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너머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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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은 굳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판타지 영화 같은 데서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잖아."
그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잠시 머뭇거렸다. 아마도 본인이 하는 말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나무나 풀들도 너무 이상했고 신기한 곤충도 많더라고, 그리고 우리가 괴물이라고 하는 건 거기서 그냥 동물일 뿐이고···."
그는 말을 멈추고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형이 익숙했어."
"그게 무슨···."
성희가 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살던 동네"
잠시 버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잠시 생각했다. 나와 성희는 이미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할아버지가 마치 대충 알겠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평행 머시긴가 그런 거?"
아무래도 눈치나 이해가 정말 빠르신 분 같다.
"나도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랬어, 산과 하천이 정말 흡사했거든···. 그런데 우리 살던 동네나 건물 같은 건 당연히 없었어. 그런데"
그는 비어있는 생수병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맨정신으로 듣기는 힘들었다.
그때 성희가 일어나 소시지를 꺼내 칼집을 내고 프라이팬에 올렸다.
"점심 겸"
태형은 내가 건네준 캔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이쪽 세상의 읍내가 있던 장소에는 나무와 풀 말고는 당연히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생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숲 한 가운데 뜬금없이 읍사무소 건물이랑 그 주변 건물들이 있더라고"
쨍!
성희가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트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그녀의 부모님 가게 근처가 통째로 사라진 흔적을 봤었다. 읍사무소 주변 지역이 거대한 원형으로 마치 잘라낸 듯 사라졌었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호···. 혹시···."
성희가 떨리는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태형은 그녀가 뭘 궁금해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응, 사람들도 있었어."
성희는 차마 더 물어보지 못하고 손만 떨고 있었다. 소시지 타는 냄새에 내가 일어나 인덕션을 끄고 성희를 살폈다.
"괜찮아?"
내 질문에 그녀는 무안한 듯 대답 없이 환풍기를 켜고 수납함에서 식기를 찾기 시작했다.
난 다시 앉아 태형이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데?"
"거긴 위험해서 다들 거처를 희성이의 동굴로 옮겼어···. 아 희성이가 지내던 동굴인데 그쪽으로는 괴물이 거의 안 오더라고, 옆에 큰 폭포와 하천이 있어서 그렇다는데···."
그는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말을 멈추고 다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분들 중에 성희 부모님이 있었어?"
쨍그랑!
성희가 접시를 떨어트렸다. 깜짝 놀란 태형이가 일어나 깨진 접시를 주우려 했지만, 성희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할게."
태형은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고 이야기를 거의 못 해봐서···. 알았으면 아까 얘기했을 거야"
난 성희를 잠시 살피다가 다시 녀석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소식은 들은 거 없고?"
"그···. 그게···."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쪽 세상에서도 도시 비슷한 게 있어"
"뭐?"
"우리의 태백시가 있던 그 자리에 그들만의 거대 도시가···."
"그들? 그들이 누군데?"
내가 묻자 그는 좀 더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그쪽 세계의 인류라고 해야 하나"
"거기도 사람이 있다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우리가 겪은 수많은 기이한 현상 중에서 어떻게 보면 제일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어떻게 생겼어? 우리랑 같아? 같은 지구니까 비슷하겠지?"
"쿨럭, 진정해라"
내가 정신없이 물어보자 김씨 할아버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날 말렸다. 태형은 날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이미 봤어."
"뭐라고? 그게 누군데?"
그는 잠시 내 표정을 살피다 말했다.
"네가 꺽다리라고 부르던 괴물"
난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저 괴물이라고 부르던 괴생명체, 흉측한 외모와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던 그 괴물, 멸망의 그날 이후 처음 목격했던 바로 그 괴물
꺽다리는 지능이 있어 보이더니 또 다른 지구의 지적 생명체였단 말인가?
"놈들은 태백시 자리에 있는 그 거대 도시에서 대부분 살더라고, 다른 괴물들은 가축같이 부리면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쿨럭, 도시는 가 봤나?"
"멀리서만 봤어요. 들어가면 우리는 바로 눈에 띄는···. 어쩌면 놈들에는 괴물이니까"
태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가 얼마 안 남았다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의 갑작스러운 말을 난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주변 지역 대부분이 오염되었어."
"뭐?"
"그쪽 세계의 생물들이 다 죽고 있다고"
"그게 무슨"
"우리로 치면 태백시 부근을 제외하고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있어, 그래서 놈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거 같아. 이쪽으로 몰려온 이유가 그래서 그런거고, 우리의 한반도 지역만 그런 건지 아니면 세상 전체가 그런 건지는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멸종 위기에 어디론가 도망갈 수 있다면 어떤 생물이든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생명체는 그렇게 진화됐으니까, 모든 생명은 살아남는 게 첫 번째 목표니까
그게 다른 나라든, 다른 대륙이든, 다른 행성이든
혹은 평행 세계 너머로든
"하아"
내가 한숨을 쉬며 아무런 말도 못 하자 태형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확실한 건 아냐, 다 추측일 뿐이지. 그런데 궁금한 건 왜 애들을 거기로 데려온 걸까? 대체 뭘 하려고?"
그건 우리도 궁금하던 차였다. 파란 머리는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무리수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추측이나 우려라고 하기에는 너무 들어맞는 부분이 많았다.
작은 성희의 능력이다.
읍내에서, 그리고 언덕 아래 사거리에서 작은 성희의 괴능력으로 원형 주변이 통째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진 지역은 평행 세계 너머 저쪽의 같은 위치로 이동하는 것 같다.
'그 반대라면?'
그쪽에 아직 남아있는 도시를 통째로 여기로 옮기려는 계획이라면? 그 계획에 꼭 필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작은 성희다.
"아 시발"
내가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갑자기 욕설을 내뱉자 다들 놀란 듯 눈이 동그래져서 날 바라봤다.
"작은 성희가 그런 거야, 읍내 일부분이 넘어간 거"
큰 성희도 이미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내 표정을 보던 그녀는 갑자기 눈이 점점 커지며 내 손을 잡았다.
"설···. 마···?"
그러자 할아버지가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쿨럭, 뭔데 그래?"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태형은 이미 내 생각을 읽은 듯 그의 동공도 함께 커졌다.
"놈들이 그쪽 도시를 여기로 통째로 옮기려는 거 같아요."
다시 캠핑카 거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각자의 생각에 빠진 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 그 도시는 얼마나 커?"
태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여기 태백시보다 훨씬 커, 거기에서는 서울 같은 느낌이야. 유일한 거대 도시 같은? 다른 도시가 다 초토화돼서 그런 건지 원래 거기가 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도라는 개념도 사실 우리 개념이니까"
난 문득 파란 머리가 서울로 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놈은 속으로 날 비웃으며 그쪽 세계의 서울로 오라고 한 건가? 어차피 난 못 알아들을 것이고 이쪽 세계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오래 걸리고 험난할 테니까
놈은 내가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길 바랐을지도 몰랐다.
'대체 왜?'
내가 놈들의 계획을 방해할까 봐 그랬나? 캠핑카와 나의 존재가 방해될 거 같으면 놈의 그 능력으로 날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나?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었나?'
문득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까 난 태형에게 우리 할아버지에 관해 물었다. 그런데 녀석은 그쪽 세계의 도시 이야길 먼저 꺼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소식은 들은 거 없어?"
태형이 먼저 그쪽 세상의 도시에 관해 설명한 이유가 있을 거다.
"너희 할아버지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난 숨죽이며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도시에 인간 할아버지가 있다는 이야길 들었어"
그때 난 성희가 꾼 꿈이 떠올랐다. 역시 할아버지는 놈들에게 잡히신 건가?
"거기도 감옥 같은 게 있어?"
내가 묻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갇혀계신 게 아니라"
"응? 그럼?"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서 일하고 계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자 태형이 입을 열었다.
"희성이가 멀리서 도시를 관찰하다가 우연히 봤데, 인간 할아버지가 꺽다리와 같이 있는 걸, 그 머리 모양이 다른 꺽다리가 있거든, 좀 높아 보이는 놈들···. 처음에는 희성이도 할아버지가 강제로 잡혀계신 줄 알았는데 계속 관찰하다 보니까 같이 작업을 하고 계셨데, 마치 뭔가 지시하는 듯한 모습도 보였고···."
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할아버지가?"
난 나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쿨럭, 한씨가 왜 거기서 일을 해···. 이게 먼소리여"
할아버지는 마치 그 일이 딱 그날 발생할 걸 아셨던 것처럼 시골 집으로 오라고 문자를 보내셨었다.
그리고 그 시골집 창고에는 예전부터 할아버지가 작업 중이시던 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는 분명 날 위해 할아버지가 준비해 놓으신 거였다.
그런데 개조가 끝난 버스 이외에는 시골집에서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어···. 그래서 꼭 내가 시골집에 가서 버스를 타길 원하셨던 거고"
성희도 태형이도 김씨 할아버지도 모두 내 얘기는 익히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거다.
"어떻게 그걸 미리 아셨을까?"
태형이가 나에게 물었지만 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꺽다리와 같이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무너트리고 인간들을 학살한 놈들과 할아버지는 대체 어떤 관계인 걸까?
아니 무엇보다
내 친할아버지도 아닌데 왜 날 보육원에서 데리고 오신 걸까?
근본적인 의문이 다시 내 마음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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