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희성이의 첫 해외여행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다.
아직 이륙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유럽에 도착한 것 같다.
공항의 풍경은 그렇게 아직 어색하다.
내 나이 이제 서른
해외여행은커녕 비행기도 처음 타본다.
이 거대한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르는 것 자체가 아직도 너무 신기하다.
// 용돈 좀 부쳤어, 조심해서 잘 다녀와
좀 전에 통화한 누나의 음성이 아직 귀에서 맴돌았다.
'올 때 성운이와 성희 선물은 꼭 사 와야지. 근데 대체 언제 이륙하려나'
한참을 그렇게 공항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던 비행기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엔진음이 커지며 기장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롤러코스터도 무서워서 타지 못하는 내가 이 거대한 구조물 덩어리 안에 갇혀 하늘을 날아간다니 신기함을 넘어 공포스럽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앞에 꽂혀있는 기내 잡지를 꺼내 읽는 척을 하려는데
'헛!'
갑자기 큰 소음과 함께 엄청난 속도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게 이륙인가'
그 속도감이 점점 절정에 달할 때 난 곁눈질로 다른 승객들을 둘러봤다. 다들 태연하다. 벌써 눈을 감고 자는 사람, 모니터에 이미 빠져든 사람, 책을 보는 사람, 수다를 떠는 사람
모두 그냥 편안한 일상인 듯 보였다. 나만 빼고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진동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을 보니 이미 지면은 기울어진 채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휴'
하늘로 계속 올라가는 느낌이 들고나니 이제서야 안도감이 밀려왔다.
'별거 아니네!'
두려움에 떨던 촌스러운 나의 모습이 부끄러워 주변을 둘러봤지만, 당연히 아무도 나에게 관심 따위는 없어 보였다.
난 누구도 알 수 없는 나만의 쑥스러움을 애써 지우며 앞의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영화가 많았지만 볼만한 건 없었다.
잠시 후 안전띠 사인이 꺼졌다.
'밥은 언제 주려나'
기내식에 대한 한국인의 열정은 우스개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우리만 그런가?
생각보다 한참을 기다리니 앞뒤로 승무원들이 바빠지는 게 보였다. 이제 대화를 할 시간이다. 한국인 승무원이면 좋겠다. 내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내 차례가 오고 질문은 단순했다. 치킨이냐 비프냐, 어려운 문제였지만 그냥 치킨으로 골랐다. 그리고 용기 내어 한마디 더 했다.
"비···. 비어 플리즈"
그렇게 공중에서의 나의 첫 식사는 치맥이 되었다.
치킨은 물론 후라이드 치킨은 아니었다. 그냥 닭볶음, 그리고 기타 잡다하고 먹기 귀찮은 것들도 같이 나왔다. 그냥 나에겐 안주다.
틈틈이 맥주도 더 시켜 먹었더니 슬슬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쟁반을 안 가져간다. 그리고 내 자리는 가운데 낀 좌석이다. 창가도 아니고 통로도 아닌, 지인이 옆에 없다면 정말 불편한 그런 자리
신호는 점점 심해지는데 아직 쟁반 수거가 안된다. 통로 쪽에 앉은 덩치 큰 외국인은 아직도 음식을 먹고 있다. 다 먹기라도 했으면 부탁이라도 해볼 텐데
그렇게 한참이나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쟁반을 거둬 갔다. 옆의 외국인도 마침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회다!'
나도 같이 일어나 복도 앞뒤를 두리번거리다 뒤쪽의 화장실이 조금 가까워 그쪽으로 향했다.
화장실 앞으로 가니 이미 줄이 길다.
세 칸이 있었는데 모두 두세 명씩 기다리고 있었다.
'맥주를 너무 마셨어···.'
한참을 부들부들 떨며 줄을 서 있는데 하필 내가 있는 줄만 너무 느리다. 다른 칸의 줄은 이미 한 바퀴 돌아 새로운 사람들이 서 있다. 줄을 잘 서야 하는데 젠장
그때 비행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바로 안전띠 사인이 들어오며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난기류 어쩌고 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방광이 터질 것 같아 방송 내용 따위는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외국인 승무원이 화장실 문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한다.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는 것 같다.
'아···. 안 되는데···.'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로 돌아가고 그 승무원은 나에게도 자리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말한다.
"쏘리..아임 베리..."
안되는 영어로 부들부들하며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앞의 화장실 문이 열렸다.
방송 덕분에 오히려 줄이 사라지고 나에게 기회가 온 거다.
뒤의 승무원이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난 그런 거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열린 문으로 바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비행기의 흔들림이 너무 심해 자세를 잡기가 힘들었다. 서서 보기는 힘들 거 같아서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더니 머릿속에서 번개가···.
* * * * *
눈을 떴다. 이 좁은 공간은 어디인가?
아 비행기 화장실 바닥이구나
왜 여기 누워있지?
축축한 바닥의 끈적함이 얼굴에 느껴졌다.
이게 뭐지? 이 익숙한 냄새는···.
'끄억!!'
심한 흔들림에 서서 쏴가 힘들어 앉아 쏴를 시도하려고 바지를 내리고 앉다가 공중 부양을 한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리고 뭔가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는데
그렇게 난 시원함을 느끼지 조차 못 한 채···.
비행기는 더 이상 흔들리는 것 같지 않다.
내가 머리를 부딪히는 소리를 밖에서 듣지 못한 건가? 내가 그렇게 오래 기절한 건 아니었나?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아니 차라리 밖에서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난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워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났다.
축축한 바지를 어렵게 입고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셔츠를 벗어 아래에 둘렀다. 티 하나만 입고 왔으면 아주 곤란할뻔했다.
물로 얼굴을 대충 닦고 머리도 정리하려는데
'윽'
아까 부딪혔던 부위가 너무 아프다. 약간 혹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대충 정리하고 문손잡이를 당기는데
'어라?'
안 열린다. 반쯤 접히면서 열리는 문인 건 알고 있었는데 내 방법이 틀린 걸까? 분명 PULL이라고 적힌 손잡이를 당기고 있는데?
하지만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봐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밖의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 몰골로 다른 승객들의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톡~톡~
혹시나 근처에 사람이 있나 싶어 가볍게 문을 두드려 봤다. 하지만 밖에서는 인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난 점점 더 강하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어요?"
하지만 묵묵부답
시간은 계속 흘렀고 어느새 난 내 몰골은 잊은 채 문을 계속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 사람 소리는커녕 비행기의 엔진 소음조차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벌써 도착했나? 내가 그렇게 오래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나?'
이상했다. 기내의 모든 사람이 날 잊은 걸까?
마치 자다 일어나니 종점 차고지에서 다들 퇴근한 깜깜한 버스에 갇혀있는 것 같다.
'모두 날 잊었나 여긴 그럼?'
급격한 공포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난 문을 두드리는 걸 넘어 발로 힘껏 차기 시작했다. 몇 번을 그렇게 발로 차니 문이 조금 부서져 밖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온몸으로 문을 부술 듯 강하게 밀었다. 그러자 밖으로 나갈 작은 공간이 생겼다.
'진작 이렇게 할걸···. 어?'
화장실에서 나오니 밖엔 아무도 없었다.
객실 좌석엔 승객이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고 갤리라고 하던가? 승무원들이 일하는 공간에도 아무도 없다.
그런데 비행기의 조명은 여전히 모두 켜져 있었다. 이건 막차에서 잠든 버스는 아니었다.
난 가까운 좌석으로 다가가 창밖을 살펴봤다. 하지만 안개 때문에 바깥의 풍경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순간 귀가 멍 한 느낌이 들었다.
난 복도를 따라 앞쪽으로 걸어갔다. 인기척은커녕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득한 적막 속에서 내 거친 숨소리만이 더욱 도드라지게 들려왔다.
각 좌석엔 승객들의 잡동사니 짐이 그대로 놓여있다. 태블릿 PC, 먹다 남은 간식이며 휴대폰과 옷가지까지
갤리를 하나 더 지나니 조금 더 넓은 좌석이 나왔다. 비즈니스석인가?
펼쳐진 테이블에는 술잔이나 땅콩 접시 등이 놓여있었다.
'다 어디로 간 거지?'
이 공간에서 사람만 전부 그대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비즈니스석 복도를 지나 출구 쪽을 바라보니 조금씩 안개가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문이 열려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뀌이이이이이
갑자기 소름 끼칠 듯한 소리가 출구 넘어 멀리에서 들려왔다. 난생처음 듣는 소리다. 그 순간 내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난 다시 뒤돌아 도망치려다 출구가 열려있다는 생각에 급하게 출구로 다가갔다.
출구 밖은 짙은 안개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았고 열린 문으로 조금씩 안개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저 문을 내가 닫을 수 있을까, 다가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떡하지?
쿵!
그때 아까와는 다른 묵직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쿵! 쿵!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리로 오는 거다.
더 이상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그 순간 내 몸이 알아서 움직인 듯 지난 몇 초간의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고 정신을 차리니 비행기 문은 닫혀있었다.
마음이 급하니 뇌와 근육이 본능적으로 알아서 움직인 것 같았다.
쿵! 쿵! 쿵!
그 소리는 비행기 바로 근처까지 와서 멈췄고 난 바로 앞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급하게 문에서 멀어졌다.
'아 진짜 저게 뭐야!'
난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고 내 심장박동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꿈인가? 비행기에서 잠든 건가? 악몽이라면 빨리 깨고 싶다.
그런데 너무 생생하다. 분명 꿈은 아니다.
하지만 전혀 이해하기 힘든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무감각해질 때쯤 난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난 조심스럽게 비즈니스석 창가 쪽으로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고 창밖을 숨죽이며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비즈니스석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여긴 어디인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밖의 저 소리는 뭐였을까?
한참을 생각해도 내 경험과 이성으로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테이블에 놓여있던 맥주를 들이켰다. 아직 시원했다.
앞의 접시에 비스킷이 보여 습관처럼 입에 넣었다.
바사삭
그 순간 비스킷 씹는 소리가 고요하던 기내에 크게 울려 퍼졌다.
퉁!
갑자기 창문에 시커먼 형체가 나타났다. 난 기겁하며 창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복도 바닥에 엎드렸다. 아직 다 씹지 못한 비스킷은 뱉어버리고 숨어서 창밖을 응시했다.
두 개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소름 끼칠 듯한 눈동자
마치 지옥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형상의 붉은 눈알 두 개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뭐···. 뭐야···. 저건'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심장은 다시 터질 듯 뛰고 있었고 그 박동은 고요한 기내에서 들려오는 유일한 소리였다.
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존재는 나에게 호의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놈은 아직 날 발견하진 못한 듯 창문을 이동하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뀌이이이이!
아까 들었던 그 소름끼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직후 갑자기 그 공포스러운 눈동자가 사라졌다. 하지만 난 근육이 모두 굳어버린 듯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디선가 그 눈동자가 날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공포감에 내 몸은 그렇게 복도 바닥에 엎드린 채로 얼어 붇고 말았다.
쨍그랑!
그때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작가의말
작년에 써놓은 거 외전으로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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