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요새를 만들다
거제도 부동산 거래처.
"젊은 분이 참 안목도 좋습니다. 8억으로는 절대 못 사는 집이죠. 집주인이 미국에 이민 가면서 급매물로 내놓은 건데 잽싸게도 채셨네요."
며칠 전,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섬을 구매하고 이런저런 작업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광고를 그대로 따라 하려던 신기의 생각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서 이미 튼튼한 건물이 지어져 있는 매물이 있나 검색하다가 거제도의 별장을 판매하는 광고를 클릭했다.
보통 부동산 광고와는 다르게 이 별장 광고는 튼튼함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별장을 둘러싼 담도 높이가 3미터나 되었고 철문도 무게가 400킬로가 넘는다. 집도 벽을 표준 두께보다 반 배 더 두껍게 지었고 커다란 지하 차고도 있다.
흥미를 느낀 신기는 부동산 업자와 연락한 후 거제도로 내려가 직접 확인했다. 근처의 다른 별장은 10억 이상씩 하는데 이 별장만 8억을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도착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해변 별장이라고 했지만, 길의 가장 끝에 있는 이 별장에서 해변으로 가려면 구불구불한 길로 움직여 1킬로 이상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이 별장은 해변에 있는 둔덕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동서남북으로 부는 모든 바람이 이 별장을 거친다.
거기에 면적도 다른 별장보다 작다. 집도 더 작고 마당도 더 작다. 그리고 지하 차고라고 한 것은 사실상 창고나 다름없다. 차를 넣는 건 문제 없지만, 차를 넣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그저 물건을 넣기 위해 만든 창고임이 분명했다.
부동산 업자와 헤어진 후 신기는 태양광 발전기 설치를 알아보았다. 태양광 모듈 패넬 가격은 브랜드에 따라 수십만 원씩 차이가 났다. 설치비도 만만치 않았다. 최소 600만 원은 각오해야 한다.
해수담수화 시설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거제도가 대한민국 강수량 1위라는 말을 우연히 얻어들었다. 차라리 비나 눈을 깨끗하게 바꿔주는 정수시설이 낫다는 말에 정수시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이 많았지만, 며칠 더 찾아봐도 나은 선택이 없어서 신기는 결국 별장을 구매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계좌에 있는 돈이 그대로인지 체크하는 일을 이젠 그만두기로 했다. 계약하고 대금을 지급하는 과정에 이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돈 많이 버세요."
부동산 업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오며 신기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어머니는 항상 수고 많으셨다고 고개를 숙이며 깍듯이 인사했다. 인사하고 나오다 예전 생각이 갑자기 나서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스트레스에 매운 음식이 좋다는 말이 생각나서 점심을 맵게 먹었다. 그리고 정수시설 업체와 태양광 모듈 패널을 설치하는 업체를 불렀다. 서로 방해하면 안 되기에 함께 모여서 미리 상의해야 한다.
"야, 여서 니 또 보네?"
"니 돈 디따 버나 보다. 사람이 막 광이 난다야."
다행히 둘은 잘 아는 사이였다. 서로 싸우는 일 없이 둘이 쑥덕거리며 어떻게 할지 정하고는 신기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젊은 사장님, 물건 도착하면 다시 전화 주이소."
"와, 니 서울말 디따 잘하네."
왁자지껄했던 둘이 떠나고 반 시간 정도 지나서 냉동실 만드는 업체에서 사람이 왔다. 지하 창고를 둘러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장님, 설비 제외하고 비용은 3천 정도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냉동실을 어따 쓰실라고 합니까? 전기세가 한 달에 4천 정도 나옵니다. 일 년에 5억이에요."
신기는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음식을 좀 더 오래 보관하는 걸 원한다고 말했다. 신기의 말을 들은 남자는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라믄 가격이 싼 단열재를 쓰고 에어컨 몇 대 빵빵하게 트는 게 낫습니다. 천에 문까지 손봐드릴게요. 대신 저 기둥은 그대로 둡니다."
남자는 친절하게 창고의 회로보호 차단기를 체크하고 말했다.
"회로 차단기 더 센 거로 갈아야 합니다. 이걸 쓰면 몇 분에 함씩 튑니다."
신기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남자의 말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 천만 원에 창고를 개조하기로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을 이체했다. 남자가 떠난 후 신기는 회로 차단기에 대해 검색했다.
'다행이다. 이건 쉬운 거구나.'
신기는 다시 에어컨을 알아봤다. 여러 제품을 보며 에어컨에 대한 지식을 풍부히 하다 온도 조절 시스템이라는 물건을 확인했다. 에어컨 여러 대와 연결한 후 온도를 체크해서 에어컨을 켜고 끄는 걸 컨트롤 하는 설비다.
홍보문구에 따르면 학습형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데이터를 누적하고 분석해서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전기를 더 절약한다. 신기는 이런 단순한 성장형 프로그램에도 인공지능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느냐는 고민을 잠깐 했다. 과대포장과 허위광고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하는 건 아닌지 성찰했다.
TCS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제품은 최대로 에어컨 여덟 대까지 컨트롤 가능하다. 아까 남자가 거실용 에어컨 여섯 대면 넉넉하다고 말했다. 에어컨 자체에 온도를 체크하고 에어컨을 멈추는 기능이 있다. 신기가 이 제품에 흥미를 느낀 건, 정전했다 다시 회복되었을 때 이 제품이 에어컨을 켤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튿날 전기기사를 부르니 전기 얼마 쓰냐는 질문을 받았다. 에어컨 여섯 대라고 말하니 전기기사는 회로를 둘로 나눌 것을 제안했다. 16A짜리 두 개로 나눠서 에어컨 석 대씩 쓰라는 건의에 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게 없으니 마냥 따를 뿐이다.
작은 규모나마 전기공사를 하고 다음 창고를 단열재로 보강하고 에어컨을 설치했다.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한 후 전기회로에 연결했다. 정수시설을 만들고 빗물 따위를 저장할 탱크 하나와 정수를 끝낸 물을 저장할 탱크 두 개를 설치했다.
탱크 하나는 집보다 좀 더 높게 하여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는 땅에 놓고 수도꼭지 하나를 달아서 직접 받아쓸 수 있게 만들었다. 높은 탱크로 물을 끌어 올리려면 전기가 필요하다. 이건 수동으로 해줘야 한다.
"높은 탱크는 집안 상수도랑 연결 했심더. 밸브는 주방에 있는 노란색 밸브임더."
태양광 발전기 설치에 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냐 했는데 패널의 각도나 위치를 정하는 것도 그렇고 집의 전기회로와 연결하는 것도 그렇고 신기로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 일들을 척척 해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했는데 지쳐버렸다. 부모님은 이런 걸 다 아셨을까 생각하다가 기분이 울적해졌다. 심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우울증과 심리치료에 대해 검색했다.
예전에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벌 받는 거로 생각하며 자포자기했다. 그러나 작은 희망이 생긴 지금은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아끼게 되었다. 뜬금없는 설움에 북받친 신기는 집으로 들어가 목놓아 울었다.
### DUAL SYSTEM ###
어딘지 모를 군부대의 생활관.
최송철은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예측 스킬을 사용한 후 먼저 구술(口述)한다. 구술한 후 다시 글로 쓴다. 녹음한 내용과 글로 쓴 내용이 차이가 크게 나면 박 대위에게 갈굼을 당해야 한다. 처음에는 연병장을 뛰게 했는데 이상하게 20킬로 짐을 메고 뛰어도 왼쪽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체벌 효과가 없으니 말로 갈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맞은 적은 없다.
"최 소위님, 박 대위께서 소환했습니다."
최송철은 자신의 바뀐 과거를 외우는 데 며칠이나 되는 시간을 소모했다. ROTC 소위로 임관 한 최송철은 부대원이라 쓰고 감시자라 읽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했다. 구술을 다 듣고 글로 적은 것까지 확인한 후 자신을 불렀는데 오늘은 좀 성급하다.
"시간이 언제인지 확실히 몰라?"
"그저 해변으로 해골들이 새까맣게 모여드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어디 해변인지는 알겠고?"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없었어? 사람 옷차림 같은 거 말이야."
"얼핏 보이기는 했지만, 여름인지 가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박영광 대위는 뒷짐을 쥐고 침묵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모습이다. 최송철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조용히 있었다. 갑자기 뒷짐을 푼 박영광 대위가 질문했다.
"해골이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본 건 언제지?"
"한 달 조금 더 넘습니다."
"그곳이 어딘지는 알겠어?"
"그저 한국이라는 확신만 생깁니다. 구체적인 위치는 저도 모릅니다."
"가서 하던 일 마저 해."
최송철을 내보낸 박영광은 이경화가 보낸 메일의 첨부파일을 클릭했다. 최근 차비 20만 원을 미끼로 재검사를 하게 시켰다. 재검사에서 각성 등급이나 개인 레벨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다만 스킬 레벨이 오르거나 스킬 등급이 오른 자들은 가물에 콩 나듯 보였다.
연필로 종이에 이것저것 끄적이던 박영광은 자신의 가설에 만족했다.
"순차적으로 예측하는 게 분명하다. 어딘지 모를 곳에 해골이나 좀비가 집결하고 조금씩 밖으로 기어 나온다. 첫 해골이 기어 나온 후 한 달 정도면 해변에 대량의 해골이 기어 나온다. 그러니 첫 해골이 기어 나온 시간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무뎌진 연필 끝으로 종이를 팍팍 찔렀다. 박영광이 흥분했을 때 자주 하는 버릇이다. 그래서 만년필이 아닌 연필을 선호한다.
해골이 해변에서 기어오르는 이 일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최송철은 새까맣게 몰려든다고 했다. 만 명의 군인이라면 아주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만 명의 군인을 모아놓고 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
"축구장 하나면 만 명이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지. 고작 1만으로 새까맣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무척 많은 해골이 몰려올 것이다."
박영광은 지도를 바라보았다. 왜곡이 없이 정확한 군사지도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지도는 좌표가 조금씩 어긋나있다. 해변의 길이도 조금씩 늘이고 줄여서 실제 윤곽과 차이가 난다.
"섬나라 원숭이들이 몰살하겠구나. 자위대 놈들은 자위나 하다가 싹 뒈져버리겠지."
박영광은 북한보다 일본을 더 싫어한다. 박영광은 자기 집안이 친일파라는 것을 몹시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비록 지금 그 친일파의 인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남북을 통일하고 고구려의 땅까지 수복한 후 친일파를 깡그리 잡아 죽이고 자기 목숨을 끊어 친일파의 피가 더는 흐르지 못하게 할 계획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처럼 역사책에 굵은 발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거다. 부귀나 영화나 다 부질없다. 조상들이 지은 죄를 내 피로 씻는다.'
이순신 장군님을 우상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할 꿈에 부풀어 있던 박영광은, 자기 집안이 친일파 집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느닷없이 접하게 된 진실에 박영광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증오와 악의를 가슴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친일파에 대한 증오와 악의 그리고 자신의 더러운 피에 대한 증오와 악의다.
정계와 재계 그리고 군부에 깊숙이 박혀있는 친일파의 숙청을 숙원으로 삼고 충직한 부하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빨라도 이십 년 뒤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기회가 각성자의 출현과 함께 성큼 다가왔다.
변화에 둔감한 늙다리들과 다르게 박영광은 분명 무언가 커다란 변화가 있다고 여겼다. 박영광은 인생 최대의 목표를 세운 후부터 잠시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정계와 재계에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인맥을 젊은 나이에 이미 구축해 놓았다.
사람들 앞에서 야심이 큰 군인을 연기하며 박영광은 각성자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 퇴물이긴 하지만 아직도 영향력이 꽤 남아있는 김덕팔이 헌터 협회의 협회장으로 부임하자 더욱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국과 친한 김 의원은 군부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다. 박영광은 헌터 협회를 국방부 밑으로 가져오는 것을 미끼로 협회장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미국의 B급 예측 각성자가 외계인의 침습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사실 박영광은 헌터 협회의 서버를 해킹해서 각성자 정보를 마음껏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메일로 보내달라고 한 건 헌터 협회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쓸 수 있는 손발이 많을수록 더욱 확실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 작가의말
주말에 약속이 잡혔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일일 연재는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Comment '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