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로 복귀하다
거제도 슈퍼 1층 격전지.
소방 호스로 묶어둔 두 진열장이 오래지 않은 부대낌을 끝으로 이별을 선언했다. 사 주의 유예기간도 없이 섣부른 이별을 택한 둘이 무척 원망스러울 법도 하지만, 신기는 한가하게 잡생각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다. 효주와의 대화도 멈춘 지 오래다.
쾅 소리와 함께 좀비가 호쾌하게 엎어지며 자기 목덜미를 들이댔다. 냉장고에 음료수를 가득 채워 넣은 건 참 잘한 결정이다. 묵직한 냉장고는 좀비의 돌진에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잘 버텨주고 있다. 신기는 좀비의 푸른색 뒷덜미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왼손의 도끼를 휘둘러 일어서려는 좀비의 뒤통수를 깠다. 물론 도끼 등으로 내리쳤다. 검도장에서 고무공을 때리던 경험을 살려 힘 조절을 완벽에 가깝게 했다. 몸을 일으키던 좀비는 머리에 타격을 받자 잠깐 버벅거렸다.
'저급한 괴물.'
좀비와 해골을 상대하며 신기가 내린 결론이다. 수준 낮은 로봇처럼 의외의 상황을 만났을 때 반응하는 속도가 무척 느리다.
몸을 일으키는 좀비의 목을 도끼날로 정확히 내려치는 건 꽤 힘든 일이다. 그러나 도끼 등으로 머리를 한 번 치면 좀비는 움직임을 멈추고 잠깐 다음 동작을 고민한다. 이때 오른손의 도끼로 탐스러운 좀비의 목덜미를 덥석 물어버린다. 묵직한 벌목용 도끼라 여기까지 하면 좀비는 보통 관짝행이다.
그러나 신기는 좀비에게 방심하다 데인 적이 있다. 그래서 오른손의 도끼를 놓은 후 두 손으로 왼손 도끼를 잡고 도끼 등으로 목에 박힌 도끼를 내리쳤다. 도끼 등과 도끼 등이 강렬한 입맞춤으로 좀비에게 확실한 앤딩을 선사했다.
신기에게 무척 다행스럽게 성휘의 범위 안에서 죽은 좀비와 해골의 시체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다. 화장실 쪽처럼 시체가 쌓이면서 장애물 효과가 사라지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성휘의 능력인가?'
- 정확합니다.
'느려지는 것도?'
- 정확합니다.
"효주 잘 있어요?"
"삼촌, 효주 졸려요."
성휘는 괴물을 느리게 하고 죽은 괴물의 시체가 사라지게 한다. 치유는 몸을 치료해주고 보호는 정신을 보호 및 치료한다. 물론 외부의 자극으로 생긴 문제점만 치료한다. 정화는 괴물을 공격하고 처단한다.
숨겨진 능력이 더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확실하게 알아낸 능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정화로 괴물을 상대하며 침착하고 현명해질 필요를 느꼈다면, 진열장이 무력화되고 냉장고에 의지해서 괴물을 맞상대하면서 투지와 과감함 그리고 자신감의 필요를 느꼈다.
'두 마리.'
신기는 성휘만 펼치고 아무 특성도 사용하지 않았다. 신기의 회복력이 대단한 편인지 성휘만 펼쳤을 때는 신성력의 회복이 소모를 능가했다. 좀비의 움직임이 느려졌기에 해골과 섞여 있는 와중에도 팔을 뒤로 향하는 좀비가 둘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움직임이 느려지는 거지 돌진하는 속도까지 느리진 않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좀비 두 마리가 빨리 감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러다 냉장고에 다리가 걸려 동시에 엎어졌다.
진작 왼손 도끼를 고쳐잡은 신기는 오른손 도끼로 왼쪽 좀비의 목덜미를 내려친 후 곧바로 왼손 도끼로 오른쪽 좀비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오른손의 벌목용 도끼는 자기 역할을 정확히 해냈다. 좀비의 목을 비스듬히 잘라버려서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왼손의 장작용 도끼는 깊숙이 박히지 못했다. 좀비는 목에 도끼를 매단 채 버둥거리며 일어섰다. 성휘 덕분에 움직임이 느려져서 신기는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벌목용 도끼를 뽑았다. 그리고 벌목용 도끼를 휘둘러 일어서는 좀비의 목에 상처를 하나 더 만들었다.
움직이는 좀비의 목을 정확히 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고도의 집중력 덕분인지 운이 좋았는지 신기는 실수하지 않았다. 몸을 채 일으키지 못한 좀비는 냉장고 위로 몸을 눕혔다.
이미 냉장고 위에 올라온 좀비가 다시 일어서면 크게 위험해진다. 신기를 목표로 하면 괜찮다. 가까운 거리라도 준비 동작을 보고 미리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좀비가 효주에게 돌진한다면 큰일이다. 저 연약한 아이는 40킬로나 되는 좀비의 단단한 몸뚱이를 버텨내지 못한다.
- 새로운 정보입니다. 각성자는 신체 능력이 각성 전보다 월등히 나아집니다.
정보 단말이 뜬금없이 알려왔다. 각성하면 힘이 세진다든가 체력이 강해진다든가 눈이나 귀가 밝아진다든가 등 신체 능력이 향상된다. 하다못해 소화 능력이라도 상승한다. 상승 폭은 등급과 레벨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신기는 자신의 정보를 확인했다. 자신의 각성 정보가 궁금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떠올리자 눈앞에 텍스트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텍스트는 시야를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31레벨이라. 내가 많이도 잡아 죽였구나.'
경험치가 두 배라지만 그래도 레벨업 속도가 놀랍다. 거기에 검술 스킬이 초급 0레벨이 되었다. 도끼만 사용했는데도 경험치가 쌓였다. 역시 수련보다 실전이 경험치를 많이 주는가보다라고 신기는 생각했다.
'성휘, 정화.'
정화를 사용하면 좀비의 돌진하는 빈도가 줄어든다. 괴물들이 괴로워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신기는 괴물의 고통을 무척 기꺼워하는 자신이 변태가 아닌가 잠깐 의심했다. 그러나 평소 자신의 행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가학적인 성격이 전혀 없었다고 자신했다.
진열장이 막아줄 때보다 더 위험한 상황인데 신기는 오히려 더 여유로워졌다. 진열장이 막아줄 때는 진열장이 사라졌을 때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진열장이 사라진 지금 그 미지에 대한 공포가 걷히면서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고 더 여유로워졌다.
이번이 세 번째 무리다. 첫 무리를 다 처리하고 효주를 재웠다. 두 번째 무리가 왔을 때도 성휘 스킬로 안전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깜빡 잠들었다. 이번에 세 번째 무리인데 진열장이 무력화되며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밤새 총 세 무리가 왔다. 신기는 이번 무리를 처리한 후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밖은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다. 몰려온 괴물을 처리한 후가 가장 안전한 시각이라고 신기는 판단했다.
드디어 좀비를 다 처리했고 해골 몇 마리만 남았다. 신기는 밖으로 나가 도끼로 해골의 머리를 빠르게 부숴버렸다. 그리고 그새 잠든 효주를 깨웠다.
"효주 이제 집에 갈 거예요."
효주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면티를 찢어 자신의 몸에 꽁꽁 동여맸다. 고심한 끝에 이 방법이 가장 괜찮다는 판단을 했다. 품에 안긴 효주의 몸은 난로처럼 뜨거웠다. 신기는 편의점 해열제를 입속으로 되뇌었다.
조심스럽게 슈퍼를 나가는 길에 바닥에서 손도끼 하나 발견해 허리춤에 찼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급해서 도끼를 투척한 모양이다. 슈퍼를 벗어나기까지 몇 마리 해골을 처단했다.
새벽의 공기가 유난히 싸늘하다. 신기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빨리 달리자니 중요한 시각에 체력이 부족할 것 같고 조심스럽게 천천히 걷자니 마음이 다급했다. 다행히도 해골만 만나고 좀비는 없었다.
별장 구역에 가까이 가자 유일한 편의점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신기는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감각에 집중했다. 지름 15미터 안에는 괴물이 없음을 확인하고 편의점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괴물이 없지만 사람이 숨어있다가 덮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기는 굳이 기척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사람입니다. 사람이니까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혹시라도 누가 숨어있다가 기습할까 봐 신기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으로 신기는 단번에 의약품들이 놓여있는 곳을 찾아냈다. 어린이 해열제와 감기약을 챙긴 신기는 천천히 슈퍼를 벗어났다.
별장 구역의 길에 들어선 신기는 걷는 속도를 늦췄다. 길옆에 숨을 수 있는 공간이 너무 많아서 걱정되었다. 좀비나 해골이 매복해서 기습할 지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배짱이 없다.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으로 가면 신기와 효주네 별장이 나타난다. 오른쪽은 더 많은 별장이 있다. 그때 살려줘요를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신기가 선 자리에서 뜀박질해서 확인해보니 붉은 담장을 한 집에 수십 마리의 좀비와 해골이 몰려있었다.
'고마워요. 여력이 되면 꼭 구하러 갈게요.'
아무래도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근처의 괴물을 다 끌어간 모양이다. 그래도 신기는 방심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효주의 집을 지나갈 때는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사람이 없는지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숨겨둔 열쇠를 꺼내서 대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서 다시 대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그자 긴장이 탁 풀렸다. 마당에 숨겨둔 집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꽁꽁 잠근 후 효주를 내려놓으니 샤워 생각이 간절했다.
"효주, 일어나서 약 먹고 자요."
효주에게 해열제와 감기약을 먹이고 다시 재웠다. 간단히 샤워하고 신기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달콤한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부모님과 동생이 웃는 얼굴로 신기와 대화를 나눴다.
### DUAL SYSTEM ###
거제도 별장 구역.
박철은 살려달라고 목청껏 외쳤지만 상대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자 맥이 탁 풀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다리 사이에 박고 눈물을 흘렸다. 왜 자신에게만 이런 불행이 계속되는지 궁금했다.
어린 시절 박철의 아버지는 감옥에 갇혔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삼십 년이 넘는 형량을 받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간 후 얼마 안 되어 박철을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도망갔다.
박철은 할아버지와 함께 어렵게 살았다. 별장 구역을 뒤지면 가끔 입을만한 옷이나 신발이 나오기 때문에 박철은 하교한 후 늘 이곳을 먼저 찾았다. 며칠 전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암 진단을 받고 진통제로 버티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너무 울어서 눈이 엄청 부었다. 나무 갑갑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저도 모르게 이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경보가 울리고 하얀 해골이 바닷속에서 떼를 지어 올라왔다. 박철은 그나마 낮은 담장을 찾아 넘은 후 2층 유리창을 깨고 집안에 숨어들었다.
오래 비워둔 별장이라 먹을 것도 없었고 수도도 끊겨 있었다. 밤새도록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자다 깨고 깨다 자면서 보냈다. 괜찮은 시력으로 사람을 발견하고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역시 무시당했다.
꾸벅꾸벅 졸던 박철은 쿵 소리에 잠에서 깼다. 좀비가 또 담에 부딪혀온 것으로 생각하며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의외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키 크고 건장해 보이는 남자가 손에 커다란 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등에 검 하나 더 메고 있다. 두 손으로 검을 잡은 남자는 옆 별장 담벼락에 찰싹 달라붙은 좀비의 목덜미를 검으로 베었다. 좀비의 목은 베이지 않고 뭉개졌다.
남자는 검을 오른손으로만 잡고 왼손으로 등에 멘 검을 뽑았다. 양손 검으로 보이는 커다란 검과 달리 새로 뽑은 검은 가벼워 보였다. 물론 저 가벼워 보이는 검도 무게가 3킬로에 육박함을 박철은 알지 못했다.
왼손의 검으로 가슴을 찌르자 해골이 손을 가슴으로 움직였다. 남자는 오른손의 커다란 검으로 해골의 머리를 내려쳤다. 박 깨지듯 두개골이 풀썩 부서지자 해골은 그대로 쓰러졌다.
남자는 왼손의 검을 다시 등에 메고 무거운 검만으로 해골의 머리를 부쉈다. 남자의 내려치기가 빠른 건지 해골의 움직임이 느린 건지 해골들은 검을 막지 못하고 내려치는 족족 머리가 부서졌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박철은 엉겁결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창문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남자는 다른 해골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때 좀비가 느릿느릿 걸어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좀비가 빠른 속도로 남자에게 쏘아지자 박철은 숨을 멈췄다. 그러나 남자는 예상했다는 듯이 미리 몸을 움직여 좀비를 피했다. 그뿐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좀비의 목을 검으로 베었다.
좀비의 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버둥거렸다. 남자는 큰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왼손으로 등의 검을 뽑은 후 도끼로 장작 패듯 좀비의 목을 연속 내려쳤다. 좀비가 쓰러지자 남자는 선 자리에서 차가운 눈초리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괴물들을 쏘아보았다.
'너무 멋있다. 날 구하러 와주신 건가?'
- 작가의말
박철의 눈으로 본 누군가의 모습입니다. 다음 편에서 진실을 밝힙니다. 대충 짐작하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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