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천복지
중국.
부총리는 중국에서 유명한 서예가이다. 가끔 작품을 내놓으면 수많은 사람이 다퉈서 가지려고 한다. 부총리라는 신분 때문에 고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 부총리라는 신분 때문에 돈을 받고 팔지 못해서 오히려 손해다.
飜天覆地, 번천복지라는 네 글자는 하늘을 뒤엎고 땅을 뒤집는다는 말이다. 용이 기어가고 봉이 날아가듯 한 글씨는 부총리가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서예의 법을 굳이 지키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쓴 글은 누구의 서법과도 닮지 않은 부총리만의 것이다.
부총리는 끓어오르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먹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먹이 다 마른 후 자신을 감시하는 카메라를 향해 네 글자를 보였다. 다시 글자를 내려놓은 부총리는 직접 마감까지 해서 액자에 넣었다.
精忠報國, 정충보국은 송나라의 충신 악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전에는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고 했는데, 국가에 충성하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고 첫 글자를 정으로 바꿨다.
"나란히 하기에는 내가 너무 부족하니, 밑으로 만족하자."
정충보국 밑에 번천복지의 액자를 걸어둔 부총리는 느긋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시작하자."
### DUAL SYSTEM ###
프로메테우스는 규슈섬을 향해 날아갔다. 최근 한국에서는 규슈섬 이름을 새로 짓기 위한 공모전을 열고 있다. 소각장이 완성되어 현재 규슈섬의 등대에 인력을 더 많이 파견하고 있다.
소각장이 완성되면 동해안과 남해안 등대의 부담이 줄어든다. 화산을 봉인하며 부담이 다시 늘어나겠지만, 그때 소각장에 인력을 더 투입하면 된다. 삼 년 정도의 시간이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넉넉한 땅을 마련할 수 있다.
"팰러딘, 괴물 다 몰아내고 뭘 할 거야?"
"괴물 다 몰아내면 삼촌은 나랑 결혼하기로 했어. 도장도 이미 찍었거든."
효주가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제이크는 정색해서 신기에게 질문했다.
"동양에서는 어린 여자랑 혼인하는 관습이 있다던데 사실이야?"
"그건 옛날 중국 얘기고, 어린 남자아이가 몸이 허약하면 병으로 죽을까 봐 젊은 여자를 며느리로 들여. 부부가 액운을 나눈다고 해서 아이가 무사히 크기를 바라는 거지."
"팰러딘은 아는 게 참 많구나."
정화 특성을 깨우려고 별의별 공부를 다 했다. 그 과정에 재밌는 것들을 많이 접했다.
"팰러딘, 나랑 같이 사업 하는 건 어때? 나 집에서 독립하려고 해."
신기는 그제야 왜 자신이 최근에 힘들었는지 깨달았다. 신기는 실패가 두려워서 늘 미래를 그리지 못했다. 세상을 구하려는 너무 큰 짐을 짊어지고 있어서 성공하는 밝은 미래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미래가 없는 사람으로 살면서 열심히 하려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세계 여행을 하고 싶어. 지금처럼 말고 느긋하게. 그때도 우리 다 함께였으면 좋겠어."
"형, 그럼 괴물 다 몰아내고 학교 안 다녀도 되는 거야?"
박철의 법적 보호자는 현재 신기로 되어 있다. 박철이 학교를 그만두려면 신기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물론 괴물을 다 몰아냈을 때 박철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구경하는 것도 공부야."
"그럼 우리 곰돌이 타고 여행해요."
효주의 말에 최영웅이 반색했다. 효주의 강화 스킬을 받은 곰들은 과장을 보태서 집채만 하다. 사람 두셋은 쉽게 등에 태우고 움직일 수 있다.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안장을 만들었었는데 곰들이 그새 또 성장하는 바람에 크기가 맞지 않아 다시 크기 조절이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괴물 몰아내고 시작할 게 아니라 지금부터 하자. 첫 여행지는 온천여관으로."
즐거운 대화 도중에 갑자기 경보를 울렸다. 최영웅이 벌떡 일어나 조종석으로 달려갔다. 곧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발, 미사일."
"구조 버튼 눌러."
제이크의 말에 최영웅이 다급하게 구조 버튼을 눌렀다. 위성을 통해 본부에 구조 요청이 전해지면 자동으로 모든 상황을 전달하게 된다. 그러면 본부에서 알아서 구조 조치를 할 것이다.
버튼을 누르고 10초도 안 되어 쿵 소리와 함께 프로메테우스가 흔들렸다. 제작자의 호언장담이 틀리지 않았는지 미사일에 직격당하고도 전혀 파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사일은 하나가 아니었다.
"바다로 내려가자. 그리고 시동 꺼."
제이크의 말에 최영웅은 반사적으로 엔진을 멈추는 버튼을 눌렀다. 제이크가 반대편의 버튼을 조금 늦게 눌렀다. 15초의 시간이 흐르고 엔진이 멈추자 프로메테우스는 하강이 아닌 추락을 시작했다.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엔진을 꺼서 프로메테우스는 균형을 잘 잡지 못했다. 그때 또 경보가 울렸다.
"어뢰? 시발 어떤 새끼야."
신기는 빠르게 치유 특성을 활성화했다. 쿵 소리와 함께 작지 않은 충격이 프로메테우스를 흔들었다.
"제이크, 제이크 거기 있어?"
"아빠? 빨리 구해줘."
"방금 중국 정부가 반란 세력이 테러를 벌이고 있다고 성명을 발표했어."
"미군에게 빨리 우리를 구원하라고 해. 난 미국 공민이야."
"중국에서 자국 영해에 들어오면 공격을 불사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어. 반란군에게 배후가 있다면서 중국의 항공모함 두 대가 우리 함대를 가로막고 있어. 중국 영해나 영토에 들어오면 침략자로 규명하고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해."
둘의 대화가 너무 빨라 남은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제이크의 절망적인 표정에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확인했다.
### DUAL SYSTEM ###
중국.
코드 016은 영국 첩보 요원이다. 007 영화를 보고 첩보 요원을 꿈꿨고 짜릿한 모험과 수많은 미녀와의 낭만적인 해후를 꿈꾸면서 힘든 훈련을 견뎌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서른이 되어서야 겨우 깨달았다.
흐릿한 인상 덕분에 잠입 요원 훈련을 중점적으로 받은 016은 머리를 염색한 후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중국에 잠입했다. 중국 감숙 지역 사투리를 배웠고 신분을 증명할 신분증도 있다. 심지어 중국 공안이 조회하면 모든 자료가 정확히 나온다.
첩보 일은 생각했던 것처럼 멋지고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016 역시 예상했던 것보다 첩보 일에 재능이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했고 순조롭게 추적해서 단서를 잡았다. 하지만 016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중국의 치밀함이었다.
갑자기 터진 EMP에 모든 연락 수단을 잃은 016은 이 미친놈들을 제지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살아서 이들의 만행을 까발리는 걸 목표로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 DUAL SYSTEM ###
평양.
김태풍은 끊임없이 몰려오는 구조 요청에 허둥지둥했다. 서해안은 그나마 괜찮은데 동해안과 백두산 수비선에서 구조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갑자기 수많은 괴물이 몰려와서 수비선 전체가 무너지게 생겼다.
"김태풍 동무. 어디도 가지 마시라요. 여기서 지도자 동무 지키야 합네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지휘부는 아예 수비선과 등대의 각성자들을 철수했다. 2년 전에 괴물이 처음으로 침공했을 때 평양을 중심으로 작은 지역만 지키던 행태를 반복했다. 다행히 대부분 사람이 평양 근처에 모여 살아서 예전처럼 많은 사람이 죽을 염려는 없다.
"직승기 준비해 주세요. 가서 사람들을 구해오겠습니다."
"그건 동무가 걱정할 일이 아닙네다. 이미 구출을 위해 차량과 직승기는 전부 출발했습네다."
김태풍의 눈에 먼 곳에 있는 헬기 몇 대가 보였다. 눈에 빤히 보이는 곳에 헬기가 있는데도 전부 출발했다고 거짓말을 해댔다. 김태풍은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총알은 각성자라고 피해 다니지 않는다.
### DUAL SYSTEM ###
제주도.
"긴급 대피령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땅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상황이 반대되었다. 지난번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버렸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위쪽을 버려야 한다. 강 회장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일본 해안의 등대와 규슈섬의 모든 인력을 철수해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사흘 정도 걸립니다."
"당장 시행하게."
박영광은 울릉도에서 스킬을 수련하다 급히 제주도로 불려왔다. 박영광이 내놓은 자리를 차지한 자는 우왕좌왕하다 강 회장에게 따귀를 맞고 옷을 벗었다. 박영광은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상황을 단번에 파악하고 바로 지휘를 시작했다.
"긴급 대피 조치를 시행합니다."
사이렌이 울리자 사람들은 급하게 짐을 쌌다. 귀한 휘발유를 태우는 버스들이 줄을 지어서 사람들이 탑승하기를 기다렸다. 버스마다 50명에 가깝게 꽉꽉 채워 넣고 출발했다. 해변과 가까운 지역들은 항구로 출발했고 먼 지역들은 미리 정해진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에서 사람을 내린 버스들은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다른 사람을 실으러 떠났고 새 버스를 갈아탄 사람들은 계속 남쪽으로 향했다. 평양에 사람들이 모인 북한과는 다르게 한국은 사람들이 골고루 퍼졌다. 그래도 대부분 대도시에 모여 있어서 대피가 어렵지는 않았다.
"신분증 꼭 챙기세요. 아이 손을 꽉 잡아요."
애국청년단의 봉사자들이 질서 유지를 도왔다. 경찰이나 군인들은 이미 38선으로 가서 괴물을 저지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후방에서는 진지를 한참 구축하고 있다. 민간인이 다 철수한 후 수비선을 점점 뒤로 물릴 것이고, 지금 만드는 진지들은 그때 사용될 것이다. 태운 그룹 소속의 육군들도 언월도나 금강봉을 들고 수비를 도우러 출발했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의료팀, 빨리 와요."
간혹 몸이 허약한 사람이 쓰러지기도 했다. 최근 다시 먹거리가 풍성해졌지만 오랜 기간 적은 양의 식량을 배급받으면서 건강이 나빠진 사람들이 많다. 쓰러진 사람들은 의료팀의 진단과 치료를 우선 받고 의료 차와 함께 출발하는 침대 버스에 탑승시켰다.
혼잡하지만 질서가 사라지지 않은 퇴각 현장을 지켜보던 서울 시장이 감탄했다.
"한국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럼요. 저도 시장님이 한국에 남아 있는 게 신기합니다."
방위군 사단장의 가시 돋친 말에 서울 시장이 고소를 지었다.
"한국이 가장 안전한 국가니깐요. 수비하는 데 가장 적은 자원을 소모하는 게 한국입니다."
한국 해안선 등대와 일본 해안선 등대의 이중 보호를 받는 제주도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땅으로 평가받는다.
"일단 민간인을 다 철수시키고 나서 강 회장에게 가서 고개를 숙여야죠. 저 정도 인재는 강 회장도 내치기 아쉬울 겁니다."
"강 씨 왕조가 탄생하겠군요."
### DUAL SYSTEM ###
영국 노팅엄.
"말을 좀 해. 소리만 지르지 말고."
에릭은 D와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짜증이 커졌다. 이 멍청한 놈은 에릭의 질문에 대답하는 게 아니라 자기 할 말만 한다. 에릭의 질문에 대답해주면 그 대답으로 더 많은 걸 유추하려는 목적인데, 늘 질문과 상관없이 자기 할 말만 한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말을 안 하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에릭은 D가 화났다는 건 알겠지만,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네 정체라도 말해줘."
어느새 에릭의 몸은 다시 밀실로 이동해 왔다. 맥이 두 번 방문할 때 에릭은 세 번 방문할 수 있다. 오늘은 맥과 겹치지 않는 날이다. 그래서 밀실에는 에릭뿐이었다. 벽에 걸린 장식을 한 번 쳐다본 후 에릭은 밖으로 나갔다.
"에릭, 중국이 사고를 쳤어. 중국 경내의 화산을 한꺼번에 봉인해서 기타 지역의 괴물 숫자가 급증했어."
"증거 있어?"
"목격자가 첩보부의 요원이야. EMP 때문에 증거가 없어."
에릭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마 D가 화가 난 건 이것 때문이리라. 중국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알아내고 지금 사태에 대한 대응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중국에 봉인 각성자가 있겠군. 아마 화산을 모두 99%까지 봉인했겠지. 그리고 시기가 되었다 싶으니 빠르게 이동하면서 화산을 빠르게 봉인했겠군. 언제 봉인 각성자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코리아의 각성자보다 위력이 뛰어나군. 중국 경내에 화산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섣불리 판단할 일이 아니야. 중국 경내에도 괴물이 갑자기 범람하고 있어."
"일부러 일부 화산을 안 봉인했을 수도 있겠지. 사실 봉인 스킬을 가진 자가 있으면 내가 써먹으려 했던 방법이거든. 유럽의 화산들을 한꺼번에 봉인하려고 했었어."
- 작가의말
요약하면.
중국의 봉인 능력자는 하현주와 달리 봉인 정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화산을 99% 정도까지 봉인해놓았다가 소각장이 완성되자 빠르게 봉인해 버린 것이죠. 그리고 이 방법은 에릭이 써먹으려 했는데 봉인 능력자가 나오지 않아서 못 써먹었던 방법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 주변의 화산들에 더 많은 괴물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은 이미 화산이 많은 지역을 버렸고 중국 동해의 화산은 하현주가 봉인했습니다. 남해에 소각장을 만들어 남쪽을 보호, 북쪽은 화산 별로 없음, 동쪽은 버린 땅의 사람들과 통일 한국이 부담, 서쪽 역시 버린 땅의 사람들이 부담해야 하고, 산이 많은 지역이라서 수비선을 구축하기도 편리합니다. 옛날의 중국 크기로 돌아가지만, 괴물 걱정이 적은 나라가 됩니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화산을 봉인해서 땅을 다시 넓힐 생각이죠.
물론 이건 부총리의 계획이고, 실제로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제가 좀 심술이 많은 편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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