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J1. 텅 빈 국도
버스는 어느새 시내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었다. 도로의 모습은 예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따금 멈춰선 작은 트럭이나 승용차가 보였지만 그마저도 계속 달리다 보니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난 계기판을 확인하며 운전하다 [투명] 버튼을 눌러서 껐다.
"이것도 은근히 코르카 먹는 거 같더라고"
"왜 그랬어?"
뜬금없이 갑자기 성희가 물었다.
"뭐가?"
"할아버지 강릉에 모셔다드린다고 한 거"
"아···. 그거"
사실 할아버지에게 가진 의심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우리 목적지가 사실 정해진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도 우리가 납득할 이야길 해주셨으니 한 번 믿어봐야지, 아 우리가 아니라 나만 납득한 건가?"
"아···. 그날 아침에 각성한 걸 알았다는 이야기는 뭐···. 딱히 못 믿을 건 아니었는데···. 강도들 만났을 때 좀 심했던 건 아닌가 싶어서"
성희는 할아버지의 잔인했던 모습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나도 그게 마음에 걸리긴 했어, 특히나 그런 놈들을 더 증오하시는 거 같더라고. 사정이 있겠지."
"별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빨간 머리가 강릉 이야길 하길래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았어, 서로 견제도 될 거 같고"
성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나 부엌 쪽으로 가서 뭔가 만들기 시작했다.
"저번에 주먹밥 맛있더라"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버스 덕분에 사는데 조금이라도 밥값은 해야지"
내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성희가 꺼내자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버스에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이미 충분히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때 창밖 도로변에 부서진 민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괴물에게 밟혔는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이구아나 괴물이라도 지나간 건가?'
하지만 도로는 텅 비어 있어서 악셀을 조금 더 밟았다.
"원래도 한적한 국도라 장애물이 없어 좋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핸들을 꺾어 코너를 도는데 갑자기 앞에 가로로 길을 막고 있는 트럭이 나타났다.
"아씨! 입방정!"
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지붕에 있던 빨간 머리가 버스 앞으로 떨어졌다.
"윽!"
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괜찮아?"
그녀는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괜찮아요!"
그녀는 전방에서 길을 막고 있는 트럭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마트 트럭인 거 같은데 한번 살펴볼게요."
빨간색의 마트 물류 트럭이다. 다행히 옆으로 쓰러지진 않았지만, 편도 2차선 도로의 중간 가드레일까지 부수고 반대쪽 차선까지 침범해서 길을 막고 있었다.
난 액정의 탐지 숫자를 확인했지만, 근처에 괴물은 없었다.
"조심해"
할아버지도 궁금한지 지붕에서 내려와 트럭으로 걸어갔다.
빨간 머리가 굳게 잠긴 짐칸의 문짝을 뜯어내려다 손목의 통증이 남았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비켜봐"
할아버지가 다가가서 잠겨있는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끄으"
노인의 신음이 버스까지 들렸다.
우두두둑! 팅!
잠금장치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텅!
녹슨 금속의 소리를 퍼트리며 할아버지는 트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거의 비었어!"
빨간 머리도 짐칸에 올라가 안을 살피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내려왔다.
우리 버스에 없는 유용한 물품이 있을까 나도 내심 기대했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길을 막고 있는 저 트럭 자체다.
"치울 수 있겠어요?"
내가 소리치자 할아버지는 내려와 트럭을 옆으로 밀기 시작했다. 빨간 머리도 한 손이 여전히 불편한지 나머지 한 손으로 같이 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트럭은 조금 흔들리는 느낌만 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만"
할아버지는 트럭 운전석으로 올라가 내부의 뭔가를 조작하고선 내려와 다시 트럭을 밀었다.
"끄아아!"
아까보다는 조금 더 움직이는 느낌이긴 했지만, 앞부분이 가드레일에 꽉 끼어있는 탓에 치우기가 쉽지 않을 거 같다.
될 수 있으면 버스의 힘 없이 해보려고 했지만, 괴력의 각성자로도 해결이 어려워 보였다. 난 하는 수 없이 버스를 천천히 출발시켰다.
"밀어보게?"
할아버지가 물었다. 버스의 힘이 아무리 신비롭다고는 해도 저 트럭을 옆에서 밀어버릴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주변에 진부한 악당 따위가 있을지도 모르니 긴장하세요."
"안 그래도 살피고 있었어"
할아버지는 주변을 살피며 버스 옆으로 비켜났다. 빨간 머리는 할아버지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우두두둑
버스가 트럭의 옆 부분에 닿자 뭔가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스의 방어막은 아주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두두두둑 지이이익
뭔가가 구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트럭 짐칸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트럭 앞부분은 여전히 가드레일에 꽉 끼어있어서 짐칸의 움직임과 엇박자가 나고 있었다.
우두두두둑
가드레일과 트럭의 프레임에서 계속 구부러지고 끊어지는 소리가 연이어서 들려왔다. 그리고 버스의 타이어가 조금씩 헛도는 느낌이 들었다.
위이이이잉!
'예전 터널 생각나네'
난 조금 더 힘껏 악셀을 밟았다.
두두두두둑
거슬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약간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쾅!
가드레일과 엉켜있던 트럭의 앞부분이 부서지며 튕겨 나왔다.
휙! 서걱! 쨍! 툭!
"악!"
부서진 트럭의 부품과 금속 조각들이 사방으로 마구 날아갔다. 그중 몇은 우리 근처로 빠르게 날아왔다.
대부분은 버스에 닿고 튕겨 나갔고 시끄러운 굉음 때문에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그 소음 속에 여성의 비명이 섞여 있었던 거 같다.
트럭의 움직임을 막던 힘이 약해지자마자 짐칸은 순식간에 뒤로 밀렸고 목이 반쯤 꺾인 트럭의 앞부분도 동시에 회전하며 옆으로 밀려났다.
"휴! 겨우 길 뚫었네!"
"어?"
그런데 테이블 자리에 앉아 있던 성희가 놀란 소리를 질렀다. 급히 버스를 세우고 일어나 고개를 돌리니 성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쩌지?"
바닥에 빨간 머리가 쓰러져있었고 할아버지가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피?"
꽤 많은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배를 강하게 누르며 우리에게 소리쳤다.
"어떻게 좀 해봐!"
난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를 버스의 침대에 눕히면 치료는 될 거다. 그런데 그러려면 승객으로 등록해야 한다.
'그래도 될까?'
그녀가 수상한 건 아니지만 버스의 승객 추가는 그래도 신중해야 했다.
"어떡할 거야?"
성희가 물었다. 난 길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죽게 둘 수는 없잖아? 악당도 아니고, 우선 살려야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희는 버스 옆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쓰러져있는 그녀를 안고 버스로 다시 뛰어오며 나에게 눈짓했다.
난 액정을 보며 메시지를 기다렸고 성희는 그녀를 안고 순식간에 버스 문 앞에 도착했다.
<나라를 탑승객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난 바로 [예]를 눌렀다.
'이름이 외자였구나, 나라'
출혈은 생각보다 심했다. 우리는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히고 상처를 살폈다. 부서진 쇳조각이 배에 깊숙하게 박혀있었고 출혈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이거 빼면 출혈이 더 심해질 텐데"
우리는 그저 연고 바르고 반창고나 쓰는 일반인이다. 이런 상황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거 말고는 접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빼야 해."
그녀는 선반에서 붕대를 한 움큼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침대를 믿어보자, 내가 빼자마자 출혈 부위 꽉 눌러"
성희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날 잠시 바라보며 심호흡하더니 힘껏 쇳조각을 빼냈다. 그 순간 울컥하고 피가 쏟아져나왔다.
"눌러!"
난 온 힘을 다해 상처 부위를 눌렀다.
"아아악!"
기절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녀의 비명을 들으니, 마치 여기가 병원 응급실인 것 같다.
성희가 소독약의 뚜껑을 열더니 상처 부위에 그대로 들이부었다.
"그래도 되는 거야?"
"뭐라도 해야지"
소독약이 상처에 그대로 닿자 그녀는 다시 더 큰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때 버스 문밖에 우두커니 서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가족이 응급실에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버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몸 좀 살짝 들어봐"
난 한 손으로 강하게 출혈 부위를 압박하며 그녀의 상체를 안고 살짝 들었다.
그러자 성희는 다른 붕대를 더 꺼내더니 그녀의 배 부분을 강하게 감았다. 여전히 피가 붕대에 조금씩 번지고는 있었지만 심한 출혈은 멈춘 거 같다.
버스의 신비한 침대가 이미 동작해서 그런 건지 우리가 응급처치를 잘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괜찮을까?"
내 말에 성희는 대답 없이 누워있는 나라를 바라봤다. 다행히 숨은 아직 붙어있는 듯 약하게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내 질문에 내가 답했다. 바램이고 믿음이다.
난 피가 흥건한 손을 씻으러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때 아직도 버스 문 앞에 서서 침대를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자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김씨 할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약간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
내가 손을 다 씻고 욕실에서 나오는데도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성희는 싱크대에서 이미 손을 씻은 듯 거실에 앉아서 침대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녀의 앞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사연이길래 오늘 처음 만난 생판 남한테 저러는 걸까?"
"그러게···. 무슨 트라우마 같은 게 있으신가?"
그때 아무런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보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집사람이랑 우리 핏덩이···."
그는 무슨 이야길 꺼내려다 자신의 목소리에 본인도 흠칫 놀란 듯 말을 멈췄다.
"괜찮을 거예요."
그는 날 잠시 바라보더니 뭔가 할 말을 삼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버스 뒤쪽 사다리로 걸어갔다.
"말 못 할 사연이 있으신 거 같아"
성희의 말에 나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왜 간절하게 강릉으로 가고 싶어 하는 지, 그 이유도 저 사연에 있지 않을까?
하지만 굳이 더 물어보진 않았다. 그저 그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진심인 것 같은 느낌이면 나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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