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의 변화
서울 방향으로 날아가는 헬기 안.
박철은 신기의 옷을 당겼다. 신기가 쳐다보자 밖을 내다보라고 눈짓했다. 신기가 엉덩이를 떼고 밖을 내다보니 엄청 많은 좀비와 해골이 몰려 있었다. 미끼 스킬 한 번만 더 썼다면 지금 이 헬기 안에는 효주만 타고 있을 것이다.
"저, 혹시 전화번호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신기는 경호원 복장을 한 남자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무의식적으로 몸이 살짝 멀어졌다. 신기의 움직임에 남자가 다급해 해석했다.
"아니, 각성자랑 자주 만나면 쉽게 각성한다고 들었습니다. 절대 이상한 사람 아니니 오해하진 마세요."
"저 핸드폰 없어요."
"난리 통에 휴대전화 분실했습니다."
"효주는 핸드폰 있는데 번호 몰라요."
다양하게 거절당한 남자는 낙심하지 않고 자기 명함을 꺼내 건넸다. 박철이 남자의 명함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남자는 각성자에게 궁금한 게 많았는지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괴물 잡으면 레벨업 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맞아요. 그런데 효주는 레벨이 안 올라가요."
"혹시 각성하기 전에 뭔가 특별한 음식을 드시거나 특별한 일을 하신 적 있습니까? 꿈에 조상님이 나타났다던가."
신기는 말을 아꼈다. 자신만 특별한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특별하다는 건 안다. 신기가 침묵하자 박철이 대신 대답했다.
"저는 졸다가 각성했어요."
"각성하기 전에 뭔가 느낌이 없습니까?"
"아니요. 다만 본인이 각성했음을 그냥 알게 돼요.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신이 얻은 스킬이 어떤 건지도 저절로 알게 되고요."
남자와 대화를 하며 박철은 오히려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남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남자는 둘보다 각성자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서울에서 갈 곳이 없으면 저를 찾으세요. 제가 사는 구역은 하루에 5시간씩 전기를 줍니다. 대부분 지역은 4시간밖에 안 주거든요. 그리고 버스도 다른 데보다 더 많이 다닙니다. 주유소를 전부 정부가 통제해서 자가용을 보기 드물어요. 그런데 버스보다 자전거가 훨씬 빨라요."
남자는 진심으로 일행과 친해지고 싶은지 중요한 정보들을 엄청 많이 알려줬다. 수도는 이미 끊겨서 살수차나 소방차로 물을 공급한다는 것, 집안 화장실 대신 밖에 설치한 임시 화장실에서 일을 봐야 한다는 것, 전라도와 경상도 대부분 지역과 충청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은 정부의 방어선 밖에 있다는 것 등을 알려주었다.
"강원도는 운이 좋았죠. 이 괴물들이 화산에서 기어 나온다고 하네요. 강원도에 화산이 하나 있고 울릉도에서 오는 괴물도 수비해야 하기에 그쪽에 군대가 많았어요. 그래서 괴물을 잘 막아냈다고 합니다."
"수비선 밖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불만이 없습니까?"
"없을 수가 없죠. 국회랑 청와대 앞에 가서 시위하고 투신자살로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나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수비선 더 넓히면 어딘가 뚫려서 안에 사람들까지 위험하다고 하는데요. 솔직히 분단국가라서 군대가 많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신기는 마음이 아팠다. 만약 자신이 일찍 나서서 위험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걸 알렸으면 조금 나아졌을까? 아마 미친놈이나 관종으로 몰려서 사람들이 뱉은 침에 익사해 죽었을지도 모른다.
"헌터 협회에 찾아가면 공무원으로 채용한다고 하니 잊지 마시고 헌터 협회로 가보세요."
각성자임이 밝혀지면 바로 공무원으로 채용한다. 등급이 높고 좋은 스킬을 각성하면 7급 공무원이 바로 될 수 있다. 다만 헌터 협회가 국방부 밑으로 옮겨서 성별 나이 불문하고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 군필자라도 예외가 없다.
신기는 따로 생각이 있어 시큰둥했고 박철은 자신의 스킬이 위험한 스킬이어서 받아주지 않을 거로 생각해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효주는 공무원이 뭔지 몰라서 반응하지 않았다. 남자는 자기 말에 반색할 거로 생각했는데 별 반응이 없자 무안해졌다.
"각성자들은 괴물과 싸우고 있나요?"
"일부만 싸우고 있습니다. 김태풍이라는 B급 각성자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는데 정말 멋있더군요. 뭔가 휙 날아가면 좀비나 해골이 막 쓰러져요. 영국에 불을 사용하는 각성자보다 화려하진 않지만 등급이 높아서 그런지 위력은 훨씬 강하더군요."
"위험한 곳 많이 다니셨나 봐요."
"아닙니다. TV 틀면 나오는데 뭘요. 처음엔 CG네 뭐네 했지만 매일 새 영상을 틀어주니 믿을 수밖에요. 가끔 시간대가 맞으면 생방송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신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일이 터진 지 보름도 안 되는데 너무 대응이 신속하고 정확하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예상외로 유능한 인재들이 많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돈이 되면 자전거라도 하나 장만하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버스는 급히 전기차로 개조해서 속도가 정말 느립니다. 대신 공짜이긴 하지만요."
남자는 정말 각성자와 친해지고 싶었는지 무척 친절하게 팁을 알려주었다. 초등학교는 아니지만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은 계속 등교한다는 말에 신기는 입을 딱 벌렸다. 박철 역시 이 난리 통에도 공부한다는 말에 학을 뗐다.
"사회가 돌아가는 데 교육 시스템이 중요한 한 축이니 절대 멈춰서는 안된다가 정부의 견해입니다만, 다들 교육청장이 옷 벗기 싫어서 억지를 부리는 거라고 하더군요. 지금 몇 개 쓸모없는 부처를 없애거나 축소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인터넷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던데 어떻게 이렇게 소문을 잘 들으세요?"
"저희 과장님이 정보통에 수다쟁이여서 저희가 정보를 많이 얻어듣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 입으로만 퍼져도 하루면 전 서울에 다 퍼집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게 절대 과장이 아니더군요."
전기의 공급을 제한하고 핸드폰당 통화 시간을 제한했다고 한다. 핸드폰 번호 하나당 하루에 얼마씩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 하는 일에 따라 다르다. 공무원들은 무척 긴 통화 시간이 있다며 남자는 부러워했다.
"TV도 못 보고 전화로도 할 일이 없고 인터넷도 몇몇 사이트에서 정부가 내보내는 뉴스를 읽기만 하니 모여서 수다 떠는 게 업이 됐어요. 얘깃거리가 없으면 없는 말을 지어내서라도 수다를 떠는 게 요새 사람입니다."
그때 박철이 갑자기 외쳤다.
"저기, 저기 사람 있어요."
"눈이 참 좋으시네요. 이 높은 곳에서 사람을 발견하다니요."
부조종사가 무전기를 들고 한국말이 분명한데 알아듣기 힘든 대화를 나눴다.
"지휘실에 보고하는 겁니다. 현재 좌표를 기록해둔 다음 주변 지형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운 후 헬기가 와서 사람을 구할 겁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서울에 도착했다. 헬기가 착륙하자 벤 몇 대가 다가왔다. 효주가 헬기에서 폴짝 뛰어내리자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다가와서 강아지를 받으려 했다.
"효주가 안고 갈게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기가 들고 내리는 곰 인형을 받아들었다. 효주를 태운 밴이 먼저 출발하고 신기와 박철을 태운 밴이 출발했다. 박철은 둥그런 눈으로 신기를 바라보았다. 신기는 박철의 귀에 속삭였다.
"효주네 집 되게 부자야."
신기도 보는 눈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효주네 별장에 있던 가구들이 예사 물건이 아님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별장을 비울 때도 늘 가정부가 와서 청소하는 걸 보면 웬만한 부자는 아닐 것이다.
태운 정밀 지하 주차장에 내린 신기는 차 한 대는 통째로 들어갈 크기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안경을 쓴 남자는 코가 유난히 오뚝한 여자에게 둘의 안내를 맡기고 효주만 데리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 DUAL SYSTEM ###
태운 정밀 사장실.
오랜만에 만난 딸이 품에 폭 안겨들자 강유성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티 내지 않고 조용히 눈물을 흘린 강유성은 흔적을 깨끗이 닦은 후 딸을 품에서 뗐다. 여전히 포동포동하고 귀여운 얼굴이지만, 강유성의 눈에는 수척해 보였다.
"효주 아빠 없어서 무서웠어요?"
"효주 안 무서워요. 효주 초인 됐어요."
효주는 그간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얘기했다. 물론 아이의 상상이 가미되어 걸러서 들어야 할 일들이 꽤 많다. 강아지의 이름이 효천이라는 말에 강유성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자기 친자식이 아니라지만 지금까지 친자식으로 알고 키웠기에 그간 든 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효주 이쁜 옷 입고 싶어요."
효주가 말하는 이쁜 옷은 새 옷을 말한다. 강유성은 여비서에게 효주를 맡기고 신기와 박철을 데려오라고 했다. 방에 있던 사람이 전부 나간 강유성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태운 그룹의 직계로서 자기 자식 하나 지킬 힘이 없었다니. 내 지금까지 부려온 위세는 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구나. 지금부터라도 내 사람을 만들고 내 힘을 만들어야겠다.'
신기에게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경호원들이 슈퍼에서 효주를 찾지 못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경호원이 감히 강유성에게 거짓말을 할 용기는 없을 테니 분명히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다. 그게 형일 수도 있고 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정신병으로 입원한 것도 무척 의심스럽다. 정신이 불안한 느낌은 있었지만 순식간에 정신병 진단을 받고 바로 입원했다. 가끔 보러 갈 때마다 약을 먹어서 강유성의 말에 대꾸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힘을 키워 태운 그룹을 내 것으로 만든다. 비록 지금 내가 후계자는 아니지만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내가 가장 유리하다.'
그때 최 실장이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강유성이 이마를 찌푸리자 최 실장이 다급히 말했다.
"중요한 소식입니다. 태운 엔터테인먼트 강문성 사장님의 아들을 찾아냈습니다."
최 실장은 강 회장의 사람이다. 그러나 강 회장에게만 충성하다가 강 회장이 죽으면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다. 그래서 강 회장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지만 강유성에게도 무척 충성하고 있다.
강유성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병에 걸린 아내와 이혼하고 새 여자를 맞이해서 아들을 낳으면 된다. 오십에 가까운 형들과 달리 이제 삼십 대인 강유성은 충분히 자식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같은 배에서 태어난 두 형이 편을 먹어서 어려웠던 거지, 둘이 사이가 벌어질 게 뻔한 지금 여전히 해볼 만하다.
'효주의 말이 절반만 진실이라고 해도 신기는 내가 알고 있던 각성자보다 훨씬 훌륭하다. 총알과 포탄은 언젠가 떨어지게 되어 있다. 절반이 넘는 땅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탄약의 소모가 무척 빠르다. 결국 이후 각성자가 몹시 귀해진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각성자가 아무 이유 없이 생겨난 게 아니라는 것, 각성자가 이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라는 걸 이제 와서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누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분명 신기라는 청년은 뭔가 알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굳이 레벨 올린다고 등대에 가서 괴물을 부르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박영광 그 친구와 조만간 술 한잔하고 각성자들을 협회에서 빼내야겠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최 실장이 신기와 박철을 데려왔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강유성은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다음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제 딸을 구해주고 보살펴줘서 무척 고맙습니다. 신기 군 그리고 박철 군, 이 은혜는 강유성과 태운 그룹이 평생 두고 갚겠습니다."
신기는 미리 짐작했고 요즘 간이 무척 커져서 괜찮았지만, 박철은 예상을 조금 했음에도 무척이나 놀랐다. 신기는 상대를 효주의 아버지가 아닌 태운 정밀의 강 사장으로 보며 대답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서로 돕고 도움받으며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말이 잘 통할 것 같구나. 애송이는 피곤한데 그래도 깜냥은 있어 보인다.'
"최 실장, 난 커피 부탁합니다. 두 분도 뭐로 마실지 최 실장에게 부탁하세요."
"저희는 홍차로 하겠습니다."
최 실장이 밖으로 나가자 강유성은 하던 공치사를 마저 했다.
"아이를 잃은 아비의 심정을 두 분은 잘 모를 겁니다. 혹시 원하는 게 있다면 이 강유성이 힘이 닿는 대로 돕겠습니다."
- 작가의말
강유성의 심경 변화를 좀 더 부드럽게 했습니다. 너무 확 미치는 것도 이상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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