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J1. 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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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버스의 [투명] 버튼을 누르고 천천히 악셀을 밟았다. 사이드미러는 보지 않았다.
조금 열어놓은 운전석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휴'
천천히 단지를 벗어나 다리로 접어들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어디 갔지?"
난 놈이 있던 다리 난간 옆에 버스를 세우고 옆문으로 내렸다.
쇠사슬이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 끊어진 부위가 어디에 뜯긴 것 같은 모양새다.
"도망쳤나?"
성희가 조수석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난 찢긴 듯한 이빨 자국의 쇠사슬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먹힌 것 같아"
"뭐지? 못난이?"
난 다리 아래를 살펴봤다. 어제보다 많진 않았지만, 아직 수면으로 괴물의 지느러미가 보였다.
팔의 액정에 표시되는 괴물의 숫자도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딱 눈에 보이는 저놈들 정도다.
단서가 너무 없어서 놈이 어떤 괴물에게 당했는지 알기는 힘들었다.
난 다시 버스에 올라 운전석에 앉았다. 그때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죗값 치른 거지 뭐, 쿨럭"
난 말없이 다시 악셀을 밟았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언덕 위에 작은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도 누군가 있으려나'
성희도 전방에 보이는 단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녀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그래서 우리가 굳이 무거운 마음을 누적시키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난 슬쩍 그쪽을 한번 바라보며 핸들을 우측으로 돌렸다.
하천에서 조금 멀어지는 언덕길을 달리니 탐지 숫자는 거의 표시되지 않았다.
"계속 직진"
성희가 아까 단지 분들이랑 얘기 나눌 때 의료원으로 가는 길을 들은 모양이다.
"다리 건너 우측 언덕길 지나서 계속 직진하면 된다고 했거든."
"쉽네"
작은 도시지만 그래도 우리 버스로 방문한 곳 중에서는 제일 큰 곳이다. 그런데 도심에 괴물도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흔한 못난이도 안 보여"
성희가 창밖을 살피며 말했다.
"아침에 날괴물도 고작 세 마리였어, 떼로 몰려다니는 놈들인데···."
"어? 저거 뭐지?"
성희가 전방에 뭔가를 보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개?"
누렁이 한 마리가 사거리 한 가운데에서 뭔가를 뜯어먹고 있었다. 버스로 조용히 더 다가가니 놈의 식사가 눈에 들어왔다.
형체가 온전하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발톱과 살점 조각들을 보니 연상되는 놈이 있었다.
못난이다.
안 보인다 했더니 저기서 뜯어 먹히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쿨럭, 괴물 먹어도 괜찮나? 저놈 참 맛있게도 먹네!"
나도 궁금하던 차였다. 어디선가 들은 기억으로는 서로 다른 외계 생명체는 먹어도 소화할 수 없다고 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대충 그런 얘기였던 거 같다.
저놈들도 사람이나 동물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의 동물이 저놈들을 뜯어먹고 있다.
그저 배고파서 저러는 건가? 만약 먹은 게 소화나 흡수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배만 부른 채 굶어 죽는 기이한 현상을 보게 되나?
그런데 정말 먹어서 소화와 흡수가 되는 거라면?
'그럼···. 설마?'
"방벽 너머 말이야."
그때 갑자기 성희가 입을 열었다.
"뭐?"
"거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그녀의 질문에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거기는 어디일까? 외계행성? 어떤 이세계?
갑자기 SF나 판타지 영화에서 봤던 수많은 픽션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구?"
내 생각을 눈치라도 챈 듯 성희가 입을 열었다.
"같은 지구인데···. 다른 곳이라면"
내가 중얼거리자 성희가 대답했다.
"평행 우주?"
영화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쿨럭 뭔 소리여?"
그때 갑자기 개가 행동을 멈추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액정의 숫자는 변화가 없다. 주변에 다른 동물이라도 나타난 걸까?
주변을 천천히 관찰하니 도로변 일 층 건물 옥상에 갈색의 작은 형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야옹!
"고양이다!"
성희가 너무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집사였어?"
그녀는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싶었는데···."
고양이를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누렁이는 먹을 만큼 다 뜯어 먹었는지 유유히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눈치만 보던 갈색 고양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 층에서 사뿐히 아래로 뛰어 내려와 조심스럽게 사체 근처로 다가왔다.
고양이의 배는 한동안 굶었는지 홀쭉했다. 그런데도 사체 앞에서 바로 뜯어먹지 않고 계속 주변을 경계했다.
"음?"
그런데 가만히 보니 고양이는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우리가 보이나?"
난 사이드미러로 버스 뒤쪽에 뭐가 있나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탐지 숫자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러면 정말 버스가 보이는 걸까? 지금 투명 [ON] 상태인데? 이때는 나도 이제 안 보이는데?
난 천천히 고양이 위치를 피해 핸들을 옆으로 돌리며 움직였다. 그러자 녀석의 고개도 조금씩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선은 조금 벗어나는 걸 보니 보이진 않는 거 같아"
성희가 녀석을 관찰하며 말했다.
"그래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 봐, 고양이는 영물이라더니"
한 박자 느리긴 했지만, 버스의 움직임을 조금씩 따라서 고개를 돌리는 녀석을 보니 정말 신기했다.
"살아있어 반가워"
성희가 조수석 창문 너머로 계속 녀석을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나도 잠시 그 모습을 구경하다 다시 악셀을 밟았다. 사이드미러 너머로 고양이는 이제서야 사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달리니 길가에 약국 간판이 많이 보였다.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내가 간판을 둘러보며 말하자 성희가 전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전방 우측에 의료원 주차장 입구가 있었다. 나는 사방을 유심히 살피며 천천히 버스를 몰았다.
주차장 입구는 바리케이드와 잡동사니로 막혀있었다. 여기도 누가 일부러 막은 모양새다.
막아놓은 형태가 아까 아파트에서 봤던 것과 유사했다. 다른 점이라면 여기서는 환자 침대와 휠체어 같은 게 많이 보인다는 거 정도
"한 놈의 작품 같은데?"
쇠사슬로 엮어놓은 형태가 너무 비슷했다. 난 바로 앞에 버스를 세우고 잠시 바리케이드 너머를 바라봤다.
"애들이 저기에 있었겠지"
내 말에 성희는 표정이 굳으며 말없이 입구를 바라봤다.
액정에는 원거리 괴물만 간간이 표시되고 있었다. 의료원이 하천 옆에 있어서 그런 거 같다.
난 일어나 방패와 검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같이 가 쿨럭"
할아버지도 버스에서 내렸다.
"성희는 혹시 모르니까 버스에 있어"
할아버지를 따라 내리려던 성희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에 누군가 있어야 나도 안심이 될 거 같다. 혹시 우리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면 구하러 올 사람도 있어야 하고
할아버지와 나는 바리케이드를 넘어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부서진 자동차들은 전부 주차장 주변으로 마치 울타리처럼 쌓여있다. 그리고 주차장 가운데에서 불이라도 피웠는지 타다가 만 장작과 시커먼 재가 빗물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불 멍이라도 때렸나? 쿨럭"
우리는 건물 입구 가까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유리문은 깨지고 부서져 있었고 입구는 집기들로 엉성하게 막혀있었다.
나는 집기들을 밀며 안으로 진입했다. 아침 햇살에 로비는 밝았으나 복도 쪽은 어두웠다.
오래된 피 냄새가 났다. 그리고 영화에서 본 거 같은 풍경의 로비와 복도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누군가의 붉은 손자국도 벽에 남아있었다.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모습이 무슨 테마파크나 영화 세트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일 층부터 뒤졌다. 각종 검사실과 외래 진료실, 비품 창고를 전부 돌아봤으나 특이한 점은 없었다. 수색하는 김에 약품도 찾아봤으나 아직 그런 게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는 계단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정말 칠흑 같은 어둠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바로 팔의 조명을 켰다.
"허허 불이 들어오네?"
할아버지도 내 팔의 조명에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 철문을 당겼다.
"쿨럭 뭔 냄새야"
썩는 냄새다. 터널에서, 그리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도 같은 냄새를 맡았다.
이층으로 진입하니 약간의 빛은 흘러들어왔지만 그래도 너무 어두웠다.
서걱서걱
어딘가에서 수상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팔 액정의 탐지 숫자는 변화가 없다.
'또 고양인가?'
쓱쓱 사각사각
작은 소리가 어딘가에서 계속 들려왔다. 난 조명을 비추며 그쪽으로 계속 걸었다.
"쿨럭, 뭐가 있긴 있나 보네"
소리를 따라 걸어가자 큰 유리문이 나타났다.
< 수술실, 통제구역 >
불투명한 유리문이 닫혀있었다. 카드키나 비밀번호로 열리는 보안 자동문이다.
"전기 안 들어오니 그냥 옆으로 밀면 돼"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손을 문에 대고 옆으로 조금 밀었다. 그리고 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완전히 옆으로 열었다.
"으허어!"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시커먼 작은 형체가 갑자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할아버지는 발로 마구 밟았고 나는 검을 휘둘렀다.
찍! 찌익!
그건 쥐 떼였다.
이 쥐들은 또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몰려든 건가?
수십 마리가 열린 문으로 뛰쳐나오더니 우리 다리 사이를 지나 어두운 복도와 계단실 등으로 숨어들었다.
"허···. 놀랬잖아. 쿨럭"
난 수술실 안으로 조명을 비췄다.
각 수술방의 유리나 외벽이 모두 부서져 있었다. 각종 장비도 구석에 쌓여있었고 외벽 잔해와 깨진 유리 조각들은 누군가 정리해놓은 듯 한쪽에 쌓여있었다.
조명을 돌리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풍경이 마침내 드러났다.
시체 더미다.
수십 마리의 쥐새끼들이 몰려있던 이유였다. 굶주렸던 놈들은 이미 용건을 다 마친 것처럼 전부 도망가버렸다. 아직 배가 고팠으면 우리가 나타났어도 그렇게 전부 도망치진 않았을 거다.
예상은 했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끔찍했다. 이미 미라 형태로 변한 시체를 쥐 떼들이 한 번 더 엉망으로 만들어놔서 도저히 눈 뜨고는 못 볼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단서라도 찾으려고 그 안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뭐라도 찾고 싶었다.
역겨운 냄새는 후각이 적응한 탓인지 심하진 않았고 조명을 비추지만 않으면 끔찍한 광경도 시야에서 잠시 사라지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부드득
그때 뭔가 발에 밟히는 느낌이 났다. 조명을 비춰보니 인형이다. 바비 인형
유민이가 빌라에서 애들에게 돌려줬던 그 인형이다. 난 근처를 더 찾아봤지만 다른 건 더 보이지 않았다.
"하아"
정말 여기에 애들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시체들의 상태를 볼 때 초록 방벽도 여기에 소환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애들이 정말 방벽 너머로 파란 머리와 넘어간 건가?
"그거 딸내미 거 맞지?"
할아버지가 내 손에 들려진 인형을 보며 물었다.
"네···."
그때 밖에서 경적이 짧게 한 번 울렸다. 들은 게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짝 울린 그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에게 알리기는 해야 하지만 대놓고 크게 경음기를 계속 울리기는 난처한 상황이라는 거다.
나는 인형을 품에 넣고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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