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J1. 검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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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많아"
나라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눈앞의 광경에 나는 넋을 놓고 있었다.
회색 연기 속에서 수많은 초록의 작은 구체가 영롱한 빛을 반짝거리며 버스로 날아왔다.
그리고 이내 액정의 코르카 숫자는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1015 ...1038...1061 ...1089 ...1143 ...1185 ...
"대체 몇 개나?"
[1291/3000]
코르카 표시 숫자가 드디어 멈췄다.
"997에서 시작했으니···. 몇 개인 거지?"
잠시 성희와 나는 말이 없었다. 산수는 어렵다.
"294개?"
그때 뒤에 서 있던 나라가 말했다. 이상하게 진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세상에 거의 300개 가까이나 된다고?"
수십 개 정도만 되어도 엄청날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얼추 삼백 개? 아무리 덩치가 크더라도 엄청난 숫자다.
일전에 황지 공원에서 도멜레온 혀가 버스에 닿았을 때는 혀 일부분만 터져나갔는데 이번에는 몸의 많은 부분이 버스에 닿아서 그런지 제대로 터졌다.
물론 다음 진화까지 가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란 숫자지만 그래도 너무 쉽게 많은 코르카를 벌었다.
난 탐지 숫자를 확인했다.
"어?"
[ 0 < 23 < 31 ]
성희도 내 시선을 따라 액정을 바라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뭐야?"
난 바로 창밖을 살폈으나 눈에 띄는 괴물은 없었다.
[ 1 < 34 < 47 ]
"근접에 한 마린데 어디지?"
그때 창밖을 유심히 살피던 나라가 입을 열었다.
"하천이야"
우리 네 명은 모두 나라가 손짓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천 상류 쪽에서 뭔가가 잔뜩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물속에서 뭔가가 튀어 올라오더니 버스 옆으로 떨어졌다.
"방금 그놈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좀 작네, 새끼인가?"
"그래도 사람보다 훨씬 커! 콜록"
놈은 육지에서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듯 생선처럼 펄떡이더니 조금씩 버스로 다가왔다.
퀴익!
놈의 붉은 눈이 버스 안의 우리를 발견한 듯 걸걸한 괴성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가시 같은 이빨이 햇빛에 비쳐 번뜩거렸다.
육지에 떨어진 뱀장어 같은 모습의 놈은 몸을 비틀며 버스로 다가왔다. 놈은 안간힘을 쓰며 점프해서 버스의 창문으로 뛰어오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놈의 몸이 버스에 닿았다.
파직!
바로 초록의 피떡이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리더니 이내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코르카 십여 개가 나타났다.
"헉!"
그리고 나는 천천히 이쪽으로 헤엄치듯 떠내려오는 다른 놈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족히 백 마리는 훨씬 넘어 보인다.
[ 1 < 56 < 63 ]
액정의 숫자도 내 추측을 현실로 보여주고 있었다. 난 문득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저놈들이 전부 버스로 튀어 오르기만 하면!'
하지만 내 장밋빛 상상을 비웃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
가까이 접근하던 다른 한 마리가 갑자기 다리 아래로 사라졌다. 아까 그놈만 우연히 다리로 튀어 올라온 건가?
계속 아래로 내려오는 또 다른 놈들도 방금 그놈처럼 다리 아래를 지나 하천 하류로 사라졌다.
"그냥 다 지나가겠는데?"
성희의 말에 난 액정을 살폈다. 중거리 원거리가 다가오는 놈들과 멀어지는 놈들이 같이 표시되는 바람에 제대로 놈들의 수를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14 < 76 < 33 ]
"지붕에서 유인하죠"
내가 검과 방패를 챙겨 일어나자 나라가 내 팔을 잡더니 말했다.
"안에 있어라."
그러고는 그녀는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콜록콜록"
할아버지도 그녀를 따라 지붕으로 올랐다. 이내 나라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 새x들아! 이리로 튀어오라고!"
그녀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나?
그때였다. 물 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던 괴물들이 다리 위의 우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물살을 따라 내려오던 놈들이 머리를 수면으로 내밀더니 내려오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다리 근처까지 도달한 놈들은 버스 쪽으로 강하게 튀어 올랐다. 하지만 버스 지붕까지 닿기도 전에 다리 위로 떨어져 뱀장어처럼 꿈틀거리다 그대로 버스 옆면에 닿았다.
파직!
"오!"
피떡과 연기를 거쳐 남은 건 또 코르카 십여 개, 아니 이번에는 스무 개는 되어 보였다.
나라가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아도 수십 마리의 크고 작은 수룡들은 이제 다리 위 우리의 존재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라의 쌍욕은 여전히 지붕에서 계속되고 있었고 그 뒤로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연이어서 들려왔다.
파직! 파직! 파직!
마리당 10개에서 30개 정도의 코르카가 끊임없이 생성되며 버스로 흡수되었다.
[2149/3000]
"잘하면 오늘 진화도 하겠는데?"
난 액정과 창밖을 연달아 살피다 성희를 바라봤다. 그녀는 창밖 멀리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방향에는 진주씨와 은결이가 들어간 기숙사 건물이 있다.
"가서 도와주고 싶어?"
내가 묻자 성희는 날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그때 지붕에서 나라의 외침이 들렸다.
"아직도 엄청나게 오는데?"
난 조수석 창문 너머 하천을 바라봤다. 아까보다 더 많은 수가 마구 엉켜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바람에 하천 근처로 엄청난 물이 튀었다.
난 버스를 앞뒤로 조금씩 움직여 다리 우측 가장자리 부분까지 옮겼다. 다리 위쪽으로 조금이라도 넘어오기만 하면 이제 전부 넉넉한 코르카로 바뀔 거다.
파직! 파직!
내 생각대로 우리를 발견한 수룡들은 연달아 물 위로 튀어 오르다 버스에 닿으며 터져나갔다.
[2653/3000]
'이거 진화는 무조건 하겠는걸?'
그동안 코르카 모으기가 쉽지 않아 버스 진화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포탑이 다시 생겼으면 좋겠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액정의 코르카 숫자는 엄청나게 올라가 있었다.
[2875/3000]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숫자였다. 이게 또 모일 때는 이렇게 거침없이 모이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누군가가 돈이 이렇게 물밀듯이 들어올 때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이런 느낌일까?'
"얼마 안 남았네!"
성희가 액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 또다시 나라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의 다 내려온 거 같은데?"
"벌써?"
난 검을 챙겨 들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빠져나간 놈들도 많아"
내가 지붕으로 올라오는 걸 본 나라가 다가오며 말했다.
"아깝다."
그때 멀리 몇 마리의 중형급 수룡이 보였다.
"네 마리다."
나라가 말하기가 무섭게 나는 소리를 질렀다.
"장어들 여기야! 여기!"
"콜록콜록"
할아버지는 연신 기침하면서도 주변을 살피고 있다. 우리가 하천에 정신이 온전히 팔려있는 게 불안하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할아버지의 상태도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각성자의 감염은 변이가 안 되는 건가?'
준호씨와 아주머니는 몇 시간 만에 상태가 극도로 악화하였다. 그러고는 다음 날 사라졌다. 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변이되었을 거로 추측된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폭우가 쏟아지던 그때 발가락을 물렸다. 그런데도 심한 독감 증세 정도만 보일 뿐 아직 상태가 그리 위독해 보이진 않았다.
"온다!"
나라의 외침에 다시 하천으로 집중했다. 그리고 그 네 마리는 동시에 다리 위로 튀어 올랐다. 제법 큰놈들이다.
"어···. 어?"
그런데 그중 한 놈의 생김새가 달랐다.
"왜 저놈은 다리가?"
파직! 파직! 파직!
세 마리가 버스에 닿으며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우리 머리 위로 거대한 몸집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내 코끼리 같은 뭉툭한 다리가 내 눈앞에 바로 나타났다.
"윽!"
난 놈의 발에 얼굴을 맞고 지붕 바닥으로 밀려 쓰러졌다.
"악!"
할아버지와 나라도 급히 피하기는 했으나 모두 두꺼운 다리에 맞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발톱이 있었다면 얼굴이 찢겼을 거다. 대신 묵직한 충격에 아직도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첨벙!
놈은 버스 지붕을 지나 다리까지 넘어 다리 반대편 하천으로 뛰어들었다.
"저놈 뭐야!"
우리는 지붕 난간으로 뛰어가 하천을 살폈으나 놈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가 여섯 개 있었어"
그 와중에 나라는 놈의 모습을 제대로 본 것 같다. 왜 시간이 느리게 흐르지 않은 거지? 목숨이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건가?
그때 우리의 시야에 하천 옆 도로 난간에 나타난 놈의 뭉툭한 발이 보였다.
"수룡과 너무 다른데?"
처음 보는 녀석이다. 도멜레온 쪽도 아니다. 마치 아직 진화 중인 것처럼 놈의 다리는 어색했다.
"온다."
하지만 그 짧은 다리로도 놈이 난간을 기어올라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건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튼실해 보이는 여섯 개의 다리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지축이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저놈도 코르카 꽤 나올 거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자 놈이 갑자기 멈춰 섰다. 놈의 생김새는 그동안 봐왔던 괴물들과 너무 달랐다. 바다사자 같은 얼굴에 몸통은 길었고 여섯 개의 뭉툭한 다리 뒤로 도마뱀 같은 긴 꼬리가 연신 움직이고 있었다.
"기괴한데?"
성희가 지붕으로 올라오며 말했다.
"어차피 버스로 뛰어들면 코르카일 뿐"
내가 말하자 놈은 마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이상한 몸짓을 하며 날 노려봤다.
"어? 눈이 까매"
괴물의 붉은 눈과 달랐다. 마치 전혀 다른 종인 것처럼
놈은 심연처럼 깊은 까만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성희가 손에 들고 있던 활과 화살통을 내밀었다. 좀 전에 올라오면서 가져온 모양이다.
난 바로 화살을 걸고 놈의 정수리를 향해 발사했다.
화살은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놈의 머리 중앙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툭!
그런데 놈의 이마에 닿고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놈 뭐지?"
낸 재차 화살을 몇 발 더 쐈지만, 놈에게 박히지 않았다. 게다가 놈은 화살을 맞고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화살은 안 먹힌다. 버스로 밀어버리자"
내가 다시 버스 아래로 내려가려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묵직한 진동이 주변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야!"
몸을 다시 돌리려 했으나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뒤쪽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 방향에서 전해지는 엄청난 무게감의 기운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모두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나처럼 경직된 거 같다. 그리고 이내 그 알 수 없는 강한 에너지의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우우우우우웅
그리고 귀에는 마치 우리 청각으로는 미처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초저음이 뇌까지 전해지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끄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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