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J1. 동네
작은 성희는 부모님과 집 앞 교회를 자주 다녔는지 멀리서도 그 교회를 바로 알아봤다.
내 눈에도 멀리 교회의 첨탑이 보였다. 작은 성희 말대로 큰 교회였다.
이제 가야 할 곳의 표지가 생겼으니 더는 헤매지 않아도 된다. 난 잠시 멈췄던 버스를 다시 움직이려 악셀에 발을 올렸다.
그때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흰색이다.
[Caution]
오면서 자주 깜박이던 흰색 램프여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악셀을 밟았다.
난 멀리 언덕 위에 보이는 첨탑 방향으로 천천히 버스를 몰았다.
차도에 쌓여있는 각종 잔해들을 밀어내거나 피하며 좁은 길을 한동안 달리다 보니 어느새 첨탑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근처 건물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것 같다.
'분명 이쪽인데'
난 건물 사이로 계속 언덕 쪽을 살피며 버스를 몰았다.
"저기"
성희가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많이 가까워졌을 거로 생각했던 언덕 위의 교회는 아직도 멀리 있었다. 꽤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동네 형성이 된 지 아주 오래된 옛날 길이라 눈에 보여도 찾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운아 이 근처 와본 적 있어?"
어른스럽다고 해도 미취학 아동이다. 어린아이들이 길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가게나 놀이터 같은 거는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녀석은 잠시 창밖을 살피더니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아! 저기 떡볶이집 알아요."
"그래?"
"엄마랑 왔었어요."
거의 무너지지 않은 떡볶이집이 보였다. 셔터도 열려있었고 유리문도 깨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마치 들어가면 떡볶이 한 접시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대랑 튀김도 같이
난 근처에서 언덕 쪽으로 향하는 세 방향의 길을 발견했다. 모든 길이 다 그쪽으로 이어진 거로 보여도 그건 모를 일이다.
탑차로 배달 다닐 때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저런 언덕길은 애매하게 막다른 곳으로 이어졌던 적이 많았다. 차를 돌리지 못해 후진으로 진땀을 빼며 나온 적도 있었다.
"혹시 저기 길은 기억나니?"
성운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주변을 관찰하더니 뭔가 발견한 듯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기 문방구 옆으로 들어가면 돼요! 문 앞에 뽑기가 있어요!"
그동안 성운이에게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역시 애들은 좋아했던 거는 절대 잊지 않는다. 이 어린아이는 충분히 자기 몫을 하고 있었다.
난 성운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
쾅!
"뭐야!"
멸망한 세상에서 무슨 난데없는 교통사고인가? 신호등도 다 꺼져있고 다니는 차량도 없는데? 이게 대체?
버스는 멀쩡했지만, 그 충격에 모두 버스 안 어딘가에 부딪혀 바닥에 쓰러졌다.
"괜찮니?"
난 아이들을 살폈다. 성희가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일어나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은 거 같아"
나도 머리가 멍해 정신이 없어서 바로 밖을 확인하지 못했다.
대체 뭐가 와서 때려 박았길래 이런 충격이 느껴진 것일까? 그런데 버스가 어디로 튕겨 나간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충격이 그대로 내부로 전해져 우리가 쓰러진 거다.
난 창밖을 살폈다. 다른 차량이나 혹은 괴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웬 사람이 하나 서 있다.
각성자인가?
젠장, 참으로 기나긴 하루다.
놈의 모습은 무슨 원숭이, 아니 원주민 같은 느낌이었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 놈의 피부에 달라붙은 거무튀튀한 게 옷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그냥 때였다.
아 씨 더러운 새끼
외형으로는 사람이다. 감염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놈의 눈이 이상하다. 마치 눈이 뒤집힌 것처럼 흰자만 보인다. 저 눈으로 보이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쾅!
또 놈이 버스 옆을 들이받았다. 아까보다 충격은 덜 했으나 그래도 꽤 강한 힘이 느껴졌다.
저놈 대체 뭐지?
놈은 버스에서 십여 미터 정도 거리를 벌리더니 다시 버스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저 뒤집힌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텐데?
그때 놈이 귀를 쫑긋거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머리 근육이 약한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떨렸다.
놈은 청각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감각으로 버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다짜고짜 버스를 들이받는 거지?
버스의 대시보드에는 아까처럼 흰색 등만 천천히 깜박이고 있다.
만약 저놈이 괴물이라면 노란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버스에 때려 박을 때 순간적으로 붉은 등도 들어왔어야 했다.
경고등의 상태로 보면 저놈은 아직 인간이다.
또다시 그 민머리를 앞세워 달려드는 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라고!"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정말 맨들맨들한 살만 보이는 놈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 민망했다.
식구들도 보고 있다.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야생 아마존의 눈물도 아니고
"멈춰!"
내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자 놈의 번들거리는 민머리가 버스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난 창고에서 활과 화살통을 꺼내 들었다. 이전에 화살 몇 발을 날려서 세 발쯤 남았나?
"오!"
화살이 다섯 발 채워져 있었다. 창고도 원래 상태로 돌려주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왜 이걸 진작 몰랐을까?
난 버스의 창문을 조금만 열고 놈에게 활을 겨눴다.
"이 새끼 너 괴물이냐?"
아닌 거 알면서도 물었다. 지금 놈의 움직임은 사실 괴물과 다를 바가 없긴 했다.
놈이 말없이 그 민머리를 들었다. 어디부터가 머리고 얼굴인지 고민되는 모습이다.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린 청년이다. 그런데 눈썹도 없었다. 눈은 여전히 뒤집혀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묘하게 섬뜩했다.
"말 못 해? 왜 버스를 들이받냐고!"
"버...스?"
놈의 어눌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고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얼굴을 움직이며 말했다.
"사···람?"
뒤집혔던 눈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의 끄트머리에 검은 눈동자가 조금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모습으로 그의 눈동자는 거칠게 움직였다.
난 활을 놈의 눈으로 겨눈 채 숨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놈은 버스를 눈으로 발견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저 감각으로 수상한 움직임을 느끼고는 단순히 괴물이라 생각해 달려들었던 거 같다.
"정신 차리라고!"
놈은 갑자기 사람의 외침이 들려서 그런지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서서히 검은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보였다.
'젠장 옷이라도 입었으면 좋겠는데'
난 마트에서 챙겼던 운동복 하의를 하나 꺼내서 놈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입어라! 못 봐주겠다!"
놈의 머리 위로 운동복이 떨어졌다. 그 때문에 놈의 얼굴이 잠시 보이지 않았지만, 바지는 맨들맨들한 머리 위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옆으로 떨어졌다.
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거리에서 날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디 대중목욕탕에라도 있다가 그날을 맞이했나? 눈썹은 또 왜 저렇게 밀어버렸지?
놈은 내가 던져준 바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동자는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제발 빨리 좀 입어라.'
그때 성운이의 외침이 들렸다.
"아저씨 빠른 노란불!"
난 창밖을 살폈다. 대시보드의 노란 불빛이 빠르게 점멸하는 게 거실에서도 느껴졌다.
'어? 저놈이 괴물?'
놈은 아직도 바지를 입지 않고 내려다보고만 있다. 그런데
퍼억!
순간 거대한 멧돼지 괴물이 나타나 그를 들이받았다. 그러자 민머리 알몸 청년은 멀리 떡볶이집 건물 입구까지 날아갔다.
그 뒤로 멧돼지 괴물 여러 마리가 나타나더니 선두의 괴물과 더불어 청년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몰려갔다.
"다른 놈 보이면 바로 경적 울려"
놈이 인간인 걸 알고 있는데 저렇게 멧돼지들한테 뜯어먹히게 놔둘 수는 없었다.
비록 버스를 여러 번 공격했다고는 하나 그건 버스를 탈취하거나 우리를 해할 목적은 아닌 거 같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괴물로 착각하고 달려든 거다.
청년이 감염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인간이다. 그리고 멧돼지 대여섯 마리는 나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
난 버스 주변을 먼저 살폈다. 멧돼지 말고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난 검과 방패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꽈직!
그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멧돼지 한 마리가 그쪽에서 날아와 내 머리 위를 지나 한참을 날아갔다.
꽈직! 꽈직!
이번에는 바닥 쪽으로 그대로 납작한 호떡이 되어버린 멧돼지 괴물이 보였다.
청년은 뒤이어 달려들던 멧돼지 괴물 두 마리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양손에 각각 머리를 붙잡힌 멧돼지들은 심하게 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청년이 양손에 움켜쥔 멧돼지 머리를 서로 강하게 충돌시키자 멧돼지의 날카롭고 긴 이빨이 서로의 얼굴에 박혔다.
퀘엑!
그러고 그는 그대로 맨들맨들한 머리를 놈들의 대가리에 내리찍었다.
파직!
서로의 긴 이빨에 박혀 붙어있던 멧돼지 괴물 머리는 그대로 바닥과 민머리 사이에 끼여 납작하게 편육···. 아니 초록색 곤죽이 되어버렸고 몸통의 격렬했던 움직임도 이내 멈췄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머지 한 마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혹은 괴물이건
뒷모습만 봐도 느껴지는 게 있다.
멧돼지 괴물의 얼굴과 눈빛을 굳이 보지 않아도 그 뒤태만으로 놈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괴물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이미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괴물도 알 것이다. 그 자신도 눈앞에 보이는 저 편육···. 아니 곤죽처럼 될 거라는 걸
어디서부터가 얼굴인지 알기 어려운 민머리가 천천히 멧돼지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그 기세가 마치 거대한 문어가 다 잡은 물고기를 향해 다가가는 것 같았다.
멧돼지 괴물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몸을 틀고 뒤쪽으로 내달렸다.
내가 있는 쪽이다.
그때 멀리서도 난 놈의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살고 싶은 눈빛이다. 편육 따위는 되고 싶지 않은 간절한 바람이 눈에 가득했다.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뛰어오고 있는 놈을 향해 난 검을 겨누고 손잡이를 꽉 틀어쥐었다.
놈이 검에 닿았다.
그리고 검을 중심으로 멧돼지 괴물은 좌우로 갈라졌다.
쩍!
하늘에는 마치 물감통을 터트린 것처럼 괴물의 초록색 피가 흩뿌려졌고 그 피는 내 얼굴과 놈의 갈라진 몸통과 그리고 민머리의 얼굴···. 아니 머리에도 흩뿌려졌다.
"젠장 벌써!"
그 번쩍이는 민머리는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멧돼지만 보고 달려들던 놈은 그 속도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민머리 앞으로 섬뜩한 무릎이 지나가며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빡!
민머리는 그 충격에 다시 멀리 날아갔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갑자기 나타난 성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램프 꺼졌다."
내 눈빛만으로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램프가 꺼졌다면 주변에 살아있는 괴물도 없을뿐더러 저 민머리도 괴물은 아니라는 거다. 적어도 아직은
난 운동복 바지를 바닥에서 집어 들고 영문도 모른 채 쓰러져 있는 놈에게 다가가 내밀었다.
"일단 좀 입어라!"
놈의 반짝이는 머리가 움직였다. 그리고 바지를 받아 들더니 내 뒤에 숨어서 급하게 입었다.
그동안 실컷 다 보여줘 놓고서 지금 숨어서 입는 게 무슨 소용일까?
그래도 난 최소한의 존엄은 지켜주고 싶었다.
"너 뭐냐?"
바지를 다 입은 놈에게 묻고 있는데 놈의 눈동자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버스 쪽이다.
'어? 설마?'
그런데 청년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거였다.
"성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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