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J1. 시청 별관
청년의 음성을 듣고 나는 다시 놈의 면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그게"
나는 놈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위로 확 꺾은 다음 놈의 얼굴 가까이에 검을 들이대며 말했다.
"어찌 된 거야? 피를 못 받았나?"
그때 놈의 입과 코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나왔다. 그는 연신 기침하면서도 가증스러운 눈으로 날 노려보며 말했다.
"알려주면 놔줄 건가?"
"아니"
난 놈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그냥 놔버리고 일어섰다.
"윽!"
얼굴이 바닥에 그대로 처박힌 놈은 곁눈질로 날 노려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난 놈의 웅얼거림을 무시하며 청년들에게 말했다.
"남은 약물도 없는 거 같고, 데려가서 알아서들 하시고 아까 하던 이야기나 끝내지"
마른 청년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놈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건물에 같이 올라 가주시면 얘기할게요."
어라? 왜 조건이 달리지?
"왜?"
"안에 사람들이 우리 말만으로는 믿지 않을 거 같아서요"
겉보기에는 순박해 보이는 화난 군중 같은 청년들이지만 또 그 내면에는 어떤 게 똬리를 틀고 있을지 모른다. 건물로 따라 들어가면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거다.
그런데 난 사실 저 별관 건물 안이 궁금했다. 그들이 쓰는 병장기를 어디서 구했는지도 알고 싶었고 그간의 사정도 듣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정보가 분명 더 있을 거다.
게다가 이런 쓰레기가 대장으로 있던 곳이니 다른 각성자가 저기 있을 확률은 극히 낮다. 저들은 그 약물이 각성자의 피로 만들어진다는 거조차 잘 모르고 있었던 거 같다.
그럼 저들의 무리가 아무리 많아도 내가 저들에게 당할 확률도 높지 않다. 게다가 건물 밖에는 저들이 짐작도 못 하는 버스에 세 명의 각성자가 더 있다.
난 고개를 돌려 살짝 성희와 눈을 맞춘 다음 청년에게 말했다.
"뭐해 안 들어가고"
덩치 청년이 꿈틀거리며 뭐라 중얼거리는 놈을 둘러업었다.
"이 새끼···."
놈은 축 늘어진 몸과 달리 여전히 그 더러운 입을 조금씩 움직이며 욕을 내뱉고 있었다.
"닥쳐라."
내가 놈의 뒤통수를 후려치자 이내 잠잠해졌다.
"죽겠어요."
청년이 뒤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안 죽는다."
우리는 별관 건물 쪽문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봤다. 옥상에서 궁수 한 명이 아래로 활을 겨누고 있었다.
"형! 저예요"
궁수는 아래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덩치에 업혀있는 대장을 발견하고는 안쪽으로 뭐라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쪽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안쪽에는 창과 검으로 무장한 사내 여럿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중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사내가 날 발견하곤 마른 청년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털보의 걸걸한 음성이 들려오자 마른 청년이 우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했다.
"우리 구해주신 분이에요. 우선 안으로···."
"잠깐"
털보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 사기꾼 대장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놈들···. 배신자"
털보가 그 말을 듣자마자 외쳤다.
"잡아라!"
몇 개의 허술한 병장기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쉽게 지나가는 게 없네'
난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며 검면으로 병장기를 들고 있는 그들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동시에 검의 손잡이로 그들의 뒤통수를 살짝 가격했다.
"악!"
"윽!"
네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성이다. 난 털보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을 쳐내고 놈의 목에 검을 겨누며 말했다.
"배신자는 저 대장 놈이야."
하지만 병장기를 떨어트린 별관 입구의 사람들은 재차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하긴 상황을 봐도 나 같은 불청객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짜증은 났지만,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할 수 없이 난 그들 모두를 죽지 않을 만큼만 더 두들겨 팼다. 그리고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할 정도가 된 걸 확인 하고 나서야 그간의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했다. 역시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땐 몽둥이가 답인가?
내가 말하는 와중에 중간에 자꾸 대장이 끼어들었다. 몇 번이나 놈의 뒤통수를 갈기고 나서야 이야기가 끝이 났고 그들은 두 청년과 내 말을 조금씩 수긍하기 시작했다.
수염에 묻은 피를 손으로 훔치던 털보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나갔던 사람 중에 내 친구도 있었어, 파란 점퍼 입은 사람 못 봤나?"
아침 습격조 대부분은 내 검을 피하지 못했다.
"저놈이 발목을 잘랐지"
아직도 쓰레기 같은 입을 움직여대는 놈을 지금 죽여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놈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털보가 눈을 치켜뜨고 날 노려보자 내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의 칼이 내 목을 향해 날아왔죠. 제가 죽어 드려야 했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선 위로 올라가서 모두에게 다시 얘기해요."
마른 청년의 말에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털보는 날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대장의 목덜미를 움켜쥐더니 놈을 질질 끌며 계단으로 걸어갔다.
건물 위층에 오르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건물 안에 있었다.
'이래서 소모품 취급했나? 이 사람들 먹여 살리기 힘들었을 텐데'
아침에 동네에서 그가 하던 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위험한 임무에 데려가서 소모품으로 쓰는 것 같다.
조금씩 나눠준 약물이 아까웠을 테지만 각성자를 잡아서 넘기면 더 큰 보상이 있었을 거다.
털보가 축 늘어진 대장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지나가니 건물 안 사람 대부분이 놀란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털보는 한 층을 더 올라가 넓은 라운지 같은 곳까지 걸어가더니 중앙 바닥에 대장을 내동댕이쳤다.
"억!"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세어보니 대략 백 명은 넘어 보인다. 모여든 군중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무리에서 털보의 위상을 보여주듯 아무도 그의 행동에 대해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왜 대장을?"
깡마른 노인 한 명이 털보에게 걸어와 물었다. 털보와 두 청년은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내가 중간에 거들었다.
그들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털보가 입을 열었다.
"이놈은 어찌할까요?"
그때 한 중년 여성이 바닥에 쓰러져 간신히 숨만 쉬고 있던 전직 대장에게 달려들어 마구 주먹질하기 시작했다.
"내 남편이 괴물한테 당했다며! 네가 죽였어! 네가!"
웅성거리는 군중 속에서 추가로 한 명씩 걸어 나오더니 쓰러져있는 대장에게 다가가 비슷한 욕설을 퍼부으며 대장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아무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피의 약물로 만든 그의 짧은 천하는 어이없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난 마른 청년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놈들이 누구지?"
그는 내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대장이 감염자라며 마취시킨 사람들을 집어넣던 건물이 있어요. 저는 진짜 바이러스 감염자인 줄 알고 도우러 갔었죠."
"뭐? 거기가 어딘데?"
"박물관요. 석탄 박물관, 입구 바로 근처 건물이에요. 사람 밀어 넣고 기다리면 무슨 가방 같은 게 줄에 매달려 올라왔어요."
"알았어. 고맙다."
위치는 확인되었다. 거기라면 나도 어렸을 때 들른 적이 있어 아는 곳이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하러 간 적이 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구조는 기억할 수 있었다.
이제 유민이를 찾으러 떠나야 한다. 난 눈앞에서 여전히 폭행당하고 있는 사기꾼 대장을 바라봤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었다.
'피 약물만 제때 마셨어도 이렇게 허망하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아침에 그에게 얻어맞은 빛의 힘이 떠올랐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저항하기 힘든 힘이었다. 그가 비록 각성자는 아닐지라도 피의 약물만으로 그런 힘을 부릴 수 있다는 건 특별한 그만의 능력이다.
'그런데 왜?'
그에게 유민이를 넘겨받은 그들은 왜 이놈에게 약속한 약물을 넘겨주지 않았을까?
"잠시만요!"
내가 죽기 직전의 대장에게 다가가며 사람들을 말렸다.
처음엔 완강한 그들의 폭력을 어찌할 수 없었지만 내가 대장 놈의 머리채를 잡고 반대편 벽 쪽으로 밀어버리자 사람들의 주먹이 더 이상 닿지 못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요."
난 다시 달려드는 군중을 말리며 놈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아직 놈의 숨은 붙어있었다.
"왜 약물을 받지 못했지?"
죽진 않았지만, 정신은 이미 나가 있었는지 두 눈은 이미 초점이 없었고 끝까지 더럽게 움직이던 입술은 더는 말할 힘이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젠장"
내가 다시 군중에게 밀어버리려 하자 그가 흐릿한 음성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난 그의 말을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본관 놈들이···."
그러고는 놈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뒤집힌 눈은 돌아오지 않았고 더 이상의 꿈틀거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놈의 목덜미를 쥔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리고 군중들을 향해 물었다.
"본관 놈들이 누구죠?"
그때 털보가 대답했다.
"본관 장악한 놈들"
"여기와 따로 움직이나요?"
그때 노인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저놈들이 평소처럼 우리를 부려 먹으려 들어서 사이가 좋지 않아, 여기 대장이 능력자라 놈들이 우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었어, 에이! 이놈이 이런 쓰레기 새끼인 줄도 모르고"
털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괴물들 방어를 우리만 하긴 힘드니까, 건물 위치 때문에 어쩌다 보니 북쪽은 놈들이 남쪽은 우리가 방어하고 있어"
난 숨이 끊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본관 사람들이 약물을 채갔으면 그게 뭔지도 알고 있겠네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죠?"
노인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런 세상에 누가 나쁘고 안 나쁘고 말하긴 그렇네만, 저들이 우리 같은 외주 하청 직원들 대하던 습관이 어디 가겠나? 예전에는 기분만 나쁘면 됐는데 지금은 목숨까지 위험하게 일을 시키려 드니"
그러면 아까 별관으로 들어오지 않고 옆의 구석으로 몰래 들어가던 대장 놈은 그 뺏긴 물약을 다시 훔치러 들어가던 거였나?
"아까 대장 놈이 향하던 곳이 어디지?"
내가 마른 청년에게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쓰레기 처리장 쪽인 거 같은데"
"거기 뭐 특별한 게 있나?"
그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이었다. 그는 쇳소리가 섞여 있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거기 뒤에 지하 창고가 있어, 폐기물 정리하다 대장이 가끔 드나드는 걸 봤네"
여기서 이후 상황과 더불어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우선은 유민이부터 구해야 했다.
"난 이만 가볼게, 상황 봐서 또 보자고"
마른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계단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본관 놈들이야!"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