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드래곤
누런 돌 공원.
신기는 목검 하나만 들고 화산구에서 대기했다. 신기의 곁에는 박영광과 박철 그리고 최영웅만 남았다. 엘프 여왕으로부터 로봇 종족의 두 초월자에 대해 들었다. 하나는 타이탄이라고 불리는 금속 거인이고, 다른 하나는 전투기계라고 불리는 격이 현저히 낮지만 전투력이 무척 강한 초월자다.
최영웅은 구슬을 먹고 철벽(鐵壁) 스킬이 금강(金剛)으로 변했다. 신기도 보유하지 못한 스킬로, 철벽과 구슬의 능력이 결합하여 새롭게 생긴 스킬이다. 수비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동시에 기력을 한꺼번에 쏟아붓는 것도 이젠 꽤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어 공격과 수비 모두 활약할 수 있다.
박영광의 소환체 역시 공격력이 무척 강하다. 그리고 흡혈귀와 삼두사의 구슬 덕분에 소환체의 방어력 역시 무척 강해졌다. 박철은 유혹 혹은 지시로 상대를 유인하거나 멈추는 역할을 도맡았다.
"다행이다. 한 놈만 왔어."
'히드라와 포이즌 드래곤은 격이 같아 함께 도착했다고 했지.'
타이탄과 전투기계의 격이 많이 차이가 나기에 타이탄이 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전투기계 역시 요해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피해를 주면 요해가 보일 수도 있고, 트랜스포머처럼 아예 요해가 없을 수 있다.
천 개가 넘는 기계 팔이 동시에 움직이는 데 전혀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총과 같은 무기를 든 짧은 팔도 있고 검이나 도끼 망치 등 무기를 든 긴 팔도 있다. 원거리건 근거리건 투척 무기건 서로서로 방해하지 않고 넷을 향해 빗방울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굳이 폭풍우와 같은 표현을 선택하지 않은 건, 전투기계의 공격은 다양하기만 할 뿐 위력은 약간 심심했기 때문이다. 최영웅이 불멸의 안개를 넓게 펼쳐 박철과 박영광까지 감쌌다. 신기도 여러 스킬을 사용하며 괴물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폈다.
'전기 계열에 반응을 보이는구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게 괴물이지만, 가끔 상식에 부합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지구의 일부 법칙은 초월자도 피해갈 수 없는 듯하다. 신기는 천둥새 스킬을 사용했다.
새파란 공이 허공에 떴다. 공에서 새라고 하기엔 너무 길고, 화살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넓은 천둥새가 나와서 전투기계를 향해 꽂혔다. 김태풍의 바람집처럼 마력이 다 사라질 때까지 천둥새를 만들어낼 수 있는 벼락둥지다.
처음에는 별 대단한 반응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기계 팔이 서로 부딪치고 방해하고 심지어 서로 공격하기까지 했다. 전투기계의 표면에 전류가 마구 흐르면서 최영웅과 박영광도 공격을 멈췄다. 전기가 딱히 둘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지만, 고압 전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접근하기 싫어졌다.
'상식에 부합하듯 상식을 벗어났군. 전류가 흘러 번개가 되는 건데, 저건 그냥 번개가 도착해 전류가 되네.'
"형, 저놈 변신해요."
천 개가 넘는 팔을 안으로 들인 후, 전투기계의 모습이 변했다. 트랜스포머처럼 속도가 빠르지 않았지만, 느린 속도도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전투기계는 다리 두 개에 팔 두 개가 달린 인간형의 모습으로 변했고, 두 손에는 최영웅의 것의 수백 배 크기가 되는 커다란 망치가 들렸다.
'제길. 이젠 만화를 비현실적이라 욕하지 못하겠군.'
전투기계가 든 망치 두 개를 합치면 전투기계의 몸보다도 더 크다. 박영광이 박철을 데리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망치에 가격당한 땅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긴 걸 본 신기는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
시간을 돌리기 전, 좀비 드래곤이 육중한 몸을 움직일 때 바닥에 큰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지구의 물리 법칙에 좀비 드래곤이 저항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전투기계가 바닥에 남긴 흔적을 보면, 철벽 따위의 스킬로 상쇄할 수 없을 정도의 물리력을 전투기계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격은 낮지만 전투 능력이 무척 강하다 했지. 짧은 시간에 가장 효과적인 전투 방식을 찾았고, 지구의 물리법칙을 따르기로 한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우리도 물리법칙으로 상대하면 되겠네.'
넷이 빠르게 물러나자 전투기계가 육중한 몸을 움직여 따랐다. 물리법칙을 저항할 수 없기에 움직임이 무척 느려졌다. 신기 일행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철갑을 뚫는 포탄, 철갑을 깨는 포탄, 철갑을 때려 안으로 진동을 전하는 포탄, 그 외에도 수많은 포탄과 총알이 전투기계의 몸을 덮쳤다.
"역시 군사력은 미국이 최고야."
박영광이 전투기계를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미군의 화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신기와 박철은 박영광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전투기계가 원래대로 회복하는 순간 박철이 멈추고 신기가 강한 공격을 날릴 계획이다. 그 순간에는 물리 공격도 먹히고 스킬 공격도 제대로 먹힌다. 엘프 여왕으로부터 얻은 소중한 정보다.
"박철."
박철을 부르는 동시에 신기는 기력을 모두 짜서 큼직한 공을 만들어 던졌다. 공이 작을수록 더 강한 파괴력을 보이지만, 압축한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기에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그래서 창졸간에 날린 공은 크기가 신기의 체구보다 더 컸다.
"멈춰."
몸집이 다시 커지던 전투 기계가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정지했다. 다시 움직임을 회복한 전투기계가 황급히 회피하려 했지만, 포탄의 방해로 생각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신기가 던진 기력공이 전투기계를 정통으로 맞혔다.
전투기계는 움직임을 멈췄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최영웅이 신기를 둘러업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전투기계와 100미터 이상 떨어진 건물에 몸을 숨겼기에 바로 달리지 않고 여유를 조금 부렸다.
"죽었어요."
다행히 운 좋게도 첫 시도에 끝냈다. 신기와 박철은 기력을 다 써서 무척 피로한 상태다. 이번 시도가 실패했다면 도망 다니면서 기력을 회복하고 정신력도 회복해야 했다. 박영광이 무전으로 전투가 끝났음을 알렸고 미군이 곧 포격을 멈췄다. 포격이 멈추고 2분 정도 지난 후 최영웅이 가서 구슬을 회수했다.
"무기 강화. 영광 형이 더 상성이 좋아."
소환체의 무기가 강화되어 더 강한 공격을 할 수 있다. 최영웅은 구슬이 무척 탐났지만, 기력의 양을 생각할 때 공격과 수비 둘 다 욕심내는 건 잘못된 일이다. 넷은 미군이 준비한 차를 타고 휴식하러 이동했다. 휴식처에 도착한 후에야 박영광은 구슬을 삼켰다.
### DUAL SYSTEM ###
후지산.
타이탄은 손쉽게 처리했다. 또 도망갈까 봐 화산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유인한 다음, 장군님과 최영웅이 주의를 잡아두고 신기가 수박 정도 크기로 압축한 기력공 세 개를 던졌다. 두 눈과 심장을 동시에 가격당한 타이탄은 바로 쓰러졌다.
전투기계와 달리 타이탄은 지휘형 초월자다. 원래는 전투기계가 영역을 만든 후 타이탄이 부하를 만들어내 지휘해야 했다. 타이탄은 전투능력이 전투기계보다 훨씬 약하다. 엘프 여왕은 방어력이라도 강하지만, 타이탄은 그것도 아니어서 고립된 상황에 손쉽게 처리했다.
타이탄이 남긴 구슬은 박철의 몫이 되었다. 미끼 스킬이 원래부터 독보적으로 강했는데, 구슬을 먹고 훨씬 더 강해졌다. 그래서 지금 후지산에서 박철이 초월자를 끌어낼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중이다.
제이크가 전화를 받고 16번 소각장에 동그라미를 쳤다. 모든 소각장이 정해진 임무를 완수한 후에야 박철이 미끼 스킬을 사용할 예정이다.
"아우, 그런데 이곳 초월자는 건너오면 죽는다는 게 진실일까? D라는 놈은 거짓말이 일수라며?"
"그 말은 진실이었어. 진실인 게 느껴지는 말이 있고 거짓인 게 느껴지는 말도 있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이 안 가는 말이 대부분이야."
D는 이미 신기에게 신용불량으로 등록되었다. 시간을 돌리기 전에 D는 확실한 거짓말을 했고, 제주도에서 봉인 당했을 때 했던 말도 예전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문제는 신기도 정확히 어느 것이 거짓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판단할 지혜와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왜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급하게 끄집어내려고 해?"
"격이 같으면 초월자 둘이 함께 등장해. 가능하다면 둘 중의 하나를 먼저 끌어내고 싶어. 초월자의 이름은 엘프 여왕이 제공할 거야."
"엘프 여왕 믿을 수 있어?"
"걱정하지마. 엘프 여왕은 방어 능력밖에 없고, 뱀파이어 드래곤의 요해는 이미 알고 있어."
"너는 계약에 대해 잘 모른다며? 뭔가 네가 모르는 수작을 부릴 수도 있어."
"그때 가서 봐야지. 당장은 계약의 이행부터 생각하자."
오후 4시 되어서야 소각장들이 모든 작업을 완성했다. 각 소각장을 운영하는 시간과 기간 그리고 순서가 엄격히 규정되었고,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그에 따른 대응을 보여야 하기에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박철, 해골용을 불러내."
박철은 고급에 이른 미끼 스킬과 식별 스킬을 이용해 해골용을 불렀다. 신기는 그제야 스킬을 결합하는 시도를 가장 먼저 한 게 박철임을 깨달았다. 가가와가 마법을 합치는 시도를 하기 전에, 사실 박철이 이미 미끼와 식별 스킬을 결합했다. 그러나 그때는 정보 단말이 알려준 정보여서 이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고 지나쳤었다.
"어때?"
"느낌이 없어요. 기력 회복하고 유혹으로 바꿔서 해볼게요."
"너 바보야? 명령으로 해골용을 불러오려 했어?"
신기의 핀잔에 박철이 머리를 긁적였다. 타이탄의 구슬을 먹은 후 자신감이 팽창했는데, 신기가 바늘로 푹 찔러 거품을 단번에 터뜨렸다.
십여 분을 기다린 후 박철이 다시 미끼 스킬을 사용했다. 연속 두 번 전력으로 미끼 스킬을 사용한 박철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제야 신기도 박철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후지산이 흔들리자 신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멀리 물러서라고 말했다. 혹시라도 D의 말이 거짓이라면 전투해야 한다. 쉽게 해치웠지만, 남미보다 북미에서 나온 초월자가 더 강했다. 초월자들이 이 세상으로 넘어오며 마나가 대량 건너왔고, 늦게 나오는 초월자일수록 더 강한 실력을 보인다. 예전에도 심장 조각을 삼킨 효천 덕분에 처리할 수 있었다. 이번에 나타난 해골용은 지난번보다 훨씬 강할 것이니 악전고투를 각오해야 한다.
신기가 기억하는 해골용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한 해골용이 후지산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나 화산을 기어 나온 해골용의 몸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내 운명의 매듭이 여기였구나."
신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해골용의 뼈는 녹아내린 후 증기로 변했다. 그리고 그 중기는 다시 가루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흘 후에 내 동반자가 나타날 것이다. 나와 달리 격이 높아 오래 버틸 수 있다. 그와 대화하고 훌륭한 선택을 해주기 바란다."
녹아내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얼마 안 지나 해골용의 모습은 사라지고 흰 가루만 수북이 쌓였다.
그리고 사흘 후, 좀비 드래곤이 커다란 몸집을 드러냈다. 좀비 드래곤 역시 줄줄 녹아내렸지만, 덩치가 커서인지 아니면 격이 높아서인지 오래 버텼다.
"내가 한 말은 모두 진실이다. 네가 D의 잘못을 바로잡고 두 세상을 정상으로 돌리기 바란다. 그리고 그거야말로 진정한 세상을 구하는 길이다. 이중 계약에 관한 정보는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고민해 보지. 궁금한 거 하나 질문해도 되나?"
"내가 아는 거라면 대답해주지."
"내가 너희 세상으로 건너가서 히드라를 죽일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지?"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그러나 넌 대단한 힘을 얻지 않았느냐?"
"진화 스킬? 그거 쓸모없던데."
"그건 예전의 너고, 지금의 너는 다르다. 그래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은 걸 추천한다."
"왜?"
"두 세상의 연결이 너무 많아 저쪽 세상에서 이쪽 일을 알아낼 수 있다. 다른 초월자들을 다 처리하고 연결을 최대한 끊은 다음 진화 스킬을 사용하도록 해라. 우리는 자신의 종족을 전부 희생하여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다. 전투기계가 바로 자신의 종족을 희생하여 힘을 얻고 격이 떨어진 놈이다. 그리고 이곳의 D도 자기 종족을 희생해서 힘을 얻은 덜떨어진 놈 같구나."
지금 바로 힘을 키우면 히드라가 자신의 종족을 전부 희생하여 힘을 더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남은 초월자들을 불러 모조리 처리한 다음, 엘프 여왕을 통해 좀비 드래곤이 한 말이 진실인지 확인해야 한다.
"우리 대화도 알려지는 건 아니겠지?"
"너도 비록 겨우 S급이지만, 초월자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초월자와 초월자의 대화이기에 누구도 알아낼 수 없다."
'초월자라는 자들은 거짓말하는 게 습관인가?'
좀비 드래곤의 말에서 모순을 알아냈지만, 신기는 굳이 까밝히지 않았다. 대화가 끝나고도 5분 정도 지나서 좀비 드래곤이 죽어버렸다. 북미와 마찬가지로 두 초월자가 다 죽자 연결이 자동으로 끊어졌다. 남미와 북미에 이어 동북아시아도 인류의 영지가 되었다.
- 작가의말
음모가 빠지면 섭섭하죠. 그러나 질질 끌지는 않겠습니다.
서유기, 수호지를 10대 초반에 봤습니다. 최근 서유기를 다시 봤는데, 제 글이 서유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물의 섬세한 감정이나 장면의 연출, 그리고 많은 세밀한 부분이 부족합니다. 서유기는 쉽게 접하기 힘든 화려한 단어들과 잘 다듬어진 간결한 문장으로 그 부분을 커버했지만, 저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이 부분을 언젠가 개선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개선이 안 되면 스토리와 설정 위주로 글을 이끌어나가는 것도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객관적인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물론, 다음 글 컨셉에 대한 고민입니다. 이 글은 지금 스타일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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