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했더니, 이 세상의 운명과 섞인 모양이군. 초월자 주제에 조심하지 않고."
"너라고 해도 별수 없지 않아?"
"화산 속으로 숨어도 되고,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도 되지. 어차피 종족을 다 잃고 격이 B로 떨어지겠지만, 초월자는 쉽게 죽지 않아. 그 둘은 종족을 아끼는 마음이 좀 과한 편이지."
"다른 놈들을 다 죽이면, 내가 너희 세상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넌 여기서 구멍을 막아버리지."
"서로 세상을 교환하자는 뜻인가? D는 그 전에 처리해주고?"
"아냐. 네가 구멍을 막아버린 후, 내가 다시 저쪽 세상에서 구멍을 뚫을 거야. 그러면 네가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구멍을 막으면 되지. 뚫은 세상에서밖에 막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정확한가?"
"격이 낮은 주제에 아는 건 많군."
"세상을 바꿀 때, D를 불러내는 방법을 나에게 알려줘. 너는 네 세상에서 유일한 초월자가 되어 자신의 종족을 번성할 수 있고, 나는 운명의 대적자인 D를 죽여서 기쁘고. 나쁘지 않은 거래지?"
"문제가 있어. 너와 내가 격이 너무 차이가 나서 계약 조건이 까다로워."
"어떻게 까다로운데."
"쓸모없는 정보는 많이 알고 정작 필요한 건 모르는구나. 이래서 격 낮은 것들이랑 계약하기 싫다니까."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툴툴거리니 밉지 않았다. 심지어 귀엽기까지 했다.
"조건 계약을 체결해야 해.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켜야 계약이 성립되는 식이지. 그런데 격이 낮은 네가 불리해. 나는 너에게 구멍을 뚫는 법을 가르쳐주는 걸 조건으로 하고, 계약의 완성은 D를 불러내는 방법을 너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하면 돼."
"너는 다른 일곱 종족의 초월자를 모두 소멸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구멍을 다시 뚫고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도 조건으로 걸어야 해. 계약의 완성은 D를 불러내서 소멸하는 것이고. 격이 낮은 너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계약이야."
"하자. 너는 너에게 유리한 계약이라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이득이 충분한 계약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굳이 계약서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이, 신기는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확인했다. 계약이 맺어지자 엘프 여왕은 생명의 막을 거뒀다. 신기는 가까이 다가가서 엘프 여왕에게 접근한 후,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신기의 것은 아니고, 신기를 세수시켜주다가 효주가 놓고 간 것이다.
"이거 셀카라는 건데, 찍어서 내 계정에 올릴 거야. 그러면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계약했음을 알게 돼."
"이 기술을 가르쳐줄 수 있어? 그럼 내가 쓸만한 검 하나 대가로 줄게."
신기는 네트워크 구성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프로토콜 등을 아는 만큼 설명했다. 한참 진지하게 설명하는데 엘프 여왕이 말을 끊었다.
"셀카라는 걸 찍는 데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해?"
신기는 유튜브의 셀카 강좌 영상을 하나 틀어주었다. 초월자답게 엘프 여왕은 바로 배워냈다. 그러면서 격 낮은 것들과 대화하는 게 참 피곤하다며 툴툴거렸다.
"이런 걸 배워서 뭘 하게?"
"내 종족은 즐길 거리가 너무 적다. 이런 빛을 이용한 놀이는 내 종족이 백 년 정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DUAL SYSTEM ###
아프리카.
밑으로 내려가니 박영광과 제이크 그리고 최영웅과 박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감금의 시간에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안색이 많이 초췌했다.
"날 생각해준 거 고마워."
"저 멍청한 것들. 어차피 당신이 없으면 인류는 멸망입니다. 그리고 정의는 늘 소수의 편에 있는 법이죠."
미처 주의하지 못했는데, 맥도 이들 무리에 섞여 있었다. 신기와의 친분이 깊다고 할 수 없는 맥이지만, 정의는 소수에게 있다는 신념 하나로 신기 편을 들다가 넷과 함께 감금되었다.
"차라리 저들 말을 따르는 척하며 날 구하지 그랬어?"
"미안, 너무 화나서 연기할 수 없더라고."
제이크의 말에 신기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제이크에게 사진을 전송해줬다. 신기는 자신의 SNS 계정과 비밀번호를 모두 모른다. 전문적으로 관리해주는 사람이 있어 가끔 원하는 사진을 찍어 전송해줄 뿐, 본인이 직접 해본 적이 없다.
"이거 회사 공식 SNS로 올려. 엘프 여왕과 계약했어. 다른 초월자들을 다 죽이고 D도 죽이고 엘프 여왕은 돌아가는 거로 계약했지. 계약 내용은 밝힐 필요 없어."
제이크는 1분도 안 걸려 사진을 첨부하고 멘트를 작성했다. 올리고 나서 10초도 안 되어 제이크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댓글을 지켜보던 신기가 이마를 찌푸렸다.
"로리왕이 날 말하는 거야?"
짜증이 난 신기는 제이크에게 '지시'했다.
"날 모함한 자들은 전부 고소한다고 해. 그리고 성질나면 괴물하고 안 싸운다고 해."
제이크는 신기의 말대로 글을 올리면서도, 입으로는 계속 신기를 말렸다.
"신기, 그런 대응은 안 좋아. 그런데 왜 내 손은 내 말을 안 듣는 거지? 아우, 이거 좀 어떻게 해봐. 이런 거 올리면 안 좋다고."
"그리고 날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자들 전부 경질해야겠어. 이놈들은 믿음이 너무 부족해. 삼두사도 한 방에 해치운 나야. 자꾸 약한 척 엄살 부렸더니 사람을 물로 보고 있어."
제이크는 전화기를 꺼내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했다. 신기의 지시대로 말한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만, 나한테 뭘 시키지 마.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이나 말해."
"매우 슬픈 이야기야."
그날, TV 화면이 멈추고 전화도 통하지 않자 신기는 컴퓨터를 통해 전투장면을 지켜보려 했다. 그런데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가다가 창고 문이 살짝 열린 걸 발견했다. 다가가서 창고 문을 닫으려다, 안에 뭐가 있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창고 안에는 나무 상자가 잔뜩 있었고, 벽과 나무 상자에 많은 낙서가 있었다. 효주가 혼자 내려와서 벽과 상자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창고 문을 안 닫은 듯했다. 신기는 효주가 삐뚤삐뚤 그린 그림들을 감상하다,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검은 구슬이 가득 차 있었다. 신기가 박영광에게 모아두라 했고, 모은 구슬들을 이곳에 보관했다. 그러나 검은 구슬을 모으지 않은 것도 한참 되었고, 모두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A급 99레벨. 봉인. 호환성. 법칙.
괴물에게 고전하는 동료들이 생각나자 신기는 결심을 내렸다. D의 심장 조각을 먹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덜 위험하다. 그리고 신기는 자연 각성자다. 검은 구슬을 먹고 죽을 가능성이 무척 작다고 판단된다.
구슬 한 상자를 먹었는데 전혀 배가 부르지 않다. 오히려 배가 고파서 검은 구슬을 더 먹고 싶었다. 그렇게 수십 상자의 검은 구슬을 먹고도 더 먹고 싶었다. 다행히 바로 옆에 있는 창고에 구슬이 있었고, 그 창고는 효주가 들어가 놀 공간도 없을 만큼 꽉 찼다.
세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자신이 먹은 구슬이 백만 개는 넘지 않았을까 신기는 생각했다. 그리고 몇 상자 남았을 때 신기는 드디어 배부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창고 문을 닫은 신기는 방으로 가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었는데도 많은 게 보이고 많은 게 들렸어."
"그럼 우리도 검은 구슬을 먹고 강해질 수 있어?"
"마력 각성자는 안돼. 기력 각성자는 되는데,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 여기 두 변태 형은 검은 구슬을 먹고 조금 강해질 수 있고, 여기 박철은 효과가 별로 없어."
"그럼 너 지금 A급 다음으로 넘어간 거야?"
"등급, 레벨, 스킬 다 사라졌어. 난 각성자 시스템을 초월했어."
D의 시스템에서 신기는 독립했다. D가 죽더라도 신기만큼은 능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D의 시스템에 존재하는 모든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굳이 떠올리고 외칠 필요가 없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
"그럼 아까 나를 움직인 게 박철과 같은 스킬이야?"
신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철이 손바닥을 제이크에게 향하고 외쳤다.
"별장 하나 나에게 양도해라."
"버릇없이 형한테 반말이야."
제이크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박철이 입을 삐죽였다.
"사람마다 적성에 맞는 스킬이 있어. 박철은 아마 멈추는 명령에 특화된 것 같아. 나는 간파 계열과 분석 계열 그리고 지휘 계열이랑 상성이 좋은 것 같아."
"아우, 이제 뭘 할까?"
"우선 제주도로 가자. 남미 쪽에서 곧 뇌물을 바치며 해방해 달라고 할 거야. 그때 마지못한 척 들어줘야지. 내가 봉인 스킬도 쓸 수 있으니까, 며칠이면 봉인이 끝날 거야."
- 작가의말
신기는 S급 초월자가 되었습니다.
초월자는 총 71등급입니다. 제일 높은 게 A급이고, 순서대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27번째는 AA급이고 53번째는 AAA급입니다. 가장 쩌리인 71번째는 SSS급입니다. 헌터가 각성하자마자 SSS급인 초월자가 되면 무척 강한 셈이죠.
이 부분은 작은 유머로 봐주십시오. SSS급에 지친 분들이 피식 실소라도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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