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자가 아니라고?
서울 도봉구 헌터 협회 건물.
신기는 지하철에서 내린 후 십 분 정도 걸어서 헌터 협회에 도착했다. 등급이 높거나 특별한 스킬을 갖추면 협회에 채용된다. 그러면 국가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김태풍이라는 B급 각성자가 7급 공무원이 된 게 크게 기사가 났다.
그래서 신기는 번호표를 뽑고 꽤 기다려야 했다. 신기는 차례가 되자 바로 검증실로 안내받았다. 주민등록증을 제시한 후 이것저것 체크했다. 일 분 정도 기다리고 검증기에 손을 가져다 댈 수 있었다. 화면을 지켜보던 남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성자가 아닙니다. 저기로 가서 안내 말씀 읽으세요."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니 협회 도장이 찍힌 안내 말씀이 있었다.
최근 각성자 검증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늘어 한 번 각성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 난 사람은 석 달 안에 검증을 받을 수 없다는 공문이다. 검사하러 온 사람 대부분이 각성자라는 확신이 있는 게 아니라 혹시나 해서 공짜 검증을 받으려는 심보라 새로 나온 규정이다.
밖으로 나간 신기는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 공원을 찾아 의자에 앉았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스케일이 크다. 아침에 헌터 협회로 향하면서 한국은행에서 또 한 번 확인했다. 30억이 입금된 것을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헌터 협회로 들렀다.
'스킬이 가끔 깨져서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각성자 판별은 100%라고 들었는데.'
- 잠재의식의 표층을 읽는 기계입니다. 아주 원시적인 검증 방법으로 본 정보 단말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일부러 건물이 아닌 공원을 찾았다. 지금까지 신기는 아파트에서만 이 소리를 들었다. 누가 장난을 치더라도 탁 트인 공원에서는 수작을 부리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럼 난 다른 각성자들과 다른 거야?'
- 당신은 특별합니다.
'내가 미친 건 아니겠지? 나를 확신할 수 있게 설득해줘.'
대답이 없다. 신기는 공원에 좀 더 앉아있다가 어지러움이 가라앉자 지하철로 향했다. 지하철 계단을 걷던 신기의 눈앞에 갑자기 글자가 나타났다. 투명하지 않은 글자가 눈앞에 떠 있는데 시야를 방해받지 않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이름 : 신기
등급 : 기급
개인 등급 : 1
재주 : 검술 입문 3
신기는 지하철에 바로 타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감쌌다. 글자는 아주 빠르게 사라졌지만, 본인이 각성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계속 누군가 귓가에서 네가 각성했다고 속삭여주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겨우 F급이라니.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기면 F급이 확실하다.
- 원시 정보 단말과의 소통이 어렵습니다. 정보 저장 방식이 상이하여 정보의 교류에 지장을 받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얻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시 헌터 협회에 가서 확인하려다가 공문이 생각나서 그만뒀다. 거기에 머리가 무척 어지럽다. 아침에 출발할 때 멀쩡했는데 이틀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갑자기 힘들다. 신기는 우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운 좋게 자리가 있었다.
"너 송철이 형 잡혀간 거 알아?"
곁에 두 남자가 속삭인다. 신기는 엿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둘의 대화가 똑똑히 들렸다.
"인터넷에 세상이 멸망하고 뭐고 글을 올렸대. 그런데 이상하게 경찰 말고 군대가 와서 잡아갔지 뭐야."
"혹시 사법고시 준비한다는 302호 형?"
"302호 맞는데, 그 형 사법고시 준비한다고? 피시방 갈 때마다 늘 거기 있던데."
"근데 각성자 나타나는 거 보면 진짜 외계인이나 괴수가 침공하는 거 아냐?"
"너 영화나 소설 작작 보고 공부나 열심히 해. 공무원 되려면 노오오오력 해야지."
"차라리 각성해서 공무원 되는 게 더 빠르겠다. 그냥 집에 가서 농사나 지을까 생각 중이야."
공교롭게 둘 역시 각성자 검증을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석 달만 더 기다려서 각성자가 안 되면 공무원 포기하고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짓겠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근데 진짜 외계인이나 괴수가 침입하면 서울이 나을까 시골이 나을까?"
"몰라. 소설이나 영화는 항상 도시에서 벌어지던데."
"요즘 라면 사재기 장난 아니라더라. 정부에서는 통제할 생각이 없는가?"
"물이 없으면 라면 쌩으로 먹어야 하잖아. 차라리 시골에 든든한 지하실 지어놓고 사는 게 낫겠다. 시골에는 먹을 게 도처에 널렸거든."
신기는 몰려오는 졸음을 버티면서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열은 심하지 않지만 짧은 외출로 기진맥진했다. 침대에 누운 신기는 깊은 잠에 빠졌다.
### DUAL SYSTEM ###
"최송철, 이름."
영문도 모르고 군인들에게 잡혀 온 최송철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름을 묻는 이름 모를 남자를 병신 쳐다보는 눈빛으로 보았다.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일이 대낮에 발생할 줄은 몰랐다.
'이건 무슨 법 위반이더라?'
처음에는 꽤 열심히 했지만 책을 놓은 지 한참 된다. 이거 같기도 하고 저거 같기도 해서 헷갈렸다. 너무 힘들어 잠시만 쉬자고 시작한 휴식이 반년 이상으로 길어질 줄은 몰랐다.
"대답 안 해?"
"알면서 뭘 물어요?"
남자의 눈빛이 위험하게 변했다. 남자는 살기 넘치는 얼굴로 날카로운 비수 하나 꺼냈다. 최송철은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남자는 비수를 돌려서 손잡이가 최송철에게 향하게 했다. 그리고 쓱 밀었다. 비수는 최송철과 더 가깝다. 사이에 둔 책상이 넓은 게 아니라서 얼마든지 비수를 잡아 남자를 찌를 수 있다. 남자는 눈을 감고 질문을 다시 했다.
"최송철, 이름."
"최송철입니다."
"나이."
"스물일곱입니다."
"성별."
"남자요."
"군대는 다녀왔겠지?"
"면제입니다. 교통사고로 왼쪽 무릎이 인공 관절입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무척 약해졌다. 그래서 공부도 오래 하지 못한다. 사법고시를 보려 했지만, 사고 때문에 체력이 약해져서 남들처럼 열심히 하기 힘들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
"게임 게시판에 괴수가 침입해서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글을 올린 적 있지?"
"없습니다."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이 삭제되어서 우리가 모르리라 생각했나? 비록 글은 보이지 않게 처리되었지만, 서버에는 그대로 남아있다는 걸 몰랐나 보네?"
"죄송합니다. 올린 적 있습니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거짓말한 것에 벌줄까 고민했어. 만약 거짓말을 한 번 더 할 경우, 이번 거짓말까지 합쳐서 배로 줄 거야."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왜 그런 글을 올리게 됐는지 내가 납득하게 설명해 봐."
최송철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깐 머뭇거렸다. 의외로 남자는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날 게임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재주로 '예측'이라고 생겼더군요. 그때는 게임에 집중하느라 일단 무시했습니다. 게임을 마치고 나니 예측이라는 재주가 뭔지 저절로 알겠더군요. 그래서 한 번 예측을 사용했습니다."
최송철은 몸서리쳤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리는 것만으로 끔찍했다.
"컴컴한 곳에 엄청 많은 해골이 몰려있었어요. 진짜 고개 돌리기도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빽빽했어요. 그리고 언젠가 저 해골들이 땅 위로 기어 올라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더 먼 곳에 푸른색 괴물들이 있었어요. 자세히 보려고 했는데 그만 기력이 소진되어 끝나버렸어요."
같이 게임을 하는 동료들의 재촉으로 최송철은 우선 게임에 집중했다. 게임을 다 하고 고시원에 돌아가니 다시 그 으스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직접 가까이에서 본 것처럼 실감 나서 소름이 가시지 않았다.
"그냥 생각만 했는데 기력이 꽉 찼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내가 각성했다는 확신도 들었고요. 그래서 예측을 한 번 더 해봤어요."
최송철은 혹시 로또 번호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력이 차는 대로 예측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나 언제나 끝없는 해골과 좀비로 생각되는 푸른 괴물의 모습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끝내 사흘 만에 괴물들이 땅 위로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게임 게시판에 글을 올렸어요. 아무한테나 말하면 정신병으로 몰릴까 봐 겁이 났고 혼자 알고 있자니 속이 답답했어요. 그런데 글을 올리고 화장실 다녀온 뒤 반응 보려고 새로고침 했더니 어느새 삭제되었더군요."
"그 후에 다른 게시판에도 글을 몇 번 올린 적 있지?"
"네, 아이디 새로 만들거나 다른 사람 아이디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역시 올리면 몇 분 안에 글이 삭제되더라고요. 그다음부터 겁이 나서 올리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이상한 기계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렸다. 손을 위에 올리라는 말에 최송철은 주저주저했다. 저기에 손을 놓으면 갑자기 커다란 해머로 자기 손을 내리칠 것 같다. 그러나 남자의 세모 눈에 어린 독기가 더 무서워서 결국 손을 올려놓았다.
이름 : 최송철
등급 : 병급
개인 등급 : 17
재주 : 예측 초급 7
C급 각성자에 예측은 입문이 아닌 초급, 그것도 7레벨이나 된다. 최송철의 정보를 확인한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최송철의 눈에는 야비한 미소로 보였지만 말이다. 바로 정색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최송철을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너 사법고시 자신 있어?"
"길고 짧은 건 대보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자신 없습니다."
자신 있다고 항변하려던 최송철은 바로 꼬리를 말았다. 남자는 최송철이 의외로 쉽게 길들여지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뭐 하는 사람 같아?"
"국정원 혹은 비밀경찰?"
"나 군인이야, 직업군인. 내 명령에 토 하나 달지 않고 움직이는 부하가 천오백 명 있어. 대부분은 내 명령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충실하게 이행하지. 내가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려. 단 한 번도 왜라고 되묻지 않고 명령대로 실행한다."
최송철은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믿는 척 연기했다. 자신의 현재 처지를 실감하고 적절한 포지션을 잡은 것이다.
"너를 조사해봤다. 집안에 기댈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더구나. 사법고시 붙어봤자 판사는 꿈도 못 꾸고 검사도 가망 없어. 집안에 돈도 없어서 개인 변호사 개업도 못 하고 국선으로 평생 박봉에 시달려야 하겠더라고. 혹시 돈 많은 여자랑 결혼해서 처가 빽으로 검사 될 생각이면 지금 접어. 넌 그럴만한 깜냥도 없는 놈이야."
최송철은 남자의 말에 전부 공감했다. 처음에야 철없이 겁 모르고 덤볐지만 시간이 흐르며 세상을 알아갈수록 희망은 옅어지고 절망만 짙어갔다. 자신은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눈치가 빠른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탐낼 만큼 재능이 넘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진로를 생각하려 했지만 어떤 진로도 장래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직업군인 다들 싫어하지. 그냥 군대 가는 것도 싫어죽겠는데 군인을 직업으로 하라니. 상상하기도 싫은 사람이 대부분일 거야. 하지만 잘 생각해봐. 직업군인이 그렇게 나쁜 직종이라면 왜 직업군인을 자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최송철도 남자의 말에 의문을 가졌다. 남자라면 열에 아홉은 군대를 싫어한다. 물론 술만 마시면 군대 이야기를 안주 삼지만 말이다.
"너는 각성자야. 예측 스킬로 언제인지 모르는 미래를 예측했어.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을 공격하는 미래가 온다. 자, 그럼 문제. 그런 세상이 오면 어떤 직종이 가장 힘을 가질까? 검사? 판사? 변호사? 연예인? 스포츠 스타?"
남자는 최송철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최송철이 입을 열었다.
"군인이요."
사람은 자기 귀로 들어온 말보다 자기 입에서 나간 말을 더 신뢰한다. 남자는 최송철의 말에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길들이기 참 쉬운 타입이다.
"직업군인 중에도 귀족이 있다. 군 비리 뉴스 너도 많이 봤을 거 아냐? 성공한 군인은 힘도 있고 돈도 있어. 그리고 지금 네게 아주 좋은 기회 하나 생겼다.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르면 너는 이제부터 내 라인이다. 직업군인이 되고 고속승진할 거야. 돈은 많지 않아. 그러나 이후 힘이 전부인 세상이 오면 힘이 곧 돈이고 힘이 곧 명예고 힘이 곧 명분이야."
남자는 은근한 목소리로 최송철을 유혹했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내 말을 따를 거지?"
최송철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만족한 표정이 아니자 입을 열어 확실하게 대답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 작가의말
주인공의 분량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이런 진행이 맞는 것 같습니다. 회귀 혹은 환생이 아닌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하면 정보를 풀기 힘들더군요. 그래서 다들 회귀 혹은 환생 시키는구나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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